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

문성식 2021. 4. 23. 09:18

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

 

 

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교단(敎團)이다. 현재(2015) 종정은 김도용 대종사이며 역대 종정에는 1대 상월원각대조사, 2대 남대충 대종사이다. 종립대학인 금강대학교를 운영한다. 교단(敎團) 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은 1967년 1월 24일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118 소재 구인사(救仁寺)에서 박상월(朴上月)이 중창하였고 법화사상계에 속한다. 석가모니불을 본존(本尊)으로 하고 천태대사 지의를 종조(宗祖)로, 대각국사 의천을 개창조로, 《법화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삼는다.

 

종지(宗旨)는 천태 사상인 회삼귀일 · 일심삼관 · 원융불이의 교리(敎理)와 대각국사 의천의 호국 이념에 있어 불교관을 참구신해하고 참선염불하여 정혜겸수 · 각행원만 · 불입합일의 인격 완성과 국민사상(國民思想) 통일과 사회 정화(淨化)에 공헌(貢獻)이다.

 

1945년 4월 20일 소백산에 구인사(救仁寺)를 창건하고 1966년 8월 천태종 대각불교를 창개(創開)하였다. 1969년 12월 포교원을 본종(本宗)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종단(宗團) 기구는 종정 아래 총무원 · 감사원 · 종의회와 그 밑에 4부를 둔다. 신도회 조직으로 전국중앙신도회와 그 아래 각 도 · 시 · 군 단위 지부 · 지회가 결성되어 있으며, 어린이회, 학생회, 청년회 등 각 연령대의 신행단체와 신흥 불교 종단 중 신도 조직의 체계가 가장 잘 짜여 있고 방대(尨大)하다.

 

교화(敎化) 사업으로 1970년 1월 《천태종약전(天台宗略典)》을 발간했고 1971년 《천태종성전》이 간행했다. 포교(布敎) 사업으로 월별로 각지를 순회(巡廻)하면서 지부별(支部別)로 신도회 자체에서 정기(定期)로 법회를 개최(開催)하며, 주경야선(晝耕夜禪)을 수행(修行)하는 신조(信條)로 삼아 모든 재원(財源)은 자체 임야를 개간(開墾)하여 충당(充當)하고 당시 새마을사업에 앞장섰으며, 이후 계속하여 공익사업(公益事業)에 앞장선다. 육영사업으로 금강대학교를 설립하고 후세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종단(宗團) 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은 594년 중국의 천태지자대사 지의가 창시(創始)한 종단(宗團)인 천태종에서 유래하였다.

 

《법화경》을 근본 교의(敎義)로 하고 선정(禪定)과 지혜의 조화를 종의(宗義)로 하는 신라의 천태종은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에 의거(依據)해 해동천태종으로 성립되었다. 이후 구산선문은 조계종(曹溪宗)으로 총칭(總稱)되면서 5교 9산이 5교 양종(兩宗: 조계종 · 천태종)으로 일컬어졌다. 천태종의 성립으로 조계 9산은 큰 타격을 입어 겨우 종세(宗勢)를 유지했다. 천태종은 고려 말에 천태법사종(天台法事宗)과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으로 나뉘었고 조선 태종 7년(1407)에 재통합되었으며, 세종 6년(1424)에 조계종 · 총남종(摠南宗)과 아울러서 선종(禪宗)으로 통합되고 선교 양종(禪敎兩宗)이란 이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근대의 특징이 될 만한 성질이나 경향이 있는 의미의 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을 세운 사람은 박상월(朴上月)이다. 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은 지의, 의천, 박상월(朴上月)을 종조(宗祖)라 칭(稱)한다.

2015 현재 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의 종정(宗正)은 대종사(大宗師) 김도용이다.

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의 신도수는 1백67만 명이다(천태종 추산).

 

구인사는 2017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절로 알려져 있다. 계곡의 하나를 모두 차지한 건물이 빼곡이 늘어서 있으며 계곡을 안은 산맥의 정상에 있는 적멸궁까지 포함하면 소백산 구인사 적혀 있는 큰 바윗돌에서부터 시작하여 정상 적멸궁까지 긴 산맥의 산자락에서부터 정상까지가 모두 구인사의 영역. 규모가 어마어마하지만 설법보전과 대조사전 그리고 관음전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기도실 내지 대중 생활실로 전각 중심의 조계종 사찰과는 그 구조가 다르다. 전각이 불공 기능을 하는 곳으로 가득한 타 종단과 다른 이러한 모습은 일반 사찰의 대웅전인 설법보전의 새벽 예불을 참관하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모든 스님이 참례하지 않고 단지 당번 돌 듯 불공 의식을 담당한 스님들만이 돌아가며 새벽 예불을 보는 것. 다른 스님들은 농사과 각기 자기 업무를 준비하는 데에 시간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저녁 8시부터 새벽 3시까지 이어지는 기도와 참선 시간 때문이라는 것. 다만, 모든 스님들이 기도 시간을 엄수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기도 시간에 스님 대중방을 지나치다보면 희덕거리며 텔레비전을 보는 스님도 있기 때문.

 

구인사의 역사는 상월스님으로부터 시작된다. 특정한 스승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스님은 기존 불교 종단의 풍토를 비판한다. 스님은 수행을 하지 않고 재물에 관심을 두며 축재 방법으로 불공과 보시로 일관하는 기존 종단을 비판하면서 참된 불교는 무엇보다 수행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하며 수행하지 않는 불자는 불자가 아님을 강조, 수행 풍토 진작에 노력한다. 구인사는 천태종을 중창하였다고는 하나 구인사가 천태종의 법의를 체계적으로 갖추기 시작한 것은 윤덕산 스님 등 불교를 체계적인 학습을 통해 공부한 몇몇 스님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천태종의 교의가 제대로 갖추어져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26년 간 총무원장을 지낸 운덕 스님은 처음에 종단 등록을 할 때 천태종이 아니라 미륵종이라 하려 했다 밝힘. 왜냐하면 상월 스님이 미륵 부처님이기 때문에. 상월 스님을 정각자로서 조사의 위치에 놓으려는 천태종의 노력은 근거가 있지만, 무턱대고 영험함이라든가 기적이라든가 이적을 행하였다는 이유로 상월 스님을 미륵 부처님으로 '신'격화 하려는 모습은 지금도 구인사에 대단히 강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과연 불교의 가르침에 얼마나 합치하는가는 천태종 이단 논의가 이미 정리된 현재에도 여전히 관련된 맥락에서 의문을 남기는 것이 사실)그래서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천태종과는 거리가 먼 궁궁을을강강 주송 등 보천교 기도 방식으로 기도한 적도 있다. 상월 스님 당시 구인사는 지금과 같은 교세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상월 스님이 열반하시고 난 다음 종정으로 추대된 남대충 스님에 의해서 크게 확장되었다. 확장의 동력은 소문이었는데, 그 소문은 구인사에 가서 3일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곳에서 기도를 해서 소원을 이룬 경험을 얻은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구인사의 교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같은 맥락이긴 하지만 치병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구인사는 큰 스님의 증명을 받았다면서 아주까리 기름을 병에 담아 돈을 받고 팔기도 하였는데 몸이 아픈 사람들은 이 기름병을 사서 복용하는 등 구인사는 치병에 효력이 있는 절로 소문이 나면서 많은 병자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 입장에서 구인사는 소원을 이루어주는, 병을 낫게 해 주는 부처님의 기도처였던 것. 스님들은 이러한 사람들이 인식을 스스로 굳게 믿기도 하고 또는 이용하기도 하면서 교세를 더욱 확장하였다. 현재 구인사에서 이러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굳이 구인사에서도 이러한 점을 드러내려고 하진 않지만 구인사를 경험한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 동일하게 경험한 모습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구인사와 대한불교천태종의 이러한 시작에 있어서의 출발은 단순히 언급하지 않는다하여 잊힐 내용은 아니다. 현재 천태종의 모습에서 아쉬운 점은 천태종 스스로는 작복 종교를 지향하며 마음을 닦는 관음정진과 부처님 계율을 지킴으로써 선업을 쌓아 스스로 복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설법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마음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부처님 가르침의 깊은 체계를 제대로 소화해내는 법사 스님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또한, 90년대만 하여도 구인사 스님들은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기도 수행을 하여 거의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 일반적이었을 만큼 스님들부터가 수행에 철저한 모습을 항상 보여 구인사에서 기도하는 일반 신자들에게도 같은 수준의 수행을 요구, 새벽마다 골을 가득 울리는 관음정진 소리가 쩌렁쩌렁하였으나 현재 구인사 스님들은 대부분 살이 피둥피둥 쪄서 보기 좋지 않은 모습이고 삼보당 근처에서만 기도 소리가 들릴 뿐 다른 곳은 조용, 스님들의 수행열이 확실히 이전과 같지 않다는 점은 확실해 보이며 이에 따라 신도들의 기도열도 상당히 감소한 것이 사실. 요즘의 이러한 변화와 함께 천태종에서 주로 나타나는 모습은 불공 중심으로의 변화인데, 전통 불교 의례를 보존한다는 주장 아래 겉으로 보이는 의례에 치중하는 경향이 점차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지은 구인사 박물관의 지나치게 큰 규모와 어울리지 않는 작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남대충 스님의 지도 아래 건축된 건물의 양식과 최근 지어진 건물의 양식만 보아도 구인사 스님들의 마음 자리가 상월 스님이 강조한 마음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이 나타나고 있다. (한 번 지으면 허물수도 없는 것이 건물인데 이런 식으로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판도암, 광명당, 역사박물관 등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다.)

 

구인사 전각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첫째 구인사의 전각은 단순히 불공을 기능으로 하는 건물이 아니고 수행과 기도를 목적으로 하는 건물이 90% 이상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이고 지금 구인사는 승려와 재가 신도 모두 수행과 기도의 열기가 불과 90년대와 비교하여도 대단히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구인사 재가신도 기도실의 중심인 설법보전 건물의 3층과 4층만 하여도 주말이면 가득 차 발 디딜 틈 하나 없던 곳이 대자로 누워 몇백 바퀴를 굴러도 한 사람 부딪히지 않을 만큼 텅 비어있기 때문. 둘째, 남대충 스님의 지도 아래 진행된 구인사 전각의 모습은 한국적인 풍토와 전통, 감성에 맞게 지어졌다. 80년대 지어진 건물들이 이러한 건물들인데 이러한 건물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크다는 비판은 현재 사그라든 모습, 왜냐하면 최근 지어진 판도암, 광명당, 역사 박물관 등의 건물이 구인사의 계곡 크기와 주경야선이라는 수행풍토와는 대단히 거리가 먼 모습으로 지어졌기 때문. 과거 상월스님과 남대충 스님은 구인사를 안고 있는 산의 바위를 깎아내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남대충 스님 지도 아래 지어진 전각은 계곡의 거친 바위 위에 바위를 깎는 등 훼손을 하지 않고 살포시 앉아 있는 모습들이지만 지금 지어지는 전각들은 바위를 두부 자르듯이 아무렇지 않게 성큼성큼 훼손하기 까지. 북향이고 좁고 깊은 계곡 속에 위치한 한계를 최대한 활용하여 습기 문제를 효율적으로 방지하게끔 지어진 과거 전각과 다르게 기술의 힘만 믿고 자연 환경을 훼손하면서까지 지어진 최근 건축 건물들은 습기 문제조차도 해결하지 못해 수백억원을 들여 지은 광명당조차 곳곳의 벽이 갈라지고 곰팡이가 껴 환풍을 하기 위해서 곳곳에 선풍기를 틀어 놓은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 구인사 스님들의 무책임한 시주 재산의 이런 식의 사용은 알게 모르게 구인사에 대한 과거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인식이 크게 파손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대한불교 천태종의 발전은 소원성취와 치병에 대한 소문이 큰 역할을 하였지만 이러한 소문을 가능하게 한 치열한 수행과 기도열이었다. 이러한 치열한 구도 현상은 박상월 스님의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마음"에 대한 진실하고 진지한 가르침과 수행에 대한 절대적인 강조 및 박상월 스님에 대한 대중의 강력한 신뢰와 의지 때문에 가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모두 과거가 되어버렸고 지금 대한불교 천태종은 말로는 마음 자리를 강조하면서도 각종 불공에 치중하는 행사를 꾸준히 개최하는 등 크게 변질되는 모습이 더욱 강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 상월조사스님이 그리운 지금의 대한불교 천태종이다.

 

소의경전(所依經典)

 

각 종단의 종지(宗旨)를 좇아 수행(修行)하는 근본으로 삼는 경전(經典)을 소의경전(所依經典)이라 하고, 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은 《묘법연화경(법화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