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문성식 2021. 4. 23. 09:12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수행체계로 간화선 중심의 선종을 표방하고 있으나 아래 역사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조선왕조의 불교 억제 정책에 따라 종파간 강제 통폐합으로 교종, 진언종, 정토종의 교리가 흡수되어 통불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대표적인 비구, 비구니 승단으로 대처승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종지는, 석가모니가 주창한 3가지 깨달음인 자각·각타·각행원만을 근본교리로 받들며, 직지인심·견성성불하여 중생을 이끌어 지도함을 목표로 한다. 조계종을 중흥하여 개산조사 다음가는 공로를 세운 중흥조는 고려말 태고보우 국사, 조계종 본거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조계사다.

 

불교에서의 분류에서 알 수 있듯 대승불교의 수행체계는 크게 4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선종으로 참선이나 묵조선과 같은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파인데, 조계종이 대표적이다. 신라의 9산은 모두 선종의 갈래이다. 교종은 소의경전과 교리를 준수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려 한다. 신라시대 5교란 교종을 뜻한다. 교종에선 소의경전을 종파의 이름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신라시대 열반종과 화엄종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정토종은 신앙으로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으로 극락에 환생한 뒤, 극락에서 깨달음을 얻으려는 종파로 정토종이 대표적이다. 진언종 또는 밀교는 진언(주문)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종파로 티베트 불교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 불교는 조선시대에 선종과 교종이 강제로 통합되어 선교합종의 성격을 띄며 통불교적인 성향을 띈다. 조계종은 중국의 6조 혜능선사가 금강경의 구절을 통해서 깨달음의 계기를 얻었으므로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는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이나 현상은 모두 무상하다는 공 사상이 핵심인 경전이다. 조계종은 이 사상을 바탕으로, 화두 참선을 주요 수행법으로 삼는다.

 

조계종단은 공식적으로는 1920년부터 현재와 같은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적으로는 1962년 박정희 정권이 대처승을 포함하여 '대한불교 조계종'을 인정한 것이 종단의 참 시작이라고 해야 한다. 현재 조계종 직무와 조직에는 종단을 대표하는 종정을 비롯하여, 중앙종회, 총무원, 호계원, 교육원, 포교원, 원로회의가 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총무원장이 중심이다.

 

중국 선종 불교에서 6번째 조사 조계 혜능 계통이 이어온 선 사상이 우리나라에 활발하게 소개된 때는 신라 후반기다. 1172년에 건립된 단속사 대감국사비에 처음으로 조계종이라는 단어가 나타나므로, 고려 중기에는 조계종이 이미 성립되었다고 추정한다.

 

고려 중기에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했을 때 법안종을 잇는 승려들도 대거 참여했다. 그런데 여기에 혜능 계통 선 사상을 고수하는 승려들이 반대하여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들이 천태종에 대응하고자 구성한 종단이 바로 조계종이다. 이로 말미암아 조계종은 화엄종ㆍ법상종ㆍ천태종과 함께 고려 불교계를 주도하는 4대 종단이 되었다. 그리고 조계종 스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승과를 별도로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와 달리 보조국사 지눌이 13세기 초, 조계산 수선사라는 절에서 선 사상을 크게 일으켜 세운 때부터 조계종이 시작됐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 그래서 조계종 종조는 보조 지눌이라고 주장하는 보조 법통설이 나와, 첨예한 조계종 종조 논란을 일으켰다.

 

14세기 중반 무렵에는 태고 보우가 왕으로부터 승려 인사권을 위임받아 불교계를 장악하면서, 사실상 조계종이 불교계를 주도하였으며, 이때 원나라에서 새로 들어온 임제종의 법맥을 이었다고 하는 등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후 조선왕조가 숭유억불 정책을 실시하면서 조계종단도 타격을 받아, 세종 6년(1424))에 천태종ㆍ총남종과 함께 선종으로 강제 통합되었다.

 

그 결과 조계종 특성은 희석되었고, 사회 경제 전반으로 기반이 무너지고 박탈당했다. 그리고 연산군과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연이어 불교가 탄압 받으며 종단 자체가 사실상 해체되는 사태가 일어났고, 승려 대부분이 산속으로 도망쳐 비구계 전승조차 힘든 상황에 처한다.

 

조선 중기에는 명종대에 문정왕후(섭정)의 주관으로 현 탑골공원 일대에 원각사를 중건하고 원각사 10층석탑을 지어올리는 등 불교 중건이 잠시 이뤄졌으나 문정왕후 사후에는 원각사가 폐지되고 도성내에는 승려 출입을 엄금하고 사찰을 지을 수 없으며 흥인지문 밖 10리 안으로 출입을 엄금하는 정책이 유지 되었다.

 

조선 말기에는 혼란한 사회상과 구복 신앙적 성격인 관음신앙이 널리 퍼지면서 행상, 상단 즉, 상업의 발달과 함께 부유한 자본 계층이 등장하였고 그들은 자신의 명복과 내세를 위해 전국 곳곳에 거대한 사찰을 짓고 다중탑을 지어 올렸다. 이시기에 지어지는 대표적 사찰로는 법주사를 예로 들수 있고 법주사 5층 목탑을 대표적 조선 후기 목탑으로 볼 수 있다.

 

경술국치 이후 조선 총독부는 불교계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조계사를 창건한 후 조계사를 조계종 본산으로 두고 그 외 종단을 배척하는 사찰령을 반포하였다. 사찰 문화유산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추진된 정책이었으나 사실상 일제에 항거하는 불교계 인사들을 감시 감독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불교정화운동이 펼쳐졌고 일 본 만종에 반하여 탄생된 선학원이 주축이 돼 조계종과 대립각을 이루게 되었다. 광복후 이승만 대통령 주도하에 불교계 통합 운동이 이어졌고 선학원은 조계종단으로 귀속되고 여타 다른 종단들도 법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나 여전히 왜색불교, 일제청산이 부실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현행 조계종은 1962년에 박정희 정권이 불교계 전체 통틀어 조계종 하나만을 인정해주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권의 조치에 대처승 등이 반발했기 때문에 법정 투정을 벌인 끝에 태고종이나 천태종 등이 설립을 인정받았지만, 대부분은 조계종 산하로 남았다.

 

조계종 종조 논란

 

그렇다면 과연 누가 조계종 종조일까? 보조 지눌일까, 태고 보우일까.

 

이 시기에 서산대사 휴정 문하에서는 태고보우 국사를 우리나라 조계종 종조로 보았다. 1625년에 서산대사의 상좌 언기 스님이 태고보우 국사가 종조라는 태고법통설을 제기했다. 1630년에 묘향산과 금강산, 그 이듬해에는 대흥사에 각각 휴정 비문을 세우면서 태고법통설을 정설로 받들었다. 나아가 휴정대사 상좌들이 조선 중기 이후 불교계를 주도하였으므로 우리나라 불교계 전반에 태고법통설이 정통으로 자리잡는 듯했다. 그런데 구한말 이후 이능화(李能和, 1869-1943)가 최초로 조계종 종조를 언급하며, "보조국사 지눌 이후에 조계종이 성립됐다. 그러므로 조계종 종조는 보조 지눌!"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보태어, 당시 일본에서 유학하며 조계종 연구에 몰두한 불화 이재열은 "태고 보우는 조계종 성립 후 200여 년이 흐른 뒤 활동한 인물이므로, 종조가 될 수 없다." 하며 보조 법통설에 힘을 실었다.

 

이렇게 태고 VS 보조가 치열하게 대립하던 와중에, 1970년대 들어 성철 스님의 등장으로 조계종 종조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967년 해인사 초대 방장이 되면서 현대 한국불교를 이끈 성철 스님은 "조계 혜능을 원조로 임제선 계통을 이어 받은 태고가 종조"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당시 동국대 교수이자 훗날 총무원장까지 역임하는 지관 스님도 "보조 종조론은 모든 이가 공감하기 어렵고, 조계종 법통은 이미 오래 전부터 태고→환암→구곡→벽계→부용→서산 등으로 확정했다." 하며 태고 종조설 굳히기에 들어갔다.

 

당시 성철] 스님과 지관 스님이 종단 내에서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조계종 종조 논쟁은 태고 종조설로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재열ㆍ이종익ㆍ고익진ㆍ최병진 등이 연이어 조계종 종조 문제를 거론하고 연구하며 끊임 없이 의의를 제기했기 때문에 논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처럼 끝이 보이지 않을 듯 보이던 종조 논쟁은 1994년 종단 개혁과 함께 마련된 종헌 종법에서 도의 국사를 종조로 확정하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동안 종헌에서 종조는 보조 지눌과 태고 보우가 번갈아 차지했다. 1954년 불교정화 당시 양 종조설이 대립했다. 1962년 2월 불교재건 비상총회에서는 태고를 내세웠으나, 현 조계종단을 세운 비구 측은 보조를 종조로 한 종헌을 단독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80년 10.27 법난 이후 개정된 종헌은 태고를 종조로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94년 개혁불사 직후 9월 29일에는 새로운 종헌에서 도의 국사를 종조로 내세우면서 태고는 중흥조임을 밝혔다. 그러니까 현 종헌은 도의 종조설과 보조 종조설, 그리고 태고 종조설을 절충한 것으로 보인다.

 

어찌되었든 현행 조계종 종헌 종법에는 도의 국사를 종조로 본다. 그러나 그 규정을 다소 애매하게 정했으므로 논쟁이 다시 일어날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누구를 종조로 보느냐에 따라 조계종 정체성에 큰 변화가 생길 수 있으므로, 이 문제는 종단 내 정치역학 문제와 맞물려 학계에서도 민감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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