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수지구 동천동ㅡ손골 순교성지(聖地)
▲손골 성지
손골은 예로부터 향기로운 풀이 많고 난초가 무성하여 ‘향기로운 골짜기’라는 뜻의 손곡(蓀谷)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손골은 주민들 사이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 즉 ‘성교촌(聖敎村)’이라고 불렸는데, 이요한과 그의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치스코 삼대는 손골에서 지내다 병인박해 때 피신하였고 1871년에 순교하였다.
특히 성 도리 헨리코(Dorie, Pierre Henricus) 신부는 1865년 조선에 입국하여 손골에서 선교 활동을 벌이다가 포졸들에게 직접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27세로 순교하였다. 그 후 도리 신부는 1984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서 시성됨으로써 한국 순교 성인 103위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손골성지 위치도
손골성지에 천주교 신자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었으며,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손골에는 그 수가 12가구의 교우들만 살았다고 한다. 손골성지가 천주교 성지로 유명하게 된 것은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전교 유적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손골 성지
▲손골 성지
▲손골 성지
▲성 도리 신부 묘역
▲야외 십자가의 길과 성 도리 신부상
▲성지 성당
▲성지 성당
▲성지 성당
▲성지 성당 내부
▲성지 성당 내부
▲성지 성당 내부
▲성지 성당 내부
▲성지 성당 내부
▲성지 성당 내부 십자고상
▲성지 성당 내부
▲성지 성당 내부
▲성 도리 신부상
▼십자가의 길 14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1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2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3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4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5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6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7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8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9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10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11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12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13처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14처
▲예수 성심상
▲성모 상
▲성 김 헨리꼬 도리(김 베드로),
도리 신부의 본명은 "삐에르 앙리(헨리) 도리"이다. 삐에르는 베드로의 프랑스식 이름이다. 이 이름은 부친 삐에르 도리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그래서 도리 신부님을 "김 베드로 신부"로 불렀다. 헨리꼬는 세례명이다. 도리 신부는 "김"을 성으로 택했다. 따라서 도리 신부는 "김 헨리꼬 도리 신부"라고 불러야 정확하다
▲성 김 헨리꼬 도리 신부
도리 신부의 본명은 "삐에르 앙리(헨리) 도리"이다. 삐에르는 베드로의 프랑스식 이름이다. 이 이름은 부친 삐에르 도리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그래서 도리 신부님을 "김 베드로 신부"로 불렀다. 헨리꼬는 세례명이다. 도리 신부는 "김"을 성으로 택했다. 따라서 도리 신부는 "김 헨리꼬 도리 신부"라고 불러야 정확하다
피에르앙리 도리는 1839년 9월 3일 프랑스 뤼숑 교구의 생 탈레르 드 탈몽 (Saint-Hilaire de Taimont)의 한 농가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염전과 농사 일을 하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천주교에 대한 신심이 깊었고, 가정을 평화스럽게 하였으므로, 도리는 건전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마을의 보좌신부의 추천으로 부모의 승낙을 얻어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60년에는 뤼숑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건강상의 문제로 인한 부모와 본당 신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해외 선교의 소명을 위해서 1862년 소품자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64년 5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음과 동시에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64년 7월 15일에 그는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볼리외 신부 그리고 위앵 신부 등과 함께 파리를 떠나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홍콩과 랴오둥 그리고 백령도를 거쳐 1865년 5월 27일에 충청도 내포 지방에 도착하여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후 그는 경기도 용인의 손골리에 배속되어 한국말을 배우며 선교하였다. 1866년 2월 병인박해가 발발하였고,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 며칠 후 포졸들이 하우고개에서 볼리외 신부를 체포하였고, 산등성이 너머에서 도리 신부도 체포하였다. 그 세 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모두 한양 의금부로 압송되어 수감되었고, 감옥에서 재회하였다.
1866년 3월 5일의 문초 때에, 관리들이 도리 신부를 고국으로 송환시키겠다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서 사는 동안 말을 배웠기에, 죽으면 죽었지 돌아가지는 못합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하였다.
그는 베르뇌 주교와 같은 날 군문효수형을 선고 받았고, 3월 7일에 베르뇌 주교와 여러 동료 신부들과 함께 새남터 사형장으로 압송되었다. 그의 처형을 목격한 한 천주교 신자의 증언에 따르면, "도리 신부는 눈을 내리뜨고 참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순교자로서의 당당함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 날 도리 신부는 맨 마지막으로 처형되었는데, 망나니가 내리친 두 번째 칼날에 그의 목이 떨어졌다. 그렇게 도리 신부가 순교의 영광을 하느님의 제단에 바쳤을 때의 나이는 27세였다.
교우들은 그를 포함한 순교자들의 시신을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현재 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성지 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성 도리 헨리꼬 김 신부 순교비
▲성 도리 헨리꼬 김 신부 순교비 상단 돌 십자가
상단 십자가는 특별한 것이다. 1966년 도리 신부님 순교 100주년을 맞아 도리 신부님 출신 본당인 "쌩 띨래르 드 딸몽" 성당의 주임 신부인 죠셉 그럴레 신부는 도리 신부와 손골 성지를 연결 하고픈 마음으로 도리 신부님 집에서 밀을 찧는데 쓰던 화강암으로 된 맷돌로 똑같은 돌 십자가 둘을 만들어 하나는 도리 신부님 생가 벽에 붙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에 보내 주었다. 이것을 받은 수원 북수원 본당은 한국산 화강암으로 된 돌로 순교비를 쌓고 맨 위에 고향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올려 놓아 현양비를 말들게 되었다. 1966년 10월 24일 축복 되었다.
▲성 도리 헨리꼬 김 신부 순교비
▲성 도리 헨리꼬 김 신부 약력
▲성 도리 신부 묘역
▲성 도리 신부 묘역
▲성 도리 신부 묘
▲성 도리 신부 묘역
▲성 도리 헨리꼬 묘소
▲십자고상
▲십자가의 길
▼야외 십자가의 길 14처
◆십자가의 길 14 처 (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
▲야외 십자가의 길 1처
▲야외 십자가의 길 2처
▲야외 십자가의 길 3처
▲야외 십자가의 길 4처
▲야외 십자가의 길 5처
▲야외 십자가의 길 6처
▲야외 십자가의 길 7처
▲야외 십자가의 길 8처
▲야외 십자가의 길 9처
▲야외 십자가의 길 10처
▲야외 십자가의 길 11처
▲야외 십자가의 길 12처
▲야외 십자가의 길 13처
▲야외 십자가의 길 14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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