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화,풍물,생활

한옥의 미학 8

문성식 2010. 8. 29. 03:12

사회적 형식미

유교의 ‘예별이’

멀리서 한옥의 전경을 보면 지붕을 통해 집의 전모를 가늠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법칙이 있다. 수평지붕이 두 장이나 세 장 위아래로 겹치며 그 사이로 이것보다 하나 적거나 동수인 삼각 박공이 솟아오른다. 이런 구성은 이유가 있다. 가부장적 계급사회였던 유교시대 때 신분 위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위계는 건축을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지붕의 형식과 크기도 중요한 요소이다. 지붕이 더 크고 높으면 위계가 높아지는 것은 상식이려니와 형식에서는 팔작지붕맞배지붕보다 위계가 높다.

 

이것은 그대로 한옥을 구성하는 세 계급인 하인, 여자 주인, 남자 주인에 대응시킬 수 있다. 하인의 공간인 행랑채는 높이가 제일 낮은 맞배지붕을, 여자 주인의 공간인 안채는 중간 높이의 팔작지붕을, 남자 주인의 공간인 사랑채는 높이가 제일 높은 팔작지붕을 각각 갖는다. 안채와 사랑채의 팔작지붕은 높이에서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박공의 크기에서도 차이가 나서 보통 사랑채 것이 더 크다. 한옥을 멀리서 보면 지붕 여러 장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런 계급질서를 충실히 반영한 데 따른 결과인 것이며 찬찬히 뜯어보면 집의 구성을 읽어낼 수 있다.

 

 

선교장 전경 행랑채, 안채, 사랑채가 각각의 계급에 합당한 건축적 위계를 가지며 예별이를 표현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 가족다운 어울림을 동시에 보여준다.

 

 

건축을 이용해서 계급질서를 반영하는 구성을 미학에서는 사회미 혹은 사회적 형식미라고 부른다. 동서양이 공통이다. 서양에서는 주로 고전 오더가 이런 역할을 한다. 독립원형기둥이 반원 벽기둥보다, 반원 벽기둥이 사각 벽기둥보다 각각 위계가 더 높으며, 같은 사각 벽기둥 사이에서도 절반 돌출이 사분의 일 돌출보다 위계가 더 높은 식이다. 사회미를 포괄적으로 정의하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회 질서, 도덕률, 법도 등의 문명 가치를 건축으로 표현해서 공고히 해주는 미학을 통칭하는데 동서양 모두 주로 계급 사회 때 강하게 나타난 공통점이 있다. 이 때문에 지배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치적 봉사의 성격을 띠기 쉽다.

 

한옥에 나타난 지붕의 위계 차이를 동양미학으로 환원하면 ‘예별이(禮別異)’의 유교 가치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별이’란 말 그대로 ‘예절은 차이를 구별하는 기능을 갖는다’라는 뜻인데, 계급질서를 바탕에 깐 유교가치의 대표적 예이다. 복장, 의복, 음식 등 일상생활의 모든 점이 계급에 따라 다른데 집도 그 중 중요한 요소였다. 집을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표현하고 홍보하는 통로로 활용한 경우이다. 하인 계층은 집의 구성에 나타난 차이를 보면서 자신의 계급적 처지를 깊이 깨달아 말썽 안 부리고 지배계급에 더욱 순종했을 것이며 같은 논리가 여성과 남성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사회적 안녕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어울림의 미학

사실 여기까지는 상식적인 얘기이다. 지위가 높고 재산이 더 많은 사람이 더 크고 더 화려한 집에 사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세상의 이치이다. 문제는 이런 차이를 어떻게 조형적으로 다듬어내느냐에 있다. 한옥은 계급 차이를 강압으로 공고히 굳히는 것을 경계했다. 그 대신 ‘어울림’이라는 균형 잡힌 조형처리로 잘 풀어냈다. 구성원들 사이를 구획 짓거나 가르지 않고 서로 잘 어울리게 했다. 높은 위계의 공간이 낮은 쪽을 억누르거나 진압하지 않고 한 울타리 내에서 같이 어울리게 했다. 상하 구별이 분명하고 남녀가 유별했던 실제 생활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집을 기준으로 보면 이런 계급 구도를 중화시켜 최소화하고 싶어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는 한국인 특유의 국민성이나 조형의식의 발로로 볼 수 있으며 그 바탕에는 유교의 또 다른 가르침인 ‘인(仁’)’의 정신과 이것을 ‘정’의 문화로 발전시킨 우리의 정서가 깔려있다.

 

 

안동 귀봉종택 위계에 따른 건물 크기의 차이는 반드시 지켜지는 것은 아니어서 지형과 집안 분위기에 따라 안채가 중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어울림’은 한국인 특유의 사회적 형식미이자 조형의식이다. 큰 것 하나로 뭉치는 것보다 작은 것 여럿으로 나눈 뒤 그것들을 이리 짜고 저리 모아보는 것을 좋아하는 조형의식이다. 통합보다는 조합을 더 좋아한다는 뜻이다. 한국 전통건축에 거대구조나 거석구조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을 산업기술력이 열악하거나 배짱이 없는 탓으로 돌리는 시각도 있으나 조형적 선호에 기인한 점이 크다. 한옥이 대표적인 예이며 사찰도 산지에 위치한 탓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긴 길이에 걸쳐 여러 전각으로 나누어 구성한 분산적 특징이 강하다. 왕궁도 서양과 비교해보면 여러 영역과 수많은 전각으로 나눈 뒤 이것들을 재조합한 특징이 두드러진다.

 

한옥을 예로 보면, 공간 구성과 동선에 나타난 다양성을 3차원 덩어리로 환산한 것으로 보면 된다. 통합이 아닌 조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일정한 나눔을 전제로 해야 되기 때문에 자칫 파벌이나 분열로 빠질 위험이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조합은 통합뿐 아니라 분열과도 엄연히 다른 또 하나의 독립적 조직 원리이며 이것을 조형적으로 구현하면 어울림의 미학이 된다. 합종연횡과 이합집산. 보통 한국인의 파벌의식이나 분열다움을 부정적 의미로 일컫는 말이나 원래 뜻은 조합이라는 또 하나의 세상 이치를 일컫는 중립적인 말이다. 이 두 말을 잘 보면 ‘합’, ‘연’, ‘합’, ‘집’ 등 모인다는 뜻의 말이 주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만 모이는 방식에서 중앙 통제에 의해 큰 한 덩어리로 통합되느냐 아니면 구성원 각각이 일정한 힘을 가지면서 힘겨루기와 타협을 통해 조합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추사고택 안채가 안 행랑채와 중문을 거느리고 있는 형국이다. 예별이에 따른 계급 차이를 반영하지만 다정한 어울림의 미학도 잊지 않는다.

 

 

인과 정

한국다운 어울림을 조형적으로 환산하면 절묘한 균형감이 된다. 한옥의 전경을 보면 크고 작은 여러 덩어리들이 균형을 이루면서 어울리고 있다. 큰 것은 너무 크지 않게, 그러나 작은 것도 너무 작지 않게 적절한 범위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구별하지만 궁극적으로 비슷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어울려 흥겨운 안정감을 만들어낸다. 흥겨우면서도 안정적이라는 상반되는 특징이 동시에 나타나는 양면성이 한국의 조형적 균형감의 요체이다.

 

언뜻 보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각자의 조형다운 존재를 명확히 드러내면서 제 몫을 잊지 않고 챙겨서 서로간의 경계를 잘 짓고 있다. 크고 작은 모든 요소들이 개별다움과 존재이유를 잃지 않고 잘 유지하면서 각자의 조형적 가치를 발휘해서 서로 어울려 큰 하나로 조합해내고 있다. ‘필부라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다’는 개별성의 철학이 잘 살아있는 예이다. 심지어 뒷간조차도 담 밖에서 보면 집의 전체 구성 속에 자신의 지붕 한 장을 슬쩍 밀어 넣어 조형요소의 독립성을 당당히 확보한다. 우리말에는 오밀조밀, 아기자기, 오순도순, 옹기종기 등 개별성을 바탕으로 한 어울림의 모습을 지칭하는 부사가 발달한 것이 좋은 증거이다. 이런 말들의 뜻을 보면 모두 ‘다양한 요소가 귀엽고 정답고 예쁜 모습으로 보기 좋게 어울리며 얘기하고 논다’는 내용을 공통적으로 갖는다.

 

 

향단 한국인의 조형의식은 거석구조보다는 큰 덩어리를 여럿으로 나눠 오밀조밀하게 조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지배계층의 주거가 이렇게 자잘한 구성요소들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한옥의 어울림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고 나름대로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바로 유교의 ‘인’의 가르침이다. ‘인’은 중국과 우리가 사회적으로 조금 다르게 형식화했는데 우리는 이것을 ‘정의 문화’로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가족주의이다. 가족주의는 씨족문화와 문중문화를 이루는 씨앗이며 이것이 모여 집권층을 이루고 왕권을 지탱하는 신권(臣權)이 되었다. 한국의 정의 문화는 유교의 계급질서가 너무 삭막한 착취로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한 중화작용 혹은 견제장치 역할을 했다. 전제 왕권 시대였기 때문에 피지배계층의 권익을 나라의 법으로 확보해주기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지 구현하고 싶었을 터인데, 결국 사람들 사이의 정이라는 비공식적 마음 나누기로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옥의 전경에서는 유교의 계급질서와 이것을 한국인 특유의 국민성에 맞게 적용해낸 두 가지 사회미를 읽어낼 수 있다.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jyimi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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