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충북 괴산군***한국 천주교 순교자 묘 聖地 순례ㅡ연풍면 삼풍리ㅡ연풍 순교자 묘 성지.

문성식 2022. 5. 7. 12:41

한국 천주교 순교자 묘 聖地 순례ㅡ연풍면 삼풍리ㅡ연풍 순교자 묘성지




1791년(정조 15) 신해교난(辛亥敎難)으로 연풍지역에 은거하던 가톨릭 교인 추순옥(秋順玉)·이윤일(李尹一)·김병숙·김말당·김마루 등이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처형당한 자리이다.


괴산읍에서 연풍, 문경 방면으로 20km 정도 떨어져 있고, 문경새재 서쪽 기슭의 고지에 자리잡고 있다. 연풍면은 소백산맥의 산릉에 속한 험지여서 예로부터 경기,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은신처를 찾는 순교자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어 일찍이 신도촌이 형성되어 왔다.


1963년 천주교회가 연풍공소의 예배소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시대의 향청 건물을 구입하였는데, 이곳은 전에 헌병주재소, 경찰지서 등으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


이곳에서 논과 집터 정리 작업을 하면서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 3개를 발견하였고, 1968년에는 한국천주교 103성인(聖人)에 속하는 황석두(黃錫斗:1811~1866)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남에 따라 성지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황석두는 1813년(순조 13) 연풍면 병방(兵房)골에서 태어나 1866년(고종 3) 충청남도 보령군 오천면 갈매못성지에서 순교하였다.

1974년 천주교회에서 이곳을 성역화하였고, 1982년 평해 황씨 문중산에 묻힌 황석두의 유해를 이장해왔다. 성지 내에는 옛 연풍향청 건물과 높이 8.5m의 십자가상, 황석두의 입상과 묘가 있다.


십자가상 왼쪽에는 역시 갈매못성지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등 5인의 성인상과 순교현양비(殉敎顯楊碑)가 서 있다. 문 앞에는 처형석(處刑石)을 전시하고 있으며,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이 있다. 매년 2만여 명이 순례를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


연풍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 황석두 루가의 고향이며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돼 있던 뿌리 깊은 교우촌이다. 연풍 마을과 문경 새재의 구석구석마다 선조들의 자취와 피의 순교 역사가 어려 있다. 연풍은 전체가 소백 산맥의 산릉에 속한 험지이고 문경군과 접경지대에 조령산과 백화산 등 소백 산맥의 주봉들이 높이 솟아 있다. 그만큼 험난하기에 예로부터 경기,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서는 순교자들의 피난의 요로로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 됐었다. 남부여대(男負女戴)로 보따리를 싸서 박해의 서슬을 피해 연풍으로 몰린 교우들은 새재라는 천험의 도주로를 이용해 여차 하면 밤을 틈타 험준한 산 속으로 숨어들어 새재 제 1·2·3관문 성벽 밑에 있는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연풍 순교 성지


◆연풍 일화


연풍에는 한 가지 웃지 못할 일화가 전해진다. 병인박해로 한국 교회는 아홉 명의 성직자를 잃었다.

천신만고로 세 명의 선교사가 목숨을 건졌는데 그중 칼레(Calais, 姜,1833~1884, 아돌프) 신부에 얽힌

이야기가 그것이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칼레 신부가 연풍을 지나던 중 포졸들에게 발각돼 도망치다가 붙잡히려는 찰나에 그만 전대가 풀어져 돈이 떨어졌다.

그를 쫓던 포졸들은 돈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틈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풍성지 위치도


연풍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로 추정된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보면, 을해박해 당시 안동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김흥금이 1801년에 입교했는데 너무 가난하여 연풍 고을 교우들이 사는 곁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침 대박해가 일어나서 그 신자들이 붙잡혀 서울로 이송되어 가자 김흥금은 진보(경북 청송군 진보면) 땅으로 도주했다고 나온다. 이 기사로 봤을 때 1800년 이전에 이미 연풍에 신자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는 이미 이곳 신자가 체포된 기록이 나타난다.


이후 박해가 계속되면서 이 연풍 지역에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나 프랑스 선교사들이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기 위해 자주 넘나들던 경유지가 되었다. 산세가 험난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경기,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서는 순교자들의 피난의 요로로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연풍에서는 황석두(黃錫斗, 일명 재건, 1813~1866, 루카) 성인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나이 스물에 과거 길에 나섰다가 천주교 신자가 되어 돌아온 그는 3년 동안의 벙어리 흉내 끝에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켰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는 그를 회장으로 두고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토록 했다. 


연풍은 1866년 병인박해 때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 황석두 루카의 고향이며,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던 뿌리 깊은 교우촌이다. 연풍 마을과 문경 새재의 구석구석마다 선조들의 자취와 피의 순교 역사가 어려 있다. 


▲연풍 순교성지


▲연풍 순교성지


▲연풍 순교성지


▲연풍 성지 안내판


▲연풍성지 입구 우편 연못


▲연풍성지 입구 좌 (십자가의길, 예수성심상, 노기남 주교상)


▲예수성심상, 노기남 주교상


▲연풍성지 입구 우 (성 황석두 누가 묘, 다섯 성인상, 향청)


▲예수성심상과 다섯 성인상


▲예수 성심상


▲예수 성심상 뒷면


▲한국인 첫 대주교인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동상


노기남 대주교는 1982년 8월25일 성 황석두 루가의 전묘식을 주례하고 축성 하였는데 이것이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한국인 첫 대주교인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동상


▲한국인 첫 대주교인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동상 기단


▲성 황석두 루가의 묘(1813-1866)


성인 황석두 루가는 1813년 충북 영풍현 병방골에서 양반집 3대 독자로 출생하였다. 일명 '재건'으로도 불리는 성 황석두 루가는 성장하여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보러 상경하던 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다. 그 후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해가면서 교리서적을 탐독하였고 그 결과 박대하던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였다.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나이 스물에 과거길에 나섰다가 '천국의 과거 시험에 급제'하고 돌아온 그는 3년 동안의 벙어리 흉내 끝에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킨다. 황석두 루가는 뛰어난 덕행과 교리지식으로 신부들의 복사로 또한 조선교구의 출중한 전교회장으로서 다블뤼 주교를 도와 "영세대의" "성찰기략" "신명초행" "회죄직지" 등 중요한 교회 서적을 번역 편찬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앙에 눈뜬 뒤 고 페레올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 받고 독신생활을 하였다.


이에 페레올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려 했으나 부인이 들어갈 정식 수녀원이 조선에 없다는 이유로 교황청의 허락을 못 받았다. 병인박해 때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안 주교를 몇 십리나 따라가 결국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에서 가진 고문과 회유를 받던 황석두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의 날을 기다린다. 하지만 당시에 왕의 결혼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피를 흘리라는 조정의 지시에 따라 서울에서 250리 길이나 떨어진 보령의 갈매못으로 이동한다.


1866년 3월30일 성 금요일에 안 다블뤼 주교, 오메트로 신부, 위앵 신부, 장주기 요셉과 동시에 충남 보령 오천의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54세로 순교했다.1968년 10월6일 교황 바오로6세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 시복을 받았다.


1980년 7월9일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 선산에서 유해를 발굴하여 1982년 8월25일 연풍성지내로 유해를 전묘하였다. 1984년 5월6일 서울 여의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성 황석두 루가의 묘


▲성 황석두 루가의 묘


▲성 황석두 루가의 묘


▲성 황석두 루가의 묘


▲성 황석두 루가의 묘, 십자가 뒤의 조형물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황석두 성인을 포함한 다섯 성인들을 상징하고 있다.


◆김흥금(金興金)


김흥금(1765~1815). 순교자. 세례명 미상, 일명 명숙.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가난으로 인해 연풍의 교우촌으로 이사한 후, 1801년 아들 장복(長福), 딸 작단(作丹)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러나 입교한 지 얼마 안 되어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경상북도의 진보로 피신,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던 중 1815년 부활 축일을 지내다가 김시우, 이시임 등 마을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안동 진영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내고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이해 10월(음) 아들 장복과 함께 형벌과 굶주림으로 대구 감영에서 옥사하였다. 그러나 딸 작단은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다섯 성인상과 반석


성인 황석두 루가와 함께 순교한 다섯 성인의 순교사는 다음과 같다. 병인양요때 불란서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였으나, 조선군은 이를 물리치고 나서 불란서군이 진출하였던 양화진 절두산에서 1866년 10월에 수천명의 신자들을 목베어 죽였다. 같은 이유로 충남 보령 오천은 서양인 처형 장소로 선정되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대원군은 경북궁을 다시 짓는 바람에 백성들의 원성을 듣게 되엇다. 거기다 북방에서 침략을 일삼는 러시아와 담판을 짓기 위해 불란서 주교를 불렀으나 공소에 나가 있던 주교가 이를 알지 못하여 지체하게 된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대원군은 드디어 박해를 일으킨다. 조선 제5대 교구장이엇던 다블뤼 안 주교는 대원군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만나려 했으나 실패하자 내포로 돌아와 전교에 힘쓰던 중 뜻밖에도 신부와 교우들이 마구 잡혀 처형된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관에 나가 잡힐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얼마 후에 포졸들이 그가 머물던 합덕 거더리 마을로 왔을 때 잡힐 것을 예상, 동료 오 신부, 민 신부에게 자수를 권하는 편지를 보내 합덕 거더리에서 함께 포졸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1845년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는 조선 교구 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주교의 순교로 1866년 3월 7일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됐다가 4일 만인 11일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가와 함께 내표 지방에서 체포되었던 것이다. 다블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도 자진해서 잡혀 서울로 압송됐다. 그러나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게 되고 국혼(國婚)도 가까운 시기여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이들을 250여 리 떨어진 보령 수영(保寧水營)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 네 명은 갈매못으로 향하는 250리 죽음의 행진을 떠나게 됐는데 여기에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가 합세, 모두 5명이 함께 자진해서 죽음을 향해 떠나갔다. 이들 세 성직자와 두 전교회장이 갈매못을 향해 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군 음봉면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막걸리로 목을 추기고 마지막 설교를 한 다음 성가를 부르며 끌려갔다는 대목은 장엄하기 까지 하다. 그 때 그 바위는 지난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3월 30일 수난주일 충청 수사(水使) 앞에서 배교를 거부한 안주교가 제일 먼저 칼을 받았고, 이어 오 신부, 민 신부, 황 루가, 장 요셉이 차례로 치명하였다. 이때 다블뤼 주교는 조선에 입국한 지 21년이 되고, 전임 베르뇌 장 주교를 도와 9년간 부주교직에 있다가 조선교구의 제 5대 교구장이 된지 21일 되는 날이었다. 이들 5인의 순교 성인 중 황석두 루가 성인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연풍에 안장했고 나머지 네 분의 유해는 사흘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됐다가 홍산으로 옮겨졌고 브랑 신부에 의해 일본 나가사키로 이장, 다시 1900년에 명동 대성당, 1960년대에 시성 시복 운동이 전재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장됐다


▲옛 연풍 향청 (연풍공소)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연풍공소로 옛날 향청 건물을 사들이게 되면서 부터이다. 3백년된 이 건물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이곳이 순교 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했다. 하지만 매입후 논과 집터 정리 작업 중에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3개나 발견됐다. 또 1968년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남에 따라 성지 개발이 가시화 됐다. 1979년에는 평해 황씨 문중산에 묻힌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확인, 1982년 연풍성지로 이장했다.


▲연풍 향청


▲연풍향청 대문(좌)과 공소사택(우)


▲연풍향청 성모상


▲향청 앞 형구돌, 향청에서 발굴된 3개의 형구돌 중 하나이다.


현풍성지에서 3개의 형구돌을 발굴 하였는데 첫번째 것(1963)은 절두산 성지에 기증, 보관돼 있으며, 두번 째 형구돌(1972)은 성지내 형방건물 정면쪽에 그리고 세번째 형구돌(1992)은 대형 십자가가 있는 치명터로 부터 바로 50m 지점에서 발굴되어 성지내에 전시되어 있다. 형구돌은 직경 1m, 둘레는 4-4.5m의 크기이며 바위돌 가운데에는 직경 25-30cm, 뒷직경 7cm의 원추형 구명이 뚫려 있다.


◆연풍 일화

연풍에는 한 가지 웃지 못할 일화가 전해진다. 병인박해로 한국 교회는 아홉 명의 성직자를 잃었다. 천신만고로 세 명의 선교사가 목숨을 건졌는데 그중 칼레(Calais, 姜,1833~1884, 아돌프) 신부에 얽힌 이야기가 그것이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칼레 신부가 연풍을 지나던 중 포졸들에게 발각돼 도망치다가 붙잡히려는 찰나에 그만 전대가 풀어져 돈이 떨어졌다. 그를 쫓던 포졸들은 돈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틈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1처



▲십자가의 길 2처


▲십자가의 길 3처


▲십자가의 길 4처


▲십자가의 길 5처


▲십자가의 길 6처


▲십자가의 길 7처


▲십자가의 길 8처


▲십자가의 길 9처


▲십자가의 길 10처


▲십자가의 길 11처


▲십자가의 길 12처


▲십자가의 길 13처


▲십자가의 길 14처


◆십자가의 길 14처(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


▲대형 십자가 공원


▲대형 십자가 공원


▲대형 십자가 공원


▲순교 현양비


▲대형 십자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