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충북 제천시***한국 천주교 최양업 신부 묘 聖地 순례ㅡ제천 봉양읍. 배론 성지(舟論聖地)

문성식 2022. 5. 7. 12:08

천주교聖地ㅡ충북 제천시 봉양읍. 배론 성지(최양업 신부 묘)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



▲배론성지 초입 표지석


▲배론성지 위치도


▲배론성지 초입 십자가 탑 


▲배론 성지 표지석


한국 천주교회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 사건과 유적을 간직한 뜻 깊은 곳이다. 배론(舟論)은 치악산 동남 기슭에 우뚝 솟아 있는 구학산(985m)과 백운산(582m)의 연봉이 둘러 싼 험준한 계곡 양쪽의 산골 마을로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리어졌다. 1784년 이 땅에 천주교가 전례된지 얼마 안 되어 1791년 신해교란이 일어나자 교우들이 심심산골인 이곳으로 피난해 와서 농사와 옹기구이로 살아가며 6개의 교우촌을 이루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던 곳이다.


▲배론성지 안내문


▲교우촌과 황사영 백서 쓴곳을 알리는 안내판


▲배론성지 안내문


2001년 3월 2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재단법인 천주교원주교구에서 소유, 관리한다. ‘배론’은 이곳의 지형이 배 밑바닥과 같은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천주교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조선 후기 천주교도 황사영(黃嗣永:1775∼1801)이 머무르며 백서(帛書)를 썼던 토굴과 최양업(崔良業:1821∼1861) 신부의 묘가 있으며,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어 권철신(權哲身)·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정약종(丁若鍾)·주문모(周文謨) 등이 처형되었다. 이때 많은 천주교도가 구학리 배론 산골에 숨어살았다.


황사영도 배론에 숨어 있었는데, 그는 조선교회의 박해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 방안을 호소하는 백서를 써서 황심(黃沁)·옥천희(玉千禧)에게 중국에 가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따라가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발각되었다. 이 배론의 토굴에서 쓴 밀서를 황사영백서라고 한다.

1856년(철종 7)에는 프랑스 신부들이 이곳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를 세우고 성직자를 양성하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신부들이 처형당하고 신학교가 폐쇄되었다.

조선 천주교사상 두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도 이곳에서 1861년 순교하였는데 뒷산에 그의 묘가 있다. 배론은 전국 각지의 성지순례 신자들이 끊임없이 찾는 한국 천주교의 성지이다.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 표지석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성덕을 기리며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이 성당은 배 모양으로 설계 시공되었다. 대성당의 의미는 첫째, 배론이라는 지명을 조형화한 것인데, 이 곳은 골짜기의 모양이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둘째, 노아의 방주가 그러햇듯이 교부들은 초기부터 교회를 구원의 배로 이해하고 표현 하였다. 사나운 세상의 풍랑 속에서 안전하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항해하는 배를 지음으로서 2000년기의 세기말적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고자 하는 뜻과 2000년 대희년은 물론 제3000년기를 향한 희망의 뜻을 담았다.


셋째, 최양업신부가 입국하기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하여 그분이 지니셨던 불굴의 선교의지를 본받고자 하였다. 대성당의 명칭은 이 배를 인도해 주실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기리는 바다의 별 대성당"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대성당의 규모 대지 2,930평, 연건평 616평, 수용인원 대성당 : 2,000 여명 소성당 : 300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


▲최양업 조각공원 가는길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 내부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 내부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 내부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 내부제대 뒷편


▲배 모양의 내부 천장


▲성당 내부


▲대성당 감실


▲성 모자상


▲대성당 소제대


대성당 소제대 모습, 순례자들의 미사를 위해 대성당 왼쪽 벽에 두 개의 소제대가 마련되어 있고,

각 제대에는 성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대성당 소제대, 성 김대건 유해 


▲성 김대건 신부 유해


▲대성당 소제대, 성 최양업 유해 


▲대성당 최경환, 최양업  유해 


▲소성당 내부 스테인드글라스


▲소성당 내부 스테인드글라스


▲소성당 내부 스테인드글라스


▲배론성당


▲배론성당


▲배론성당


▲배론성당내부


▲배론성당내부


▲배론성당내부 제대


▲성 남종삼 유해, 김대건 신부 척추 뼈 


▲성요셉성당 입구 


▲성요셉성당 입구


▲진복문(眞福門)과 성요셉성당


▲성요셉성당


▲성요셉성당 내부


▲성요셉성당 내부


▲성요셉성당 내부


▲성요셉성당 내부


▲성요셉성당 내부


▲성인 유해


▲황사영 소상 


▲베론성지 옛 신학교 안내판


1855년 충청북도 제천(提川) 배론[舟論]에 설립된 성 요셉 신학교를 이르는 말로 초대교장에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가 취임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폐교되었다. 1855년에는 배론 공소 회장 장주기(張周基)의 집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교장 푸르티에 신부, 교사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가 조선인 신학생을 가르쳤다.
현재의 가톨릭대학교가 그 기원을 두고 있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다. ‘성 요셉 신학당’은 1866년 병인박해때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폐쇄되었다.


▲배론신학교와 항사영현양탑


▲배론 신학교


▲배론 신학교


▲배론 신학교


▲배론 신학교


▲교수 푸르티에 신부


▲푸르티에 신부(Pourthi, Jean Antoine) (1830-1866)


푸르티에(Pourthi, Jean Antoine, 한국명 : 신요안) 순교자는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교구의 `발랑스 앙 알리브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하여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선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상해를 거쳐 해로로 한국에 잠입, 충청도 베론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 요셉과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교수 프티니콜라(박덕노)신부 상 


▲프티니콜라 (Petitnicolas, Michel Alexander)신부 (1828-1866)


프티니콜라(Petitnicolas, Michel Alexander, 朴 신부) 신부는 1828년 프랑스 코앵슈에서 출생하였고, 1852년에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사제가 되어 1853년 인도로 파견되었으나 풍토에 적응을 못하고 홍콩으로 갔으며 이후 조선으로 부임 명령을 받았다. 1856년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중국에서 해로로 조선에 입국하여, 한때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에 있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요셉신학교에서 원장으로 일하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체포되었다. 그는 한국어를 잘하였고 의술에도 능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어로 교리를 전하고, 또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 또한 3만 이상의 라틴어와 10만에 가까운 조선어를 담아 《나한사전(羅漢辭典)》을 지었는데, 그 중 한 부는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고 나머지는 병인박해 때 소실되었다. 1866년 3월 11일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배론신학교


▲배론신학교


▲배론신학당


▲배론신학당


▲배론신학교


● 최양업 신부의 열 번째 편지
발신일 : 1854년 11월 4일
발신지 : 동골
수신인 : 리부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리부아(Lobois) 신부님께
우리의 착한 선교사이신 장수 양 신부님의 너무나 슬픈 별세 소식과 그 밖의 소식 등에 대해서 신부님께 반복하여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보내드린 제 편지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장수 신부님이 도착하심으로써 1853년 8월 12일자 사부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공경하올 페레을 주교님의 별세로 우리가 실의에 빠져 슬퍼하고 있을 때, 새 선교사 한 분이 입국하여 우리한테 오시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쁘고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신부님 편으로 사부님의 편지도 받아 읽었고, 다른 여러 신부님들과 그 분들의 활동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항해에서 얻은 병으로 지치고 탈진하신 불쌍한 선교사 신부님의 모습을 대할 때 우리는 무척 두렵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련한 포교지는 왜 이다지도 불행합니까! 장수 신부님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시기 위해 그렇게도 많은 고초를 그처럼 여러 해 동안 겪으시다가 천신만고 끝에 겨우 입국하셨으나 단 하루도 성한 몸으로 편안히 지내지 못하고 고생만 하시다가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조선에서는 조정이나 온 백성이 우리 선교사들과 우리 성교회를 몹시 비난합니다. 왜 선교사들이 몰래 입국하고 왜 몰래 가르치며 은밀히 신앙을 실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들에게는 천주교가 가증스럽고 수치스러우며 서양에서조차도 아무 가치도 없는 것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종교와 우리 서적에 기록된 교리는 어떤 내용이든지 한결같이 백성을 기만하기 위해 발명해 낸 교활한 속임수라고 조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천주학쟁이들은 서양 나라의 군주들이 모두 열심한 천주교인들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그 말이 정말이라면 왜 그 군주들이 사소한 일을 위해서는 많은 함선을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 자주 보내면서, 왜 인생의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인 종교에 대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가?


만일 선교사들이 굉장한 함선을 타고 공개리에 떳떳하게 조선에 들어오고 또 저들이 조선에서 전교할 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가 충분한 증명을 들어서 조선 정부에 부탁한다면, 그들의 임무 수행에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을 것이다. 진정으로 프랑스 정부가 천주교를 조선에서 공인받기를 원한다면, 틀림없이 조선 정부는 이것을 들어줄 것으로 확신한다."고조선 사람들은 한결 같이 말합니다.(조선과 프랑스는 1886년에 수호조약을 맺었다.)

지난 봄에 세 학생을 강남 거룻배를 태워 상해로 보냈는데 그들이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건강하게 잘들 있는지요? 신학교 교장 신부님은 우리 신학생들 각자의 성격을 지금쯤 잘 파악하셨을 줄로 압니다마는 제 편에서 교장 신부님에게 알려드리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 학생들 중 김 요한이라는 학생은 잔재주가 많고 성격이 불안정합니다. 일찍 바로잡아 주지 아니하면, 버림받을 위험이 있어서 상당히 염려가 됩니다.
또 학생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의 겸손을 잘 깨닫도록 이끌어주십시오.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겸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참된 인간성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인간의 본질을 정당하게 평가할 줄도 모르며 오로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세속적이며 외적인 영화와 부귀공명에서 찾을 줄만 압니다.

우리 포교지의 상태는 신자들 중에서 신분의 계급 차이로 서로 질시하고 적대시하므로 분열이 일어나서 큰 걱정입니다. 그리스도교 신덕과 형제애가 부족하고, 계속되는 논쟁과 암투와 증오로 신자 공동체가 와해되고 비 건설적으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이 폐단을 시정할 무슨 대책은 없는지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우리 포교지에 큰 손실을 초래하겠습니다.


사부님의 편지에 보면 장수 신부님 편에 상본과 십자고상과 성패 등을 보내신다고 쓰셨는데 저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여간 다음 기회를 기다리겠습니다.
우리가 분노의 그릇이 되지 말고 하느님 자비의 아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언젠가는 천국에서 만나 뵙게 될 하느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도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비록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적어도 하느님 아버지를 영원히 떠나지 아니 하도록,저와 가련한 조선 신자들을 위해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미약한 종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배론신학교



● 최양업 신부의 열한 번째 편지
발신일 : 1855년 10월 8일
발신지 : 배론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금년에는 신부님들한테서 아무 편지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어찌된 연유로 우리 연락원들이 상해로부터 소식을 가지고 올 거룻배를 하나도 만날 수 없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난 봄에 우리는 연락원들을 거룻배에 태워 상해로 보내 놓고 오롯한 마음으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연락원들은 상해에서 베르뇌(Berneux, 張敬一)새 주교님을 영접하는 동시에 신부님들에 대한 기쁜 소식과 또한 새로운 우리 협력자 선교사들을 모셔오기 위해 떠났던 것입니다.
우리 연락원들이 탄 거룻배가 강남에서 오는 신자 배를 만났습니다만, 그 사람들의 말이 주교님 일행이나 편지 등을 실은 배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거룻배는 연락원들을 강남 신자 배에 옳겨 실은후, 서양에서나 중국에서 전하는 소식을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조선에 돌아왔습니다.
원컨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신부님들이 편안히 계시고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연락원들이강남까지 무사히 도착해서 머지않은 장래에 새 주교님과 선교사들뜰 무사히 우리 포교지에 모셔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혜로 우리는 모두 웬만큼 건강하고 제법 평온히 지내고 있습니다. 금년은 풍년이 들어서 불쌍한 우리 신자들이 한시름 놓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더욱 큰 기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많은 새로운 형제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밭에도 풍년이 들었습니다. 저 혼자서 어른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한 숫자만 해도 자그마치 24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통이 터지는 일도 있습니다. 영세자들 중에 양반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하고 굳세어 보였습니다만, 지금은 다른 이들보다 더 쉽게 가시덤불이 무성해져서 숨이 막혀 시들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양반 계급의 사람들은 대개가 한가로운 생활을 합니다. 아무리 찌들고 가난해서 먹고 살아갈 것이 없어도 차라리 굶어 죽으면 죽었지 결코 일을 해서 최소한의 생계비라도 벌 생각을 안합니다. 그래서 횡령과 사기와 착취로 살아갑니다. 희생으로 삼을 제물 감을 찾아다니면서 한데 어울려서는 도박과 주색잡기에 푹 빠져 지냅니다.
저들이 입교하여 그리스도의 멍에를 짊어지게 되면 하느님의 법에 따라 그전의 방탕한 생활을 버리도록 강요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직한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꾸려나가기에 유익한 전문 기술이 전혀 없거나 전문 기술자가 될 소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벌써 먹을 것이 없는 처지이니만큼 굶주림에 못 이겨 이전의 못된 버릇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전보다도 더 나쁜 사람들이 됩니다.

요즈음 우리 조정에서는 신자들을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많아서 늘 분주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왕(철종)의 조상들의 8개의 묘를 이장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땅의 길흉을 관찰하는 우리나라 지관(地官)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지금 임금님의 조상들의 묘 자리가 불길하여 그 후손들이 번창할 수 없으므로 그 묘들을 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손들이 훨씬 더 크게 번성할 묘 자리를 지관들이 찾아다녔는데 공교롭게도 꽤 큰 읍내에 있는 어떤 곳이 가장 좋은 명당자리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읍내에 사는 주민들이 송두리째 쫓겨나서 다른 데 가서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죽은 지 여러 해가 지난 현 임금님의 고조부(사도 세자)에게 왕의칭호를 추존(追尊)하느냐 마느냐 하는 논란이 몇 달 전에 있었습니다.
지금 임금님의 고조부는 대신들의 당파 싸움의 와중에서 반란을 모의한 역적으로 몰려 그의 부친(영조)이 살아 있을 때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때 그 왕자를 처형하는 데 주동자들이었던 대신들의 후손들이 지금 조정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조상들이 무죄한 왕자를 불의하게 사형에 처하였다는 유죄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그 추존을 완강히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추존 문제를 제일 먼저 주장한 자는 귀양을 갔고, 그 추존을 찬동한 나머지 천여 명은 벼슬자리를 잃어버리고 형편없이 처량하게 지내고 있습니다.(사도세자는 영조의 아들이고 정조의 아버지이다. 사도세자의 추존 운동은 그때에는 실패했으나 1899년에 가서야 장조로 추존되었다.)
우리 대신들은 이러한 일이나 이와 비슷한 일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서로 헐뜯는 일로 날을 보냅니다. 또는 아무 쓸 데도 없는 무의미한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 일에 골몰합니다.
최근 몇 달 전에는 한 가지 법을 정하였는데 교자를 타고 다니는 것을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우스꽝스러운 법률을 어긴 탓으로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고 어떤 사람들은 귀양을 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백성들의 반대에 부딪쳐 이 법이 흐지부지되고, 몇 달 전부터 누구든지 교자를 마음대로 타고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예를 볼 때 신부님은 이 따위 정치인들이 다스리는 정부가 얼마나 한심스럽고, 또 이런 못난사람들에게 통치되는 불쌍한 백성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상상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제가 받은 신부님의 마지막 편지에서 저의 부모님, 즉 최 프란치스코와 이 마리아의 순교 행적에 대해 더 자세히 보고하라고 신부님께서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의 체포, 투옥, 고문, 문초, 순교 등에 관한 모든 경위를 더 자세하고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증인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증인들을 두 명 찾아내기는 했습니다마는, 제가 이미 신부님께 보고 드린 것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저의 아버지 프란치스코가 죽었을 당시에 감옥에는 프란치스코와 함께 체포된 사람 중 신자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어서 프란치스코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마지막 고문을 당한 후 반죽음을 당하여 감옥으로 운반되어 왔습니다. 차츰 정신을 되찾고 프란치스코는 신음하는 소리를 하며 자기와 함께 체포되었다가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한 자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마지막 처절한 고문을 받은 지 사흘 후 함께 잡힌 동료에게 "나는 오늘 죽을 겁니다. 목이 아주 마르니 마실 것을 좀 주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가져다준 물을 마신 다음 다시 한번 배교자들에게 대하여 동정하는 말을 하고 조용하고 평안하게 운명하였다고 합니다.
저의 어머니 마리아에 관하여는 마지막 형벌을 당하던 순간 즉 목이 잘리던 순간의 목격 증인을 한사람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순간의 유일한 증인으로 남아 있던 야고보라는 아들마저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십자가 형틀에 동여매어져 소달구지에 실려 형장으로 떠나려 할 때 유일한 증인으로 남아 있던 아들 야고보를 내보냈습니다. 그것은 서로 바라보다가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 려했던 때문입니다.
다만 마리아가 감옥의 하인 한 명을 가르쳐 예비시켰는데, 그가 아직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지는 못하였으나 하느님을 믿었고 형장에까지 따라가서 마리아가 흔연한 낯으로 형벌받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고, 또 그 이야기를 아들 야고보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저의 아버지의 시체는 아들과 친척들이 다 찾아서 매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어머니 마리아의 시체는 함께 참수된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묻혔으며 또 비신자들이 무서워서 밤중에 비신자들 무덤 가운데 묻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 무덤이 어디인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 프란치스코는 신자들 무덤 사이에 똑똑히 구별할 수 있게 묻혔습니다.

신부님께서 또 다른 순교자들과 그 밖의 주목할 만한 사건에 대하여서도 적어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건에 대해 글로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들을 많이 찾아내기는 했습니다마는, 아직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부님께 지금 말씀드리지는 못합니다. 이 다음 정확한 사실을 알게 되면 빠뜨리지 않고 신부님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신부님께 말씀드릴 것이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는 새 주교님 오시기만 초조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 주교님을 통하여 신부님들에 대한 기쁜 소식을 듣게 될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너그러우신 신부님께 아무것도 청하지 않겠습니다. 지난번에 신부님께 청한 것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도착하면 다른 물건들을 또 청하겠습니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 중에 저와 저의 불쌍한 조선 신자들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신부님을 통하여 모든 신부님들과 지극히 공경하올 대표 신부님께 간곡한 인사를 드립니다.
지극히 공경하을 사부님께, 가장 미약한 종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배론신학교 뒷편


● 최양업 신부의 열두 번째 편지
발신일 : 1856년 9월 13일
발신지 : 소리웃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오랫동안 소식 이 격조하였습니다. 이럴수록 더 많은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펜을 들기만 하면 모든 생각이 달아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기쁨을 표현하지 아니하고서는 못 배길 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착하신 목자 갑사(Capsa) 명의의 베르뇌 장 주교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일찍 이 큰 서원으로 갈망하였으나 그 갈망이 실망으로 변하여 잊어버린 지 벌써 오래된 주교님을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로 마침내 우리 안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장 주교님께서 새 선교사 두 분을 우리의 새로운 협조자로 동반하고 오셨으니 한층 더 기쁩니다. 원컨대 그렇게 엄청난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부당한 자들로 여겨지지 아니하기를 바랍니다.
1854년 9월에 신부님에 보내드린 저의 편지에서 제가 신부님의 편지와 성물을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금년에 존경하올 우리 장 주교님이 오시는 편에 신부님의 회답이 없어서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혹시저의 편지가 신부님께 전달되지 못하였는지요?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요?
(최 신부님의 9번째 편지는 분실되었다.)

그런데 경애하을 바랑(극동 대표부) 책임자 신부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참으로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매우 부당한 기도이지만 기도 중에 바랑 신부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이제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되어 저 세상에 계시는 바랑 신부님께서 살아 계셨을 때 못지않게 우리 가련한 포교지를 위하여 보살펴주시는 관리자가 되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금년에는 하느님 자비의 허락하심으로 사목 순회를 별 탈 없이 꽤 평온하게 무사히 마쳤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고기잡이 그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무려 180명이 넘는 어른이 거룩한 샘터에서 몸을 씻고 그리스도의 양 우리에 스스로 끼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가로막으려고 기를 쓰고 계속 소란을 피워대는 사탄의 난동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전라도 진밧들이라는 마을로 갔는데, 그곳은 얼마 전부터 마을사람 거의 전부가 교리를 배우며 세례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받을 준비를 다 마치고 선교사 신부님이 오기만 초조하게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저녁나절에 신자 몇 명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한 다음, 유아 세례에 이어서 대세받은 아기들에게 세례성사 보례를 집전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닭이 울 때 일어나 미사를 드릴 예정을 하고서, 영세 준비를 마친 어른 15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백 명이 넘는 포졸들이 마귀떼 같이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제가 성사를 거행하고 있는 집을 둘러싸더니 미사 가방과 성작 등을 빼앗아 가기 위해 제가 있는 방까지 들어오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함께 있던 신자들이 비록 숫자는 그들보다 적었으나 그들의 침입을 완강히 대항하여 못 들어오게 막았습니다. 문을 빙 둘러싼 그들은 온갖 폭력을 휘둘러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 하고 신자들은 죽을힘을 다해 그들을 물리치느라고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쌍방 간에 부상자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저는 몇몇 신자들과 함께 방 안에 있었는데 신자들의 도움으로 급히 미사짐을 챙겨 들고, 뒤 창문으로 재빨리 빠져나와 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산 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저와 몇몇 신자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바위와 가시덤불 사이로 허둥지둥 이리저리 헤매었습니다.
서로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우는 북새통에 양편에 부상자가 많이 났고, 결국에는 외교인들이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격렬하게 싸우고 나서도 아무것도 강탈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 그 마을을 관가에 고발하였습니다. 그래서 관장은 그 마을의 유력자 5명을 체포해서감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그 중 한사람은 이 바오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7,8년 전에 신자가된 그는 다른 신자들보다 더 열심하고 덕망이 높아서 그 마을(진밧들)의 회장으로 선임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하 아우구스티노라는 사람인데 그 고을 원님인 관장 다음으로 제일 높은 관리였습니다. 그는 겨우 3년 전에 영세했는데 벌써 많은 외교인들을 천주교로 이끌어 들였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주동자이고 천주교를 전파하는 자라 하여 체포되었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은 1년 전쯤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예비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외교인들이 우리를 습격하러 왔을 때 저한테서 세례를 받으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첫째 사람은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양반 가문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주교의 진리를 깨달은 후 집안에서 천주교를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가 있기 때문에 자기 고향을 떠나 이곳 산 속 교우들한테로 이사 와서 살고 있던 사람입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우리 공소에 포졸들을 데리고 왔던 배교자의 친척들이었습니다. 그 배교자는 첫 배반자인 유다 이스가리옷을 본받아 저를 체포하려고 공소를 습격한 것이었습니다. 그자는 배교한 후 내통자와 박해자로 변신하였습니다. 그 배교자는 이번 습격을 하기 전에도 자기 친척들인 두 사람의 예비 신자에게 온갖 방법으로 모욕과 핍박을 가하면서 자기를 본받아 배교자가 되도록 강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내심이 강한 그 두 예비 신자는 끝끝내 요지부동으로 항구하였습니다.
관가에 잡혀간 우리 신자들은 용감하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 하였습니다. 관원으로부터 하느님을 저주하라고 재촉을 받았을 때, 그들은 "이 세상의 임금님을 비방하여도 죄악이 되거늘 하물며 우주 만물을 영원히 지배하시는 하늘의 임금님이신 창조주께 욕을 한다는 것은 천상천하에 용납 받지 못할 극악 대죄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그런 큰 죄악을 범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차례 문초를 받은 후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각자가 자기 부담으로 먹을 것을 마련해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집안이 몹시 가난하므로 그들에게 옥바라지를 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저에게 여유가 있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저 사람들의 궁핍한 사정을 도와주고 싶지만 그러하지 못하니 한숨밖에 보낼 것이 없습니다.

신부님께서 저에게 편지를 보내주셨을 때 유럽 신자들에게 감동이 되거나 표양이 될 만한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이 있으면 적어 보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사건들을 수집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필요한 증인이 없어서 확증된 것을 많이 수집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한사람에 대해서만 신부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1839년에 조선 교회 전체를 쉽쓴 기해 대박해 때 순교한 사람입니다. 그는 시골 지방에 살았던 관계로 왕도(서울)사람들에게는 별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해의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던 때에 그 순교록(기해일기 )에서 빠졌습니다. 다행히 그의 행적에 대한 구술 내용을 적어놓은 종이를 발견하였습니다. 또 그의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 그리고 친구들이 생존해 있으므로 충분한 증명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교자의 이름은 최해성(崔海成) 요한입니다. 그는 충청남도에서신자 부모로부터 출생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하므로 모든 이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첫번 박해 때 그의 조부가 귀양을 가게 되어 온 집안이 그 조부를 따라서 귀양소까지 갔습니다. 그곳 고을에서 요한이 장성하였는데, 주위 정세로 보아 외교인들 한가운데 살면서는 천주교를 합당하게 실천할 수가 없어서 산 속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작은 교우촌을 형성한 다음 모든 이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착한 표양으로 모든 이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는 극도로 이 참한 가난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항구한 인내심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런 가난 중에서도 자기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애긍 시사와 자선 사업 등을 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천주교의 모든 본분을 이행하는 데 뛰어난 열성을 다하고, 신자들을 격려하며 비신자들을 권면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자기 마을에 선교사 신부님이 오셔서 성사의 은총을 받을 때에는 말할 수 없는 열심에 불탔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이 모든 덕행에 감동한 선교사 신부님께서 그를 그 마을 회장으로 선임하셨습니다. 그는 견진성사를 받은 후 성신 칠은의 특은을 충만히 받은 증표가 나타났습니다. 주님을 위한 순교로써 자기 자신을 살아 있는 희생의 제물로 하느님께 바칠 의욕이 나날이 커졌습니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가 날로 더욱 악랄하게 되자 요한은부모와 가족들을 좀 더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교회서적들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집으로 가던 중 포졸들과 마주쳤습니다. 포졸들이 요한을 신자인 줄 알아보고 체포하여 그에게 이웃 신자들을 고발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득이 없자 그를 관가로 끌고 갔습니다. 그는 포졸들한테서 얼마나 매를 많이 맞았던지 온몸이 상처투성이 였고 몸을 가누기조차 힘겨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혼의 눈으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오 산상으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러자 잡혀가는 길목인데도 느닷없이 힘과 활기가 용솟음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관가에 끌려가서 관장 앞에 섰을 때 관장이 "네가 사악한 종교를 신봉한다니 참말이냐?"하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나는 사악한 종교를 믿지 아니합니다. 하늘의주님을 섬기는 천주교를 믿을 따름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형리들이 그를 고문하는 동안에 관장이 "너와 함께 천주교를 믿는 자가몇 명이냐? 그들이 누구누구인지 이름을 대라. 그들이 어디 사는지 말하라."하고 다그쳤습니다. 요한은 "저는 제 형제들을 고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천주교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웃을 해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1차 문초가 끝난 후 감옥으로 다시 끌려가서 포졸들과 군중들한테 무수한 행패와 매를 맞아 기진맥진해졌습니다.
그는 며칠 후 다시 끌려나와 문초를 받았습니다. 관장이 "네가 천주를 배반하면 나라의 착한 백성이 되겠고, 너의 모든 재산을 되돌려줄 것이며 상금까지도 보태줄 것이다."라고 구슬렀습니다. 요한은 "저는 관장께서 온 고을을 다 주신다고 말씀하셔도 하느님을 결단코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편태를 자그마치 백 대 이상이나 맞고 감옥에 다시 갇혔습니다.
그 후 다시 재판관이 호출하여 "네가 정말 죽기를 바라느냐?"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요한은 "저도 다른 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죽기를 사양하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재판관이 크게 분노하여 곤장과 편태의 가공할 만한 형벌을 명하면서 말했습니다. "너의 종교를 위해 죽겠다는 말이 참말이라면 네가 죽을 때까지 치도록 하마." 요한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살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뼈가 드러났으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붙은 그의 영혼은 기쁨으로 용약하였습니다. 그는 지겹게도 21차례나 문초를 당하였습니다. 얼마나 모질게 고문을 당하였는지 살과 가죽이 헤어져 창자가 몸 밖으로 쏟아져 나왔으며 뼈가 으스러졌습니다. 문초 중에 당한 형벌 외에도 포졸들과 악당들에게 온갖 폭행을 다 당하였습니다.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1839년 9월 29에 목이 잘려 스물아홉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그가 천국으로 개선하는 마당으로 내려갈 날이 밝아왔을 때 그는 기쁨의 표시로 자기와 옥사쟁이들에게 작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가 영광스럽게 최후의 형장으로 끌려나갈 때에 그 동안 윽설을 퍼붓고 매질하고 형벌하던 포졸들과 백성들이 그를 뒤쫓아 가면서 눈물을 흘리며 그와 작별하였습니다.
다른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무척 많으나 아직 충분한 증거를 얻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게 되는때에 신부님께 더 자세히 보고하겠습니다.
저는 며칠 후 여기서 7백 리 떨어진 새 교우촌으로 출발할 예정 입니다. 이 교우촌은 귀양간 어떤 신자가그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의 씨를 뿌려 최근에 교우촌을 형성한 곳입니다. 그 신자가 사람을 보내어 선교사 사제를 모셔 오도록 청한 것입니다. 제가 이 교우촌을 방문하고 나서 혹시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있으면 다음 기회에 신부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신부님의 또 다른 분부가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저에게 아쉬운 것이 있으면 청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전에 아쉬워서 청했던 것과 같은 것들을 다시 청합니다. 아쉬운 것투성이여서 어느 것을 먼저 청해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무엇이든지 보내만 주시면 저에게는 다 필요하고 소용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보다 더 하느님의 자비가 저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를 위하여 저와 저의 가련한 조선 신자들을 신부님의 사랑이 넘치는 기도에 다시 의탁합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미약한 종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황사영백서 토굴


황사영과 함께 체포 압수된 백서는 고금천하에 둘도 없는 흉악한 글이라고 하여 정부는 이를 의금부 창고 속에 집어넣어 근 백년동안 숨겨오다가 1894년경 정부가 오랜 문서들을 정리 소각할 때 관계관이 이것은 필연코 천주교와 관련되는 것이라고 따로 간직해 두었다가 그의 친구인 천주교인 이건영(요셉)에게 넘겨주고 이씨는 민 주교께 바쳤던 것이었다.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민 주교는 이를 교황 비오 11세께 기념품으로 봉정하였다. 민 주교는 1924년 이 백서의 실물 대사본 2백여 매와 불문 번역본을 그때 교회내외 인사들에게 배부하였다


▲황사영백서 토굴


▲황사영백서 토굴


span style="color: #000000;">▲황사영백서


▲황사영백서


황사영(알렉시오)이 백서 사건


배론에 최초로 역사적 사건이 터진 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창원(昌原) 황씨 성을 가진 사영은 나이 16세에 장원급제, 정조가 친히 등용을 약조할 만큼 앞길이 창창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정약종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 듣고는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한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택한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짐과 동시에 서울을 빠져 나와 배론으로 숨어든다.


그 해 8월 주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그는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적는다. 하지만 백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히고 황사영도 대역무도 죄인으로 능지 처참의 극형에 처해진다. 이 때가 그의 나이 27세. 이 사건으로 그의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또는 경한)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십수 명이 공범으로 처단된다.


백서의 원본은 근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야 비로소 빛을 본다.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고, 현재 백서는 바티칸에 소장돼 있다. 백서는 흰명주에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 122줄을 13,384자를 가는 모필로 깨알처럼 곱고 정밀히 써진 것이다.


비록 황사영 자신이 쓴 글이나 자기 이름은 숨기고 황심(토마스) 등이라 했음은 우선 사영의 겸허한 마음의 표현이요, 사영의 판단에 황심이 북경 내왕이 잦고 이미 여러 차례 그곳 주교와 신부들을 만났으므로 누구보다도 신임을 더 받을 것으로 생각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제1부분은 신유년 박해에 순교한 이들 중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필두로 30여 명의 빛나는 사적을 열거하고, 제2부분은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의 골육 상잔의 당쟁(黨爭)이었음을 필역하고, 제3부분은 빈사 위기에 처한 교회의 희생과 동족학살의 구원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등 자신의 사견을 진술하였다.


백서 사건이 있은 후에도 배론 교우촌은 신분을 속이면서 신앙을 지킨 신자들 때문에 계속 유지되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1855년 무렵부터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으니, 바로 그 해 이곳 교우촌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 신학당이었던 배론 신학당은 철종 재위시에 비교적 평온했던 시기동안 교우수가 늘어남에 따라 조선의 사제양성을 위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신학교였다.


장주기(요셉)의 집을 빌어 신학교로 사용하던 배론신학당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한채 사라지고만다. 단 한명의 사제도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최초의 신학당으로서 드디어 한국교회에도 사제를 배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당시 조선교구의 장상 역할을 하고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의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는 신학교 설립을 결정한 뒤 배론의 회장인 장주기(요셉)가 제공한 세 칸짜리 초가집에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의 학생수는 6명에 불과했고, 교재도 변변치 않았으며, 방 하나를 교실 겸 숙소로, 다른 방 하나를 신부의 거처로 사용해야만 하는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다. 1856년에 교장으로 임명된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와 교사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는 아주 열성적으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배론 신학교는 이후 꾸준히 발전하였다. 신학생 중에서는 임 빈첸시오가 1864년에 소품을 받았고, 이 바울리노가 삭발례를 받았으니, 더 있었으면 이 땅에서 사제가 탄생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실을 얻을 수는 없었다.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의 회오리가 이곳에도 몰아쳤기 때문이다.


3월 2일, 포도청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푸르티에 교장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하였다. 그러면서 신학교도 자연히 폐쇄되고 말았다. 두 신부는 서울에 온 지 하루 만에 군문효수형을 언도받고 3월 11일에는 새남터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다.


한편 장주기 회장은 신부들이 체포되어 간 뒤 이웃 마을에서 체포되었고, 이내 서울로 압송되어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런 다음 자신이 원하던 대로 다블뤼 주교 등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의 고마수영)으로 옮겨져 1866년 3월 30일에 순교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배론은 또 다른 의의를 갖게 되었으니, 신학 교육의 요람지가 순교자들의 요람지로 변하게 된 것이다. 특히 장주기 회장이 훗날 성인품에 오름으로써 배론 순교사의 의미는 더욱 빛을 내게 되었다.


▲황사영 백서 압수 전말기


▲황사영 순교현양탑


▲최도마신부회관 과 황사영순교현양탑


▲황사영 순교현양탑 


▲황사영 순교현양탑


▲황사영 순교현양탑


▲황사영 순교현양탑


▲황사영 순교현양탑


◆황사영 알렉시오(1774-1801)


황사영 알렉시오는 그의 선조 10여 대가 판서 벼슬을 지낸 명문가 태생으로 부친 황석범 역시 진사 시험에 합격돼 한림 학사로 있었다. 하지만 황석범은 1774년 병사하고 사영은 유복자로 태어나게 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 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산데르라는 본명으로 영세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시 황사영은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黃沁)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힌다. 그는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진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 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헌(黃景憲)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황사영의 묘는 의정부교구인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 있다.


알렉산델 황사영의 묘


알렉산델 황사영의 묘,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는 신유 박해로 순교한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알렉시오)의 무덤이 외롭게 안장되어 있다. 당시 황사영은 양박 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형을 받았으므로 시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또 가까운 집안 사람들이 모두 유배를 당한 터였으므로 그 시신을 거둘 사람조차 없었다.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황씨 문중의 선산에 안장한 이들은 먼 친척이나 면식이 있는 신자들 몇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후 황사영의 무덤은 집안에서조차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양반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국사범으로 처형되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다가 180년이 지난 1980년에 황씨 집안의 후손이 사료 검토 작업과 사계의 고증을 거쳐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였다. 또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의 하나로서 창원 황(黃)씨이며 남인(南人)의 명문 출신이다. 부친 황석범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1790년(정조 14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그의 됨됨이와 재주를 높이 산 정조 임금은 친히 그의 손을 붙잡고 격려했으며 이에 그는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고 한다. 명문의 배경과 출중한 재주로 탄탄한 출세의 길을 앞둔 청년 황사영은 학문의 길을 위해 찾아 든 정약종의 문하에서 일생일대의 변화를 겪는다.


과거에 급제한 후 그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장녀 명련(命連)과 혼사를 치른다. 천주교인으로 명도회(明道會) 회장이던 약종은 사영의 빼어난 재능에 반해 장차 교회의 큰 일꾼으로 삼을 것을 다짐한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791년 그는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눈다.


결국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그는 알렉산데르란 세례명으로 입교한다.이로써 그는 부귀 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 진리를 찾는 고통스런 일생을 선택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이래 측근으로 주 신부를 봉행(奉行)하며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발한 전교와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을 희생시켰고 정약종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역시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 나와 탐스럽고 아름답던 수염을 깎고 상복으로 갈아입고서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숨어든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서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된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로 명주천에 적는다.


옷 속에 이 비밀 문서를 품고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된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 백서 사건은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그는 나라를 팔아 넘기려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된다. 이 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敬憲, 일명 경한)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된다. 가산은 모두 몰수당했고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풍지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여파는 16명의 또 다른 순교자들을 탄생케 했다.


▲최도마신부회관, 최대 100명까지 피정을 할 수 있다


▲최도마신부회관


▲최도마신부회관


최양업신부 동상


▲최양업 신부의 묘


배론성지에는 우리나라의 두 번째 사제이시며 땀의 순교자라고 불리시는 최양업(토마스)신부님의 묘가 있다.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0년의 공부끝에 사제품을 받으시고 조선에 귀국하셨다. 그 후 1년에 7000리를 걸으시며 12년간 조선의 어린양들을 위하여 사목활동을 하시던중 안동교구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전염병에 걸리시어 선종 하셨다.


배론 사적지가 갖고 있는 특징은, 첫째 그 복음사가 한국 천주교회와 함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는 점이고, 둘째 다른 사적지와는 달리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들을 함께 간직해 온 곳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요, 유명한 황사영(알렉시오)의 "백서"(帛書)가 탄생한 곳이며,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또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여러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순교사가 시작된 요람지이기도 하다.


▲최양업 신부의 묘


■ 순교자

◆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1803∼1866)
‘낙소’라고도 불렸던 장주기는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나 1826년에 세례를 받았다.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였고, 회장이 되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에는 자신의 집을 임시 신학교로 내어 주고,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땅에서 농사일을 하며 잔일을 도맡아 하였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신부와 박 신부가 체포되자 장주기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하였지만,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자수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견뎌 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 거더리에서 끌려 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황사영 알렉시오(1774∼1801)
황사영 알렉시오는 명문가 태생으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릴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되었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시 황사영은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혀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진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황사영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 있다.

◆ 푸르티에 (Pourthi, Jean Antoine) 신부 (1830∼1866)
푸르티에(한국명 : 신 요안) 순교자는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교구의 발랑스 앙 알리브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하여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선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상해를 거쳐 해로로 한국에 잠입하였다.


충청도 베론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 요셉과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 프티니콜라 (Petitnicolas, Michel Alexander) 신부 (1828∼1866)
프티니콜라(朴 신부) 신부는 1828년 프랑스 코앵슈에서 출생하였고, 1852년에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사제가 되어 1853년 인도로 파견되었으나 풍토에 적응을 못하고 홍콩으로 갔으며 이후 조선으로 부임 명령을 받았다. 1856년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중국에서 해로로 조선에 입국하여, 한때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에 있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신학교에서 원장으로 일하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체포되었다.


그는 한국어를 잘하였고 의술에도 능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어로 교리를 전하고, 또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 또한 3만 이상의 라틴어와 10만에 가까운 조선어를 담아 <나한사전>(羅漢辭典)을 지었는데, 그 중 한 부는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고 나머지는 병인박해 때 소실되었다. 1866년 3월 11일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최양업 조각공원 신부일대기


▲최양업 조각공원


◆십자가의 길 14처(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