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일본 상지대학 유학시절(下)

문성식 2011. 2. 11. 03:36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7] 일본 상지대학 유학시절(下)
 
강제 입영 앞둔 친구가 누이동생 부탁
 
 
<사진설명>
일본 상지대학 유학 시절 절친했던 친구 박철(왼쪽). 학병에 나갈 무렵 헤어진 연변 용정 출신의 이 친구를 찾으려고 나름대로 수소문해 보았으나 여태껏 재회하지 못했다.
 
 
건강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소중한 것은 잃어버린 후에야 그 가치를 안다.
 
유학 시절에 무슨 식(式)을 할 때마다 군가 비슷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전쟁 기간이어서 더 그랬던지 일본 학생들은 그 노래를 우렁차게 부르면서 뜨거운 조국애를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 같은 유학생들은 입만 놀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언제쯤 내 조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생각해보면 참 기가 막힐 일이다.
 
일본에 적개심을 품고 있는 한국 신학생이 사제가 되겠다고 유학을 와서 일본 전장(戰場)에 끌려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훈련소에 입소해 "쏴!", "찔러!" 구령에 맞춰 총검술 훈련을 받을 생각을 하니 난감하기만 했다. 도대체 누굴 향해 쏘고, 찔러야 한단 말인가.
 
일본은 1941년 진주만 기습을 감행하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 날로 치열해지자 학생들까지 전쟁터로 내몰려는 책동을 전방위적으로 펼쳤다. 심지어 대구 집까지 찾아가서 가족을 괴롭히고, 대구 주교님(일본인 하야사까 주교)에게도 "신학생들의 학병 지원율이 저조하다"면서 압력을 가했다.
 
이광수, 최남선 같은 저명한 지식인들도 일본에 건너와 유학생들에게 "학병에 입대해 죽을 때에야 조선이 제국의 일원이 될 수 있고, 그리하여 조선인이 황국신민이 될 때에야 신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요지의 유세를 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 유학생들의 적은 일본이었다. 학병지원 압력이 점점 거세지자 우리들은 기가 막힌 '작전'을 짰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지원해서 일본이 주는 밥을 먹으면서 전술을 열심히 익히자. 그리고 중국으로 파병되면 그 쪽에 있는 우리 독립군에 합류해서 일본군과 목숨을 걸고 싸우자."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친구 남규일(전 부산 성모여고 교장)과 '일본 탈출 대작전'을 세웠다. 친구와 함께 보름 동안 동경역에 나가 기차표를 알아 보았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 차례만 되면 발매가 끝나버렸다. 짐작컨대 한국인이어서 표를 안 준 것 같았다.
 
그래서 배를 타고 함경북도 청진으로 가기로 하고 배표를 구했다. 청진을 거쳐 덕원신학교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형사들이 청진 부두에 상주하면서 눈에 띄는 학생들을 강제 입대시킨다는 소문이 돌았다. 배표를 구하기는 했는데 마침 공교롭게 독감이 걸려서 배를 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먼저 배에 오르는 친구와 약속을 했다. 만일 청진에 내려 강제 지원하게 되면 나에게 '지원했다'고 전보를 쳐주기로 말이다. 얼마 후 그 친구에게서 전보가 도착했다. 첫 전보에는 '지원했다'고 하더니 그 다음 전보에는 '덕원으로 간다'고 적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청진에서 강제로 학병지원서를 쓰고 난후 여관방에서 다른 친구들과 독립군으로 넘어가자고 의기투합을 하다가 형사에게 발각돼 감옥으로 끌려간 것이었다.
 
학병 얘기를 하다보니 팔자(?)를 고칠 뻔한 웃지못할 해프닝이 기억난다.
 
한 친구는 자기만 전쟁터에 가는 줄 알았던지 하숙집에 찾아간 나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난, 수환이 자네가 맘에 드네. 오래 전부터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었네."
"무슨 부탁?"
"… …"
 
서울 돈암동 출신인 그 친구는 호주머니에서 누이동생 사진을 꺼내더니 "한국에 가거든 누이동생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가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난 신학생이고, 나중에 신부가 될 사람이라고 설명을 했더니 그제서야 미안하다고 했다. 훗날 그 누이동생과 한국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참 예쁘기는 예뻤다.
 
나중에 들리는 얘기로는 누이동생은 김(金)씨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 세례명을 나와 같은 '스테파노'라고 지었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오빠한데 뭐 들은 얘기가 있나' 하고 생각했다. 마산교구장 재직시절에도 누이동생은 나를 몇 번 찾아왔다. 어느날 둘의 관계(?)를 아는 누이동생의 친구가 내게 "저 사람하고 연애했죠?"라고 물어본 적 있다. 그래서 "연애는 못해보고 할 뻔했다"고 대답해 주었다.
 
아무튼 내게도 학병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작별인사를 하려고 나의 영적 스승인 게페르트 신부님을 찾아뵈었다. 신부님은 차를 끓여 내오셨다.
  
"스테파노, 하느님을 원망하는가?"
"신부님, 찻잔이 넘칩니다."
"예수님도 이 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께 왜 나를 버리시느냐고 절규했네. 하느님은 결코 자네를 버리시지 않으실거야."
 
신부님은 의자에서 일어나 내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축복을 해주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신부님의 손이 심하게 떨리더니 우시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사나이의 울음소리였다. 그분이 식민지 나라의 신학생인 나를 진정으로 아껴주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사랑하는 제자를 사지(死地), 그것도 남의 나라 전쟁터에 보내는 스승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난 그 사랑을 감당할 수가 없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서강대 설립자이시기도 한 게페르트 신부님은 지난해 여름 일본에서 돌아가셨다. 서강대에서 봉헌된 영결미사를 내가 집전했다. 돌아가시기 몇달 전 마지막으로 찾아뵈었을 때도 내게 "한국과 한국교회, 그리고 한국의 제자들을 위해 늘 기도한다"고 말씀하셨다. 신부님의 유해는 서강대 도서관 옆 로욜라 동상 밑에 봉안돼 있다.
 
문득 옛 스승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평화신문, 제730호(2003년 6월 29일), 정리=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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