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동성상업학교 시절(上)

문성식 2011. 2. 11. 03:30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3] 동성상업학교 시절(上)
 
신부되기 싫어 꾀병 부리다 진짜 축농증 걸려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예비과)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동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는 갑조(甲組)와 을조(乙組)로 편성된 5년제였는데 갑조는 일반 상업학교였고, 을조는 나처럼 신부가 되려는 학생들이 다니는 소신학교였다.
 
전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1921~1993), 전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1920~1988)가 입학동기다. 지학순 주교는 도중에 결핵에 걸려 중퇴했다가 몇년 후에 함남 덕원신학교로 편입했다. 그 때문에 동기들 가운데 '꼴찌'로 사제품을 받았다. 하지만 1965년 가장 먼저 주교직에 올랐다.
 
그때 동기들이 그의 주교서품식장에서 "하느님 말씀 중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마태 20, 16)라고 하셨잖아."라면서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동성학교에 진학해서도 사제직에 확신을 갖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시간이 좀 흐르자 '꼭 신부가 돼야 하나?' 하는 회의가 '나 같은 사람도 신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그런 갈등 속에서도 공부는 그럭저럭 해나가고, 주일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북한산에 올라가 소리도 지르고 노래도 부르다 내려왔다.
 
2학년 때였다. 대구 집에서 방학을 보내고 올라왔는데 무슨 까닭인지 다른 때보다 의욕이 더 떨어졌다. 성유스티노 신학교 시절, 집에 가고 싶어 1원짜리 동전을 갖고 꾀를 부리다 실패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꾀병을 앓기로 마음 억었다.
 
담임 신부님이 아파서 누워 있는 학생에게 빵을 갖다주는 장면도 여러번 본 터라 이왕이면 빵도 얻어먹을 수 있는 꾀병이 좋을 것 같았다.
 
담임 신부님께 "머리가 몹시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 기숙사에 누웠다. 그런데 신부님은 정 못 참겠으면 집에 가서 휴양을 하고 오라는 말씀은커녕 이틀이 지나도 빵조차 갖다 주지 않으셨다. 밖에서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도 한낮에 꾀병으로 누워있는 '가짜 환자'의 마음을 괴롭혔다. 이번에도 실패한 것 같았다.
 
다시 일어나서 공부해야 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는데 옆에 누워있는 선배가 내 병세를 꼬치꼬치 캐묻더니 축농증이라는 진단을 내려주었다.
 
축농증? 난생 처음 듣는 병명이지만 그럴듯한 병명을 하나쯤 대고 싶었던 터라 신부님께 가서 "저는 축농증에 걸렸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신부님은 "축농증이 뭔지 아느냐?"고 묻길래 선배한테 주워들은 증상을 자세히 댔다.
 
곧바로 신부님이 소개해준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진짜 축농증이었다. 그 바람에 수술까지 받고 한 학기를 쉬게 됐다. 같은 교정에서 공부하는 상급반 동한 형에게는 혼이 날까봐 신부되기 싫어 꾀병을 부렸다는 얘기를 차마 꺼내지 못했다.
 
3학년에 올라가서는 어느 정도 마음을 잡았다. 꾀병 때문에 뒤진 한 학기 공부를 만회하느라 책을 붙들고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공부에 탄력이 붙었다. 그 전에는 도서관에서 주로 소설책을 뽑아 읽었다. 그런데 소설이라는 게 남녀가 만나서 사랑하다 헤어지고, 때로는 삼각관계에 빠지는 내용이 대부분이라 얼마 안 가 흥미를 잃었다.
 
반대로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성인전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았다. 사실 도서관에 더 이상 읽을 소설책이 없어 빼든 성인전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기운이 솟았다.
 
돈 보스코 성인과 소화 데레사 성녀 일대기를 그때 읽었다. 특히 소화 데레사 성녀 일대기는 소설에서 느껴보지 못한 뜨거운 감동을 안겨 주었다. 지금도 소화 데레사 성녀의 이 말씀을 기억한다.
 
"하느님은 미미한 존재를 통해서도 당신의 사랑을 충분히 드러내는 분입니다… 기쁨과 고통 등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내게 심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열심한 성인 얘기 일색이라고 쳐다보지도 않던 성인전에서 영적 뜨거움을 느끼고, 모든 게 하느님 사랑으로 귀착되는 섭리에 조금씩 눈을 떠갔다. 한마디로 말해 하느님께 기울고 있었다.
 
신앙적 순수함 때문인지 3학년때는 소위 '세심병(細心病)'이란 걸 앓았다. 죄같지도 않은 죄까지 꼬치꼬치 고해 신부님께 고백해야 마음이 편한 결벽증 같은 증세 말이다.
 
심지어 고해성사를 보고 나오는데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죄가 생각나서 다시 돌아가 "아까 ○○죄를 빠트렸습니다"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같은 우스꽝스런 행동을 몇번 되풀이하자 고해 신부님이셨던 프랑스 출신의 공 신부님은 "너, 자꾸 그러면 신부가 될 수 없다"라고 타이르셨다.
 
세심병이 깊어지자 나 같이 부족한 사람은 다른 이들의 영혼을 구제하는 신부가 될 자격이 없다는 자격지심이 들었다. 사제직에 대한 열망도 없이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신학교에 온 사람이 무슨 신부가 된단 말인가.
 
어느날 심호흡을 크게 하고 공 신부님 방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이만 신학교에서 나가겠습니다."라고 정중히 말씀드렸다. <계속>
 
[평화신문, 제726호(2003년 6월 1일), 정리=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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