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사적 제 439호로 원주강원감영지가 지정되었습니다. 지정 전 2000년 발굴조사 결과 중삼문터, 내삼문터, 공방고, 책방터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포정루에서 중삼문터와 내삼문터를 거쳐 선화당으로 이어지는 보도, 선화당을 중심으로 하여 외곽으로 둘러쳐진 담장터, 행각터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화당 뒤편에 있는 연못터인 방지의 호안석축 등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잘 남아 있습니다.
ⓒ 문화재청
감영의 규모는 선화당(정청)을 비롯하여 재은당(내아), 포정루(정문), 4대문, 객사 및 부속건물 등 31동 건물이 있었으나 원주시 청사, 재향군인회관 등이 생기면서 그 모습을 잃어 버려 현재는 선화당, 포정루, 청운당 등의 건물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건물의 관리 마저도 원주시청사, 재향군인회관 등이 생기면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원주시청사 등의 철거와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 결과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보존, 관리되게 되었습니다.
또, 2005년 중원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향로와 잔 같은 자기류와 상평통보와 숟가락, 비녀 등의 유물이 출토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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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원주에 소재한 강원감영은 약 600년 전 왕의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실현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국가 기관입니다. 왕을 대신하여 도의 최고 통치자가 권력을 행사하는 이 감영이 왜 강원도의 다른 지역을 두고 원주에 위치하게 된 걸까요?
먼저, 원주는 중앙에 있는 왕의 명령이 가장 신속하게 전달되고 또 그 명령을 강원도에 속해 있는 다른 각 지방으로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또, 원주지역이 강원도에서 인구와 토지 면적이 가장 풍부한 지역으로 도시의 규모가 그만큼 컸기 때문에 강원도 곳곳에서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기 편리한 동시에 사람과 물자가 다른 지역으로 전달되기도 편했습니다. 육로와 함께 남한강 수로가 서울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강원도 각 지역에서 거두는 모든 세금을 이곳 원주에서 모아 서울로 옮겼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서울과 강원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이었기 때문에 강원감영이 원주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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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감영은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 전체를 다스렸던 책임자가 머물던 곳입니다. 왕이 각 도의 책임자로 보낸 사람을 당시에는 ‘감사’ 또는 ‘관찰사’라고 불렀습니다. 관찰사는 자신이 맡은 지역에 대한 행정권과 사법권, 군대 통솔권을 가지고 있었고 1년에서 2년 정도에 걸쳐 강원도 곳곳을 다니며 ‘목’, ‘군’, ‘현’을 다스리는 ‘수령’이 어떻게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관찰사의 업무, 곧 감영에서 이루어지는 업무에 대해 살펴볼까요?
1. 農者天下之大本也(농자천하지대본야). 농업은 천하를 살아가는 데 근본이라는 말처럼 농업은 국가 재정의 기본 토대였기에 농업권장은 관찰사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습니다.
2. 사법권을 갖은 관찰사는 현재 법원의 재판관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 강원도에서 나쁜 짓을 일삼는 도적을 다스리는 토벌의 업무도 병행했습니다.
3. 관찰사는 농사업무와 함께 강원도의 군대를 통솔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감영제서 직접 다스리는 군대(순영)를 비롯하여 원주, 춘천, 철원, 강릉, 삼척에 많은 수의 군사를 집중 배치시켰습니다.
4. 강원도에서 내야 하는 모든 세금을 거두어 중앙에 납부하는 업무 역시 관찰사 담당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세금이 강원감영을 통해서 중앙으로 납부된 것은 아닙니다. 횡성, 원주, 영울, 평창, 정선, 강릉, 삼척, 울진, 평해 등 9개 군현에서 감영이 있는 원주 흥원창에 세금을 낸 다음 물길을 통해 서울로 납부했습니다. 이외의 강원도내의 지역은 육로나 물길로 실어 날랐다고 합니다.
5. 관찰사는 도내 각 지역의 책임자들이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보살피고 있는지에 대해도 평가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또, 지방에서 치러지는 과거시험(鄕試)를 주관하였고, 합격한 사람의 성명과 나이, 본관, 거주지, 아버지의 관직 등의 자세한 사항을 중아에 보고하고, 우수한 시험답안지를 묶어 규장각에 보내는 업무도 담당했습니다.
감영에서는 강원도의 인재를 선발하는 시험(監試)이 매년 6월에 치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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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국 각 도(道)를 다스리던 관찰사가 일하던 감영(監營)을 비롯하여 목사(牧使)가 업무를 보던 관청의 건물 배치와 구조는 크게 진입 공간, 집무 공간, 후원 공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원주강원감영지 배치도>
포정루(布政樓)는 관찰사가 집무를 보는 선화당으로 들어가는 진입공간에서 첫 번째로 위치한 출입구로 강원도에 부임한 관찰사가 시행하는 정사가 두루 잘 시행되는지 살펴보는 누각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포정루>
조선시대 원주지역에 자리했던 강원감영에는 크게 동문․서문․남문․북문의 4대 외곽문이 있었고, 관찰사가 일하는 선화당(宣化堂)으로 출입하는 진입공간에는 포정문에 이어 차례대로 중삼문(中三門)과 내삼문(內三門)이 있습니다. 중삼문은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들어서는 문이라는 의미의 관동관찰사영문(關東觀察使營門)이라는 고유한 명칭을 지니고 있는데, 이곳에서 재차 본인의 신원과 방문 목적을 밝혀야 했습니다. 내삼문은 징청문(澄淸門)이라는 편액에서 알 수 있듯이 문을 들어서면서 청렴결백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함을 관찰사를 비롯하여 모든 관인들로 하여금 상기하게 했습니다.
선화당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의 집무실로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관찰사는 이곳에서 강원도에 속한 각 지역의 행정․농정․조세․민원․군사훈련․재판 등에 대한 총괄적인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선화당>
강원감영의 후원은 관찰사가 사색을 하면서 잠시 쉬거나, 찾아온 손님과 대화를 나누거나 혹은 여러 사람들과 긴밀한 회의를 하거나, 또는 술을 한 잔 하면서 피곤함을 달래고 시를 낭송하던 공간입니다. 현재 강원감영의 후원공간에는 우체국이 자리해 있습니다. 이후 우체국이 옮겨지면 아름다운 연못과 그림 같은 누각이 세워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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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의미와 가치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역에 소재한 문화재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우체국 가다가 마주치는 옛날 건물로만 인식하고 별다른 주의와 관심을 갖지 못한 경우가 있지 않으신가요?
강원감영 역시 우리의 무관심으로 방치되다가 발굴조사 결과 그 터와 출토된 유물을 통해 그 가치와 원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제모습 찾아가고 , 자신의 의미를 우리에게 이야기하려고 입모양을 내는 강원감영의 목소리를 들으러 가보는 건 어떨까요?
▲ 제2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이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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