김수환 추기경

"어머니, 내 어머니"

문성식 2011. 2. 11. 03:34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 "어머니, 내 어머니"
 
당신의 깊은 신앙심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사진설명> 
1951년 9월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수환 추기경이 어머니 서중하 여사를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 추기경은 어머니의 기도가 없었다면 성직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 유학을 다녀오라는 교구장님의 명령은 정말 뜻밖이었다. 아마도 교장신부님이 우리 주교님(대구대목구 무세 주교)께 나에 대해 좋게 말씀해주셔서 그렇게 된 것 같다. 교장신부님은 버릇없이 말대꾸한다고 내 뺨을 때리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괜찮은 녀석인데'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잠시 어머니(서중하 마르티나, 1955년 작고)에 대한 얘기를 하고 넘어가고 싶다.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성직자가 혈육의 정에 연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자기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나에게도 내 어머니는 가장 크고 특별한 존재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하고, 이 막내아들을 위해서라면 10번이라도 목숨을 내놓으셨을 분이다.
 
난 비교적 무뚝뚝한 아들이었다. 길을 함께 걸을 때도 난 나대로 앞서 가고 어머니는 뒤에서 따라오곤 하셨다. 목석(木石)같은 아들이 못마땅하셨던지 언젠가 "네 형(김동한 신부)하고 같이 가면 심심찮게 말도 부치고, 재미난 얘기도 들려주건만 너는 어찌 그리 돌부처같냐"고 불평을 하셨다.
 
효도라고 해봐야 어머니 뜻대로 신부가 되고, 오래 전에 약속한 대로 삼(蔘)을 한번 사드린 게 고작이다. 부모에게 삼을 달여드리는 게 효도라고 생각한 나는 어릴 때 "돈을 많이 벌면 서른쯤 돼서 삼을 사드릴께요"라고 몇번 약속을 했다.
 
그때는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25살에 결혼해서 자리잡고 착실히 돈을 벌면 그때쯤 보약을 지어드릴 형편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 약속을 용케 기억하고 계시다가 내 나이 딱 서른이 되자 먼저 얘길 꺼내셨다. 그래서 쥐꼬리만한 신부 월급을 톡톡 털어 삼을 사드린 적이 있다.
 
달성 서(徐)씨인 어머니는 가난한 옹기장수 아버지(김영석 요셉)와 결혼해 평생을 힘겹게 사셨지만 자식들 앞에서 한번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다.
 
그 시절 대구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 인품과 신심이 돈독하기로 소문난 서동정이란 외삼촌이 계셨는데 그 분이 십수년 연하인 누이동생(어머니)을 늘 존경에 가까운 경애심으로 대하는 것을 보았다.
 
코흘리개 시절의 일이다. 일본에 가있던 큰형(김달수)한테서 편지가 왔다. 다리에 화상을 입어 다 죽게 됐다는 기별이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일본말을 한마디도 못하시는데도 즉시 주소만 들고 현해탄을 건너가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는 형을 들것에 실어 데려오셨다. 그리고 큰아들의 썩어들어가는 다리를 온갖 약을 써서 3년 만에 고쳐놓으셨다. 내 생각에 어머니는 자식이 아프면 어떤 약을 써야 좋은 지를 본능적으로 아시는 분 같았다. 어머니의 용기와 의술이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와 나이 차가 큰 달수 형님은 아무래도 방랑병이 있었던 것 같다. 다리가 낫자 이번에는 만주로 떠났다. 한동안 편지가 오는 듯하더니 소식이 끊겼다. 어머니는 그 바람에 3번이나 간도 연길과 하얼빈까지 가서 큰아들을 찾아 헤매셨다.
 
집안 형편이라도 넉넉하면 좋았으련만 어머니는 돈이 없어 포목을 머리에 이고 행상을 하면서 그 멀리까지 기나긴 여행을 하셨다.
 
마지막으로 다녀오셔서는 "하얼빈역에서 네 형이 보여 뒤에서 큰 소리로 불렀더니 한번 돌아보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 놓쳐버렸다"며 슬퍼하셨다. 그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으셨다. 어머니가 그 말씀을 꺼내실 때마다 우리는 "사람을 잘못 보셨겠죠. 형님이 그 멀리까지 찾아온 엄마를 못본 척하고 피하셨겠습니까?"라고 위로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니다. 어미 눈은 못 속인다"며 미련을 떨치지 못하셨다.
 
내 마음에 새겨진 어머니의 영상은 온갖 풍상으로 주름진 늙은 어머니, 만날 길 없는 큰아들을 찾느라  낯선 거리를 헤매는 애타는 모정(母情)의 어머니다. 어머니의 눈과 마음은 마지막 날까지 큰아들을 찾느라 구만리를 헤맸을 것이다.
 
1980년대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든 KBS 남북이산가족찾기 생방송 때 나 역시 형님이나 그 자손들이 우리를 찾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남몰래 TV를 지켜보곤 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방송국에 나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혈육의 정이란 게 그런가 보다.
 
우리 집은 참으로 가난했다. 대신학교 시절, 집에 내려갔다가 어머니와 형수가 "내일 아침에 먹을 쌀이 떨어졌다"고 걱정하시는 소리를 엿들은 적이 있을 정도다. 그래도 어머니 덕분에 가난에 찌들어 살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가난 속에서도 신세를 한탄하거나 궁색한 티를 내지 않으셨다. 옛날 가난한 선비마냥 끼니를 잇지 못할지언정 강인하고 꼿꼿한 정신만은 잃지 않으셨다. 우리 형제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 때문인지 서울 동성상업학교 시절에 동료들은 "부잣집 아들인 줄 알았다"며 놀라는 표정을 짓곤 했다.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과 기도는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내가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오자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네 어머니 기도 덕에 살아온거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거나 전쟁터에 나가 있을 그 시간에 어머니는 계산동성당 성모당 앞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기나긴 기도가 없었다면 난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사제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1955년 3월 "어머니! 어머니!"하고 다급하게 부르는 나에게 기대신 채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는 "다리에서 바람이 난다"는 말씀을 가끔 하셨다. 그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다가 내 몸에서 그런 증세를 느끼고서야 알게 되었다.
 
늙으신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단 5분만이라도 나를 찾아와 주신다면 무릎을 꿇고 어머니의 야윈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싶은 게 이 막내아들의 사모곡(思母曲)이다. <계속>
 
[평화신문, 제728호(2003년 6월 15일), 정리=김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