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화

헤르만 시거 / 발트 해안의 고즈넉한 풍경과 여인들

문성식 2021. 2. 20. 11:59

헤르만 시거 / 발트 해안의 고즈넉한 풍경과 여인들



화가들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다 보면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품은 꽤 많이 있는데 화가의 일생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경우입니다. 몇줄 안 되는 자료 속에 담긴 내용을 상상해 보기는 하지만 그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오늘 소개할 독일의 헤르만 시거 (Hermann Seeger / 1857 ~ 1945)의 경우도 그런 것인데 그다지 유명세를 얻지못했기 때문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작품만 좋은데 말입니다.



해변의 모녀     Mother and daughter on the beach / oil on canvas / 85cm x 120cm


모녀가 나란히 해안 둑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앉아 있는 엄마는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고 누워 있는 딸은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더 없이 평온하고 고요합니다. 수평선은 곧 다가올 미래이지만 하늘은 아직 한참 멀리 있는 세계입니다.

하늘을 올려다 보는 소녀는 눈을 감은 듯 뜨고 있습니다. 그런다고 미래가 보이지는 않겠지만 미래는 그렇게 모호한 가운데 있는 것이지요.


시거는 독일 할버슈타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꽤 잘나가는 양복장이였습니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겠지요.

시거가 열 세 살이 되던 해 독일과 프랑스 간에 보불 전쟁이 일어 납니다. 이 때 포로가 된 프랑스 장교 한 명이 시거의 집에서 머물게 됩니다.



여름날의 즐거움    Summer's Delight / 1899 / oil on canvas / 90.2cm x 69.8cm


‘이 꽃 이름은 ---‘, ‘ 꽃은 여기를 잡고 ---‘ 아이에게 꽃을 설명하는 엄마의 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엄마만큼 아이의 표정도 진지합니다.

꽃 이름 외우는 것이 쉽지 않지요. 생명력이 절정에 달하는 여름은 모든 것이 초록으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손녀가 모네정원에 올 때마다 아내는 꽃 이름을 알려 주고 있는데 아직은 어렵습니다.

그래도 손녀 머리 어딘가에 그 꽃들이 자리를 잡겠지요.


예전에는 장교나 귀족의 경우 전쟁 포로가 되면 수용소가 아니라 탈출이 쉽지 않은 지역의 유지의 집에 맡겼다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때 프랑스 장교가 시거의 미술에 대한 재능을 알아보고는 수채화 물감 한 박스를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다른 자료에는 잉크 한 박스라고 되어 있는데, 그림 그리는 재료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발트해 해변에서    At the Baltic Sea beach / oil on canvas / 90cm x 72cm


모래 언덕에 앉아서 바다를 보며 기타 반주에 얹은 노래는 어떤 곡일까요?

여인의 옆 얼굴이지만 슬픔에 젖거나 우울한 표정이 아닌 것을 보면 혹시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도 기타를 치지만 대낮에 바닷가에서 저렇게 노래를 불러 본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대개 밤 도깨비들처럼 모여 앉아 머리에 별을 한 가득 이고 노래를 불렀지요.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시거는 할버슈타트가 속해 있는 주의 대도시 할레의 대학에 입학합니다. 대학에서 그의 전공은 철학이었습니다.

졸업을 하고 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교사가 됩니다. 그 와중에도 공부를 계속해서 고대 프랑스어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여기 소개된 화가들 중 박사 학위 소지자는 시거가 처음입니다.



모래 언덕에서 보내는 여름 날   A summer day in the dunes / oil on canvas / 32,7cm x 44cm


‘너 그거 알아?’

언니의 질문에 동생은 팔을 베고 누웠습니다. 동생이 언니보다 오히려 느긋해 보입니다.

그런 두 아이를 보는 엄마도 동생의 대답이 궁금한 모양입니다. 시거가 두 딸을 자주 그림 속에 등장시켰다고 하는데, 혹시 자신의 아내와 딸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가족 사진으로 이만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거는 교사 일에 흥미가 없었습니다. 프랑스 장교가 간파했듯이 시거는 미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결국 그는 미술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베를린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가는 모습을 보면 늘 부럽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보다는 부모님이 좋아하는 것, 세상이 인정해 주는 것을 먼저 했거든요. 40대 중반이 넘어 좋아하는 것을 시작했지만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꽃 따는 소녀들   Flower girls / oil on canvas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학교를 졸업했다고 되어 있는 자료가 있는가 하면 형제 자매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자료도 있는데, 크게 보면 모두 후원자이지요. 시거는 베를린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합니다. 재능 많은 시거는 풍경화와 풍속화를 주로 그리는 한편 그래픽 디자이너로도 일을 합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마리 크라머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모래 언덕에서 듣는 음악     Music in the dunes / oil on canvas / 85.5cm x 120.5cm


시거가 마리와 결혼한 것은 그의 나이 서른 여덟이 되고서야 가능했습니다.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안정이 필요했는데, 그 무렵 시거가 안정된 직장의 관리자 직위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나름 확실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시거입니다. 두 사람은 아들 둘에 딸 둘을 낳았는데, 딸 힐데가르트와 일세는 훗날 그의 작품 속 모델로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해변에서   On the beach / oil on canvas / 80cm x 120cm


오후 햇빛 아래 한 여인은 모래 언덕에 몸을 기댄 채 잠이 들었지만 또 한 여인은 손을 들어 지는 햇빛을 가리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스라한 수평선을 바라 보는 여인의 뒤로 긴 그림자가 서성거리고 있는데, 돌아 올 사람을 기다리기 보다는 바다 너머를 상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녀의 눈매에 아련함이 묻어 있거든요. 잠이 든 여인의 입에 미소가 걸렸습니다. 행복한 꿈을 꾸고 있겠지요?


시거는 발트해 해안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햇빛 가득한 해변과 모래 언덕 그리고 그 곳에서 그런 풍경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외광파 기법으로 그림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이 시거를 대표하게 되고 그의 명성을 끌어 올렸습니다.

여든 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까 장수한 시거는 조각가로도 판화가로도 활동했고 화가로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암울한 요즘, 눈부신 해변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