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경기 하남시***한국 천주교 순교聖地 순례ㅡ망월동ㅡ구산순교자 9인 십자가, 성인묘

문성식 2022. 4. 21. 05:01

하남시망월동ㅡ한국 천주교 순교聖地 구산(龜山) 순교자 9인 십자가, 성인묘




▲구산성지 위치도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 위치한 구산 마을은 먼저 103위 성인 중 71번째 성인인 김성우(안토니오)를 비롯해 박해 시대에 많은 치명자가 탄생한 유서 깊은 사적지라는데서 그 교회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구산 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여덟 분의 순교자가 묻히신 거룩한 성지이다. 이곳 뒷산이 거북 형상을 닮았다 하여 거북 구(龜)자와 뫼 산(山)자를 써서 구산 이라고 하였다.


구산은 한강변 미사리 조정 경기장 옆에 위치해 있으며, 순교자들의 숨결이 200여 년 동안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곳이다. 모방 신부가 방문한 공소 중에서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이곳은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의 고향으로, 그는 1830년경에 셋째 아우인 윤심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 둘째 아우 덕심(아우구스티노)은 입교를 망설이던 끝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 후 3형제의 신앙 실천과 전교 활동은 실로 눈부셨으니, 얼마 안되어 구산 마을 전체는 하나의 교우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2001년 4월 9일 하남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387-10번지에 있다.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한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과 여덟 명의 로마가톨릭교회 순교자가 묻혀 있고, 160여 년 동안 순교 성인의 후손들이 살아오며 성인의 묘소와 가족 묘지를 보존하고 있다. 마을을 둘러싼 산의 모습이 거북을 닮아 구산(龜山)이라고 부른다.

한국전쟁 때는 원로 신부들의 피신처로도 이용되었다.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을 지낸 김세중(金世中)이 조각한 성모자상(聖母子像)이 유적지 내 잔디밭 한가운데 있다. 교통이 편리하여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으며, 조경이 아름다워 드라마와 광고, 영화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인근에 미사리 카페촌과 조정경기장이 있다.


▲성물방


▲성모 동산 입구


▲성모 정원


▲성모상 뒷편 묵주길


▲구산 성지 역사


▲십자가 동산


▲십자가 동산


▲구산 9인 순교자 명단


▲최지현 순교자 회개와 인내의 십자가


▲김경희(1823~1868 참수형) 성령의 십자가 눈물의 십자가


김경희는 순교자 김문집의 외아들로, 자는 치선(致善)이었으나 세례명은 알 수 없다. 1823년(순조 23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장성한 뒤 순흥 안씨 진환(鎭煥)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첫 부인이 일찍 사망하면서 전주 이씨 종태(從台)의 딸과 재혼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던 그는 비밀리에 자신의 집을 방문한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열심히 생활하다가 1868년에 부친과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남한산성 안에 있는 광주 유수의 치소로 압송된 그는 친척들과 함께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굳게 신앙을 지키고 1868년 2월 15일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김성희 암브로시오(1815~1868 참수형) 치유의 십자가


김성희는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로, 자는 희백(喜伯), 세례명은 암브로시오였다. 그의 세례명은 집안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훗날 족보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전주 이씨 범회의 딸이었는데, 후사가 없었으므로 김문집의 아들인 경희의 5남 교익(敎翼, 토마스)을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하였다. 김성희는 부친 김성우가 1841년에 순교하자, 그 시신을 찾아다가 구산에 안장하였다. 이후 그는 약국을 경영하여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860년경에는 매부 홍희만(洪喜萬)에게 교리를 전하는 등 전교와 신앙 생활에 열심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에 일가 친척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이겨낸 뒤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에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시신은 그의 양자 김교익이 밤에 몰래 찾아다가 구산에 안장하였다


▲김만집(김덕심) 아우구스티노 (1798~1841 옥사) 주님 닮은 십자가


김만집은 김성우 성인의 첫째 동생으로, 자는 덕심(德深) 또는 치영(致英)이고, '만집'은 그의 보명인데, 교회사의 기록에는 '덕심'이라는 자로 나온다. 비록 형제들보다는 늦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이후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아우인 김문집(베드로)과 사촌 김주집(金胄集, 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留守)의 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김만집·문집 형제와 사촌 김주집은 함께 재판관 앞에 나아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김만집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천주교는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無君無父] 이적(夷狄)·금수(禽獸)의 교가 아니라 천주님의 참다운 진리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형벌을 당하게 되었지만 이를 용감하게 참아 받았다.


사령들은 그에게 '배교한다는 것과 비슷한 말만 하면 석방될 수 있다'고 회유하였지만, 어떤 말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광주 유수는 그를 감옥에 가두도록 하고 한 겨울 내내 그대로 방치하였다. 1840년에 김만집의 아들들은 부친과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되면서 한때 석방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까지도 가졌으나 그 자신은 조금도 석방되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유수도 끝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경주김씨족보}에 의하면, 김만집은 장남 원희(元熙)와 차남 차희(次熙)를 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때 장남의 나이가 14세였으니, 차남은 10세 전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또 구산 마을에 전해 오는 전승에 따르면, 그가 남한산성에서 옥고를 치를 때 집안 사람들이 교대로 밥을 갖다주었는데, 돌아올 때면 눈물이 밥그릇에 가득 괴었다고 한다.


구산에서 남한산성까지는 40리가 넘는 고개 길인데 날마다 걸어서 밥을 날라다 주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김만집은 다시 오랫동안 험난한 옥고를 겪어야만 했으나, 신앙의 가르침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기 위해 이를 참아 받았다. 결국 옥중에서 병을 얻게 된 그는 몇 주일 동안 고통을 받다가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41년 1월 28일(양력 2월 19일)로,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끝까지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숨을 거둠으로써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김만집이 순교한 뒤에도 아우인 김문집과 김주집은 약 18년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858년에 석방되었다. 한편 김만집의 장남 원희는 부친이 순교한 뒤 버려진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


▲김성우 안토니오(순교자) 복음 전파의 십자가


▲김문집 베드로 (김윤심 1801~1868 참수형) 끈기의 십자가


김문집은 김성우 성인의 둘째 동생으로, 자는 윤심(允深)이며, '문집'은 그의 보명이다. 맏형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둘째형인 김만집(아우구스티노)과 사촌 김주집(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의 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김문집은 형 김만집과 함께 배교를 강요당하며 여러 차례의 심문과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천주가 진리임을 역설하였다.


그러자 재판관은 끝내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는 그대로 옥에 가두어 둔 채 한 겨울을 나도록 하였다. 그 중에서 형 김만집이 이듬해 초에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러나 김문집과 사촌 김주집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석방되지 않은 채 약 18년 동안을 갇혀 있다가 1858년 왕세자의 탄생을 계기로 베풀어진 특사 때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문집은 비밀리에 신부를 모셔다 성사를 보았으며, 언제나 교회를 도울 방도를 궁리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자 김문집은 형들과 같이 순교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순교의 열망을 키워 나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2년 뒤인 1868년(戊辰年)에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후손들을 모두 불러모은 뒤, "만일 기회가 온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영광스럽게 순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실제로 얼마 되지 않아 광주 포졸들이 구산으로 몰려왔고, 이내 그들은 김씨 집안의 성인 남자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때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김문집을 비롯하여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성희의 양자인 교익(敎翼, 토마스), 김주집의 장남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다. 그러니까 5촌 이내의 3대가 같은 날 같은 옥에 갇히게 된 셈이었다.


이후 김씨 집안 사람들은 여러 차례 유수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고통을 이겨냈다. 특히 68세의 김문집은 조카와 손자를 다독거리면서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자고 권면하였다.


그 결과 이들 6명 모두는 유수 앞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때 김씨 집안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포교가 '3대가 함께 죽도록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도중에 가장 어린 김교익을 언덕 아래로 밀쳐내 살려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 김문집과 아들·조카 4명은 1868년 2월 15일(양력 3월 8일) 함께 순교하였다. 이들이 순교한 뒤 김교익이 몰래 남한산성의 형장으로 가서 김문집, 김성희, 김경희 등 3명의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


▲김차희(?~ 1868 참수형) 증거의 십자가


김차희는 김만집(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로, 자는 희선(希善)이었으나 세례명은 알 수 없다. 부인은 광산 김씨였다. 그는 부친 김만집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1년 남한산성에서 옥사로 순교할 때 12세 전후의 어린 아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후로는 종형 김성희(암브로시오)를 따르면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한편 침술을 배워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의 침술은 인근에 잘 알려질 정도로 능통하였다고 한다. 김차희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에 일가 친척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옥리들이 하는 말을 듣고 포교의 아들이 위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침술로 그 아들을 소생시켜 주었다. 그 일이 있은 뒤 김차희가 하루는 심한 곤장을 맞고 신음하고 있을 때, 그 포교가 다시 찾아와 배교하고 살아나가라고 권유하였으나, 그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던 날 재판관이 모든 신자들을 끌어내 마지막으로 배교를 권유할 때, 김차희의 차례가 되자 그 포교는 그의 뒤에 서서 대신 "다시는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결과 김차희만은 형장으로 끌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이렇게 살아 남은 김차희는 그 순간부터 가슴이 떨리고 매를 맞아 부어오른 상처가 더욱 쑤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에 그는 다시 재판관을 향해 "조금 전의 대답은 제가 한 것이 아니오. 저는 비록 매를 맞아 죽을지언정 천주교를 버릴 수가 없소"라고 말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 인척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이 거두어 안양 수리산(현 안양시 안양 3동)에 안장하였으나 실전되고, 훗날 그의 의묘(擬墓)가 구산에 조성되었다.

▲심칠여(아우구수티노. 1832~1868 참수형) 주님의 종 십자가



심칠여는 구산 신자들 사이에서 전승되어 오지 않던 순교자이다. 그러나 {좌포청등록}에 따르면, 구산 태생으로 1859년 무렵에 이웃 마을에 살던 신자 심성일(沈聖一)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1864년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성인 주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심칠여는 1868년 윤4월 4일에 강원도 원주 태생 조종구(타대오), 경기도 지평 태생 민효원(나자로), 경기도 광주 태생 홍희만, 경기도 구산 태생 최지현 등과 함께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다. 처음의 문초 때에 그는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돌려 굳게 신앙을 고백한 뒤 많은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이후 순교자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으나, 훗날 구산 신자들이 그의 용덕을 기려 구산에 그의 의묘를 조성하였다


▲유해없는 세 순교자 완덕의 십자가


김윤희(1834-1868, 참수형)


김윤희는 김성우 성인의 사촌 김주집(스테파노)의 장남으로, 세례명은 알 수 없다. 김주집은 기해박해 때 김문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이후 약 18년 동안 옥중에서 고통을 겪다가 1858년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따라서 김윤희도 일찍부터 부친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윤희는 성장하면서 인척들과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고, 신부로부터 성사도 받았다. 그러다가 1868년에 5촌 당숙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6촌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김윤희는 집안 사람들과 함께 유수 앞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조금도 마음이 약해진 적이 없었으며,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에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 35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이후 순교자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으나, 훗날 구산 신자들이 그의 용덕을 기려 구산에 그의 의묘를 조성하였다.


▲구산 순례자들의 십자가


▲김성우 최지현 순교자 묘


▲김성우 최지현 순교자 묘


박해자의 손길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뻗혔다.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 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당시


김문집의 나이는 66세의 고령이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김씨 집안의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인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경희의 5남이자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경희의 6촌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김교익만이 안면 있는 포교의 도움으로 생환하였을 뿐 모두 순교하였다.


결국 구산의 순교자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하여 모두 7명이 된 셈이다. 한편 가까스로 생환한 김교익은 사형이 집행된 뒤에 매일같이 형장으로 찾아가 김문집과 김성희·경희 등 3명의 시신을 찾아다 구산의 가족 묘역에 보존되어 오던 성 김성우와 김만집 형제의 무덤 옆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김차희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에 의해 거두어져 안양 수리산에 안장되었다가 실묘되었으며, 후손이 없던 김윤희의 시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김성우 최지현 순교자 묘


▲김성우 최지현 순교자 묘


▲돌 형구(刑具)


김성우는 3년 뒤인 1833년에 유방제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어의동, 즉 서울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동대문 밖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서울 마장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구산으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을 마련하고, 1836년 여름에는 모방 신부를 모셔와 성사를 받았다.


이때 모방 신부는 김성우의 신심을 높이 사서 이곳의 공소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39년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3월 21일(양력) 포졸들에게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약간의 돈을 주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해 말에 다시 포졸들이 들이닥쳐 집에 있던 그의 아우들과 사촌 김주집을 체포하여 광주 유수가 있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끌고 갔다.


그중 둘째인 덕심은 체포된 후 고문을 참아 받으면서 관헌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였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41년 1월 28일에 통회와 신앙심을 지닌 채 병사로 순교하였다. 반면에 셋째인 윤심과 사촌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한편 김만집의 형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47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고 1925년 7월 복자위에 올랐다가 마침내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셋째인 김문집(金文集, 베드로)은 김만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다. 순교 후 김성우 성인의 유해는 아들 김성희(암브로시오) 등에게 거두어져 고향에 안장되었으며, 1927년 5월 30일에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명동 성당을 거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현재 구산 성지에는 그의 무덤과 두 형제의 무덤, 1868년 3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김성희와 김윤심의 아들인 김경희의 무덤이 있으며, 같은 날에 순교한 김덕심의 둘째 아들 차희와 김주집의 아들 윤희의 가묘, 그리고 1867년에 포도청에서 순교한 최지현의 무덤이 있다.


▲성 김성우 안또니오 기해박해 때 교수형


▲김성우 성인 묘소 이장 사진


최지현은 경주 최씨로, 자는 군실(君實)이다. {좌포도청등록}(左捕盜廳謄錄)에는 그의 세례명이 휘두(揮斗)로 나오는데, 이것이 정확히 어떤 세례명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구산 마을에서 부친 최규겸(崔奎謙)과 어머니 교하 노씨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훗날 용인으로 이사하여 살던 중에 아내 함열 남궁(南宮) 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되었다. 이때가 1860년경이었다.


그 후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아내가 먼저 체포되어 순교하자, 그는 박해를 피해 이곳 저곳으로 옮겨 살다가 1868년에 체포되고 말았다. {좌포도청등록}에 따르면, 최지현은 1868년 윤4월 4일 51세의 나이로 강원도 원주 태생 조종구(趙宗九, 타대오), 경기도 지평 태생 민효원(閔孝源, 나자로), 경기도 광주 태생 홍희만(洪喜萬), 경기도 구산 태생 심칠여(沈七汝, 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처음의 문초 때에 그는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돌려 굳게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친척이 찾아다가 그 집 산에 안장했었는데, 1978년에 순교자의 후손들이 구산으로 이장하였다.


▲옹기 가마



▲구산십자가 묵주길 돌기둥



▲구산성지 소성당


◆십자가의 길 14 처 (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b>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