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화,풍물,생활

한옥의 미학 7

문성식 2010. 8. 29. 03:10

엄격하지만 친근한 한옥의 입면

한옥의 입면은 엄격하면서도 친근하다. 벽을 흰색 회반죽으로 마감한 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적어도 백색의 순결주의와도 연관이 있는 것은 확실하니 일단 컬러 코드에서 엄격한 편이다. 그 사이를 외장 마감을 별도로 하지 않은 나무 기둥과 보가 가르고 지나가면서 구성 분할을 해대는데, 가름의 정도가 꼭 필요한 것 이상의 쓸데없는 욕심은 없어 보이니 흰 회벽에 더해 보면 이 또한 엄격한 몸가짐의 선비 행색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단정 지어 끝내버리기에는 뭔가 미진하다. 틀림없이 한옥 입면의 인상이긴 하지만 이것 말고 뭔가 더 있는 것 같다. 파르르한 추상미라고 부르기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느껴진다. 말하자면 한옥의 입면과 비슷하게 생긴 몬드리안의 구성 시리즈에서 보는 것 같은 옴짝달싹 못할 이상미는 아니라는 뜻이다. 가장 완벽한 비례의 한 가지 상태를 포착해 얼음처럼 굳혀 놔서 도대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추상같은’ 추상미와는 다른 종류이다. 자의적 해석을 허락해주는 여유 같은 것이 느껴진다. 집만 무너지지 않는다면 기둥 하나쯤 한두 자 옆으로 슬쩍 옮겨도 야단맞을 것 같지는 않다. 짐짓 눈이나 한 번 흘기고 다시 제자리로 되 옮기면 전부일 것 같다. 그나마 그 위치도 정확히 처음의 그 자리가 아니어도 개의치 아니할 것 같다.

 

 

창녕궁위재사 한옥의 입면은 흰 벽을 바탕으로 가름이 명확하기 때문에 언뜻 꼿꼿한 선비를 보는 것 같은 엄격함이 있다.

 

 

왜 이럴까. 흰 회벽을 갈색 나뭇결의 기둥과 보가 가르고 그 사이에 창이 들어가는 장면은 한옥이 만들어내는 2차원 평면 장면 가운데 백미일 수 있다. 이것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깨끗해지는 것 같다. 참으로 간결하고 꼭 필요한 것만 갖춘 추상미의 정수이다. 커지면 또 커질 수밖에 없는 지배계층의 탐욕을 제어하는 역할을 분명히 했을 것 같다. 세도가로 흘러갈지라도 처음 출발은 글 읽는 선비였을 그 검소함의 초심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엄격하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 차를 달려 대문을 박차고 중문을 뛰어 이놈의 한옥 입면 앞에 서면 불같던 분노나 욕망은 스르르 잦아들곤 한다. 그만큼 엄격하다. 하지만 불필요한 것을 찾아내 칼로 베어내는 것 같은 서늘한 아방가르드 추상과는 다른 온기랄까, 소탈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친근하다. 한옥 입면은 엄격하면서도 친근하다.

 

 

한국다운 리얼리즘의 장면

왜 이럴까. 형성과정부터 그렇다. 추상의 영어 어원을 따져보면 “추출해서 없앤다”이다. 구상의 지칭 가능한 개별성을 찾아내 없애고 또 없애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아무 것이나 갖다 붙여도 생떼만 쓰면 말이 되는 보편성의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때부터 보통 추상이라 부른다. 한옥의 입면은 다르다. 그 지향점이 개별성을 지워 없애려는 추상과 오히려 반대이다. 개별성을 존중해서 개별 요소의 가치를 드러내도록 해준다. 개별의 가치가 전체에 눌려 소멸되지 않게 해서 개별 요소가 조형적 결정권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양진당 행랑채 한옥의 벽 분할과 창 구성은 엄격하지만은 않아서 엉성한 인간미에 유추할 수 있는 의인화 성격을 함께 갖는다.

  

 

왜 그럴까. 한옥 입면의 분할에서 기둥과 보, 그리고 창의 위치는 철저하게 방 안 사용자의 형편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황금비나 모듈, 표준화나 대칭 같은 선험적 가치를 들이대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나 항상 최고의 심미성을 잃지 않는 이상적 비례가 있으니 이것을 지상에 구현해야 한다거나, 산업을 일으켜 더 빨리 더 많이 지어 더 많이 가져야겠다며 모든 방을 동일한 규준(規準)으로 자르고 좋아한다거나, 이 둘을 합해서 다 가지려 데칼코마니처럼 집을 상하·전후·좌우로 동일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방 안에 사는 사람의 살이와 어긋나지 않는 것이 없을진대, 이런 선험적 가치를 우선하다 보면 사람들은 매번 자신이 원하는 형편과 살이를 포기하고 전체 가치에 맞춰야 한다.

 

한옥에는 이런 것이 없다. 그 반대이다. 방은 필요한 크기로 자르면 되고 그 위치가 한정하는 기둥과 보는 그대로 입면에 구성 분할을 그린다. 리얼리즘이다. 선험적 이상주의에 반대되는 귀납적 리얼리즘이다. 안방은 안방대로 건넌방은 건넌방대로. 문을 열면 마주하는 공간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활짝 대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고 피하고 싶은 것이 있을 터, 창문을 그에 맞게 내면 그만이었다. 반쯤 가려서 선택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문을 통해 오가는 발걸음의 방향을 이쪽에 두는 것이 좋은 식구도 있을 것이고 저쪽에 두기를 원하는 식구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가능한 한 그렇게 해주었을 것이며 그 결과 한옥에서 창문은 이렇게 자유롭게 그러면서도 일정한 질서를 지키도록 났던 것이다.

 

 

안동권씨 능동 재사 한옥 입면의 분할은 르네상스 팔라초나 몬드리안의 구성 시리즈처럼 옴짝달싹 못하는 이상비례에 묶이지 않고 헐거운 도포자락 같은 넉넉한 구성미로 발전한다.

 

 

그래서 틈을 내주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장식과 화려한 마감을 절제해서 선비의 근검을 지켰지만 이것이 인정을 잃고 파르르한 결기가 되었을 때의 위험성을 잘 알고 온기를 품을 틈을 내준 것이다. 식구 구성원 각자, 즉 사람의 요구가 집의 전체 질서보다 우선시된다. 유교의 인의 정신에 기초한 한국다운 인본주의와 리얼리즘의 장면이다. 창문이란 방 안 사람이 방 밖에 대해서 필요로 하는 형편을 맞춰주기 위해 벽에 뚫는 구멍이다. 한국 사람들은 선험적 가치가 이런 현장의 필요성에 우선해서 사용자의 손해를 강요하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옥의 창은 그렇게 자유롭고 친근하게 난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좋기 때문이다.

 

 

주제와 변주에 의한 구성미

그래서 한옥의 입면은 한국다운 어울림을 보여주는 또 다른 대표적인 장면이다. 전경이 3차원 덩어리들이 모여 어울린 결과라면 입면은 회벽, 기둥과 보, 창문 등 2차원 요소가 모여 어울림의 미학을 만들어낸다. 한옥 입면의 어울림은 추상미보다는 구성미에 가깝다. 구성미에도 종류가 있는데, 한옥에서는 창문의 위치와 크기를 자유롭게 낼 수 있게 되면서 주제와 변주에 의한 구성미가 나타난다. 큰 분위기는 공유하면서(=주제), 개별 요소들 사이에 세부적으로 차이를 줘서(=변주) 어울림의 효과를 구성미로 끌고 간다. 같은 창은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르지는 않아서 전체적으로 공통적 분위기가 유지된다. 통일성과 다양성, 동일성과 차이를 동시에 추구한다.

 

 

청풍 도화리 고가 창의 개수가 많아지면 주제와 변주에 의한 예술적 통일성으로 발전한다. 개체의 개성을 지키면서도 전체의 어울림이 절묘하다.

 

 

이런 조형 기법을 예술적 통일성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해석하면 산업적 동일성을 거부하지만 예술적으로는 통일성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한 가지 공통 모티브를 건물의 이곳저곳의 형편에 맞춰 적절하게 변형, 적용시키다 보면 전체적으로 비슷하면서도 각자의 개성은 지켜주는 종합적 어울림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서양에서도 동북아의 전통미학을 접한 다음에 등장했던 미술공예운동에서 아르누보에 이르는 예술운동까지 예술적 통일성을 핵심 강령으로 추구했다. 이는 물론 당시 산업혁명의 열매를 구체적으로 거두기 시작하며 괴물로 성장하기 시작하던 산업주의의 폐해가 사람 사는 집안 방구석에까지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한 숭고한 예술정신의 전형으로 추구되었다.

 

한옥 입면에서 예술적 통일성은 동일면과 꺾임 면 두 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큰 차이는 없다. 동일면에서는 2차원 평면다움이 좀 더 두드러지고 마주보는 꺾임 면에서는 입체감이 좀 더 든다는 점이 차이이다. 중요한 점은 한옥에서는 외관을 빙 돌아가며 예술적 통일성의 장면이 넘쳐난다는 점이다. 이런 장면은 한국 특유의 가족적 어울림에까지 의인화시킬 수 있다. 뭉쳤다 떨어지고 듬성듬성 모여 있는 창의 구성 장면은 큰 방 안에 식구들이 자유롭게 모여 살아가는 한국다운 일상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jyimi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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