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
1970년 1월 15일 승려 진종(속명 박대륜)을 종정으로 출범한 한국의 불교 종단으로, 고려 말기의 고승이었던 원증국사 태고보우를 종조(宗祖)로 하고 있다. 소의경전은 금강경과 화엄경. 한국 불교 종단 내에서 대처승을 인정하는 종단이기도 하다. 총본산은 서울시 서대문구의 안산 산자락에 위치한 사찰인 봉원사이다.
현대 한국 태고종의 창종(創宗)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 불교는 총독부의 사찰령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사찰령은 이른바 승려들의 활동부터 주지 임명까지 전부 총독이 관리하고 “기혼자”에게 절의 주지 역할을 맡기도록 했다. 이때 임명된 주지들은 전부 일본인 아니면 결혼한 대처승이었다고 한다. 또 1930년경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절인 박문사(博文寺)를 건축하고 모든 불교의 총본산으로 하려는 야욕을 드러낸다. 그러자 한국불교 중 뜻있는 인사들은 이를 저지하려고 했고, 1935년에 한용운과 해인사 주지 회광, 마곡사 주지 만공 등이 주축이 되어 ‘31본산주지회의’를 열고 총본산 설립과 ‘조선불교선교양종종무원’이라는 대표기관의 구성, 각황사 교당 개축을 결의한다. 이에 1937년에 커다란 보천교 십일전 건물을 매입하여 각황사 옆자리에 새로 절을 건축하고, 1938년에 완성하자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하여 태고사라고 개칭하였다. 한국 조계종의 창시자였던 태고 보우국사를 모시던 태고사를 이어받겠다는 의지이자 한국 조계종의 본산에 어울리는 이름을 칭하려는 의도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식 불교의 영향으로 결혼을 하여 처자식을 가진 승려. 즉 대처승이 대부분이었다. 해방 후 왜색불교 정화운동의 과정 중 안국동의 선원에 있던 비구승들이 태고사로 들어왔다. 이후 이들은 서로 갈등을 빚어 원래의 태고사란 이름과 비구승들의 조계사라는 이름이 같이 붙게 되었는데, 결국 1954년 이러한 감정은 ‘비구승 vs 대처승 분규 사건’으로 폭발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불교 정화운동’이다.
불교 정화운동의 명분은 일본의 잔재를 없앤다는 것이었지만 참 목적은 기존 사찰 보유 자산을 활용한 “정치자금 확보” 및 휘하 단체 지원이었다. 민중의 꾸준한 지원으로 각 사찰이 소유한 토지 및 재산이 적지 않았고, 자유당측이 여기에 눈독을 들였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을 의식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의 작품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실제로 오늘날 대도심의 시내에 있는 보이스카웃, YMCA 건물 중 연혁이 오래된 곳은 본래 사찰 소유 건물 혹은 토지였던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본래 해방 후 비구승과 대처승 간에 타협을 보아 “송광사와 해인사 등 주요 사찰을 우선 돌려받고 나머지는 추후 시간을 두고 조계종으로 전환한다.”는 요지의 결론까지 내려진 상태였다.
실제로 2004년 세수 91세(법랍 77세)로 입적한 서옹 스님의 生前 증언에 따르면, 해방 전후 백양사에는 17세인 서옹스님(당시는 동자승)만 비구승이고 다른 분들은 모두 대처승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행사 때는 서옹 스님만 법당 안에 들어가고 다른 분들은 법석을 깔고 밖에서 예불을 드렸으며, 더 이상 대처승의 상좌(제자, 후계자 개념)를 들이지 않는 등 철저하게 타협안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최인규 내무부 장관 측이 불교성지순례 등 타협에 참가한 조계종 지도층의 공백기를 이용해 혈기왕성한 젊은 승려들을 부추겼고, 일부 사찰에는 지원을 명목으로 “머리 깎은 주먹들을 승려로 위장시켜” 보냄으로써 비구승 vs 대처승 간에 큰 충돌이 일어났다.
충돌은 이승만 대통령 등의 지원과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정부측의 여론몰이에 힘입어 비구승들의 승리로 끝났다. 비구승의 주도로 1962년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이 세워지자 이때 밀려난 대처승들이 만든 종파가 바로 태고종이다. 비록 과정은 좀 문제가 있었지만, 전통적인 비구승들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대처승들을 몰아냈다는 점은, 불교계가 전통적인 것으로 부분 회귀하는 것에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후 조계종은 내부분규 사태나 지나치게 순수불교를 지양하면서, 정작 전통불교에서 멀어지거나 무리한 불사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태고종은 현재도 ‘대중교화’를 이념으로 삼고 있어서 머리를 기를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대중불교주의는 만해 한용운이 주장한 것이니 태고종 자체를 친일의 잔재로 볼 수는 없다. 또한 현대의 한국 태고종은 더 이상 대처승을 인정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출가하기 전 아내와 자식을 둔 가장이 출가해서 승려가 될 경우 가족과 함께 살며 부양할 것을 허가한다지, 이미 스님이 된 사람이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두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조계종에서 태고종을 언급할 때는 아직도 태고종의 이런 편견을 일반화시키는 경우도 있으니 그런 편견을 듣게 된다면 적당히 가려서 듣는 것이 좋다. 단, 이 때문에 결혼을 위해 잠시 승적을 파계한 뒤 다시 승적을 회복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이것만은 태고종도 암묵적으로 허용한다.
해방 직후 종단 주도권을 놓고 벌어졌던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의 분쟁에서 밀려난 대처승들이 모여 세운 종단이기에, 조계종과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하다. 바로 2년 전까지 본산인 선암사의 소유권을 두고 조계종과 법정 다툼까지 벌였고, 법원은 태고종 쪽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한국에서 으레 남성 재가신도를 일컫는 법사의 경우 한국 불교에서는 종단에서 행하는 공식 시험을 통과해야만 법사 자격증을 얻을 수 있는데, 법사를 ‘승려의 한 종류’로 취급할 것인지 ‘일반 신도들 중에서 다른 신도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신도’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 조계종은 ‘포교사’라고 부르며 승려를 보좌하고, 다른 재가 신도들을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만 어디까지나 ‘특수한 신도’로 보는 것에 반해 태고종은 재가 법사를 승려의 일종으로 간주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는 일반 스님들과 비슷한 권한을 부여해 공식적으로 ‘주지법사’가 될 자격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는 두 종단이 대처승에 대한 의견차에 의해 종단이 갈렸을 정도로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재가자의 참종권에 대한 견해차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태고종은 조계종에 대해서 ‘대승적이지 못하다.’고 까고, 조계종은 태고종에 대해 ‘대처승들이나 재가승들이나 다른 게 없으니까 구분을 못 하지.’라며 디스를 한다고 한다.
다만 대한불교조계종 같은 경우 순수불교 정신을 내세우며 절에서 하는 천도재, 49재 등도 대폭 간소화한 데 반해, 태고종 같은 경우 예전부터 내려오던 기존의 의례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신도들이 조계종의 단순한 의례에 만족을 못해 태고종 스님들을 모셔오거나, 조계종 승려들이 태고종 승려에게 의례를 배워와서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천태종에서도 태고종 승려로부터 의례를 배워가며 형식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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