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화

로사 보뇌르 / 19세기에 가장 부유했고 가장 유명했던 여류 화가

문성식 2021. 2. 20. 11:15

로사 보뇌르 / 19세기에 가장 부유했고 가장 유명했던 여류 화가



연초에 로사 보뇌르의 ‘느베르의 쟁기질’이란 작품으로 신년 인사를 드리고 난 뒤, 공교롭게도 신문과 책에서 그녀의 작품을 연속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이름이 ‘소의 해’를 맞이해서 등장하나 싶어 그녀를 찾아 보았는데,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수록 ‘잊혀진 대단한 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에 대한 설명은 접어두고 오늘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겠습니다. 프랑스 여류 화가 로사 보뇌르 (Rosa Bonheur / 1822 ~ 1899)의 이야기입니다.



느베르의 쟁기질   Ploughing in Nevers / 1849 / oil on canvas / 134cm x 260cm /  오르세미술관


보뇌르는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보르도 출신입니다. 아버지는 초상화와 풍경화 화가였고 어머니는 피아노 교사였습니다.

형제 자매 중 맏이였던 보뇌르는 유대인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생시몽 주의를 따르는 사람이어서 딸도 아들처럼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훗날 보뇌르는 자신의 아버지는 ‘여자가 인류의 삶을 개선할 것’이라며 ‘미래는 여자들의 것’이라도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시대를 앞 선 아버지였지요.



사냥을 하러 모이다   Gathering for the Hunt / 1856 / oil on canvas


여섯 살 때 보뇌르는 파리에 자리를 먼저 잡은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합니다. 보뇌르는 어려서부터 통제하기 어려운 아이였습니다.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몇 시간씩 연필을 들고 그림을 그렸지만 글씨 읽는 것을 배우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그녀의 어머니는 알파벳이 들어간 동물 카드를 마련하고 거기에 맞는 동물을 찾게 하고 그리게 하면서 글자를 가르쳤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 못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스페인 노새 몰이꾼들  Muletiers espagnols traversent les Pyrénées / 1857 / oil on canvas / 116.8cm x 200cm


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 생활도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11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12세 때 재봉사 견습생이 되는 것에 실패한 보뇌르를 아버지는 화가로 키우기로 결심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산 동물을 화실로 가져와서 동물을 그리는데 흥미를 느끼게 했고 당시 미술학교 과정처럼 드로잉 책에 있는 이미지를 따라 그리게 했습니다. 석고 모델도 스케치 하면서 교육이 진행되는 동안 파리 주변의 목초지서 볼 수 있는 동물들 - 말, 염소, 양, 소 토끼 같은 동물들을 그립니다.



하일랜드 양치기    The Highland Shepherd / 1859 / oil on canvas / Kunsthalle Hamburg


14세가 되던 해부터 보뇌르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일을 합니다. 당시 많은 화가들이 이런 연습을 했었지요.

한편으로는 파리 도살장에 가서 해부된 동물들과 뼈대를 공부하고 국립 수의협회를 찾아가 해부된 동물들을 살핍니다.

이런 자료들은 훗날 그녀가 그림과 조각을 제작할 때 귀중한 참고 자료가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런 곳을 찾아가서 눈을 부릅뜨고 관찰한 것을 보면 보뇌르는 대단한 성격과 의지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요?



말 시장   The Horse Fair / 1852~1855 / oil on canvas / 244.5cm x 506.7cm / Metropolitan Museum of Art


보뇌르는 1848년 파리 살롱전에 ‘느베르의 쟁기질’이라는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1853년에 출품한 ‘말 시장’이라는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둡니다. 이 작품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그녀는 다음 해, 스코틀랜드 여행을 떠나는데 가는 도중에 빅토리아 여왕을 만나게 됩니다. 여왕이 그녀의 작품을 좋아했기 때문이지요.

보뇌르의 명성은 프랑스보다 영국에서 더 높았습니다. 37세가 되던 해, 보뇌르는 퐁텐블루 근처에 있는 성을 구입해서 평생 그 곳에 삽니다.

지금은 그녀의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유명했던’ 여류 화가라는 평에 어울릴 만 합니다.



다른 목초지를 찾아서    Changing Pastures / 1863 / oil on canvas / 64cm x 100cm  Kunsthalle Hamburg


1865년, 43세가 되던 해 보뇌르는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외젠 황후로부터 레종 드 뇌르 훈장을 받습니다.

프랑스 최고 훈장을 받은 여성 화가로는 그녀가 처음이었습니다. 1894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았으니까 명예까지 손에 넣은 것이지요.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세계 콜롬비안 박람회에 출품하면서 그녀의 이름은 미국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녀는 또 다른 일로 인해 ‘19세기의 신여성’으로 비춰지게 됩니다.



지친 송아지들   Wearing the Calves / 1879 / oil on canvas / 65.1cm x 81.3cm / Metropolitan Museum of Art


보뇌르는 레즈비언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친구였던 나탈리 미카라는 여인과 40여년 간 함께 살았습니다.

당시 레즈비언을 금지했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그녀는 그녀의 화가로서의 경력 전체를 걸고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했던 셈입니다.

바지와 셔츠, 타이를 입었던 그녀는 ‘일하기 편해서’라는 이유를 댔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보뇌르는 두 개로 나뉘어 있는 사회적 성(性)을 거부한 것이었지요. 담배 골초였고 짧은 머리에 가족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면 자신을 ‘손자’나 동생들의 ‘형’이라고 표현했던 것은 남자들에게만 부여 되어 있었던 힘과 자유에 대한 반감이었지 남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밭갈이   Le labourage / 1844 / oil on canvas / 73cm x 110.5cm


보뇌르는 평생 어떤 남자에게도 소속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주인은 그녀 자신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녀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수컷’은 ‘황소’라고 말했지만 단 한 사람, 아버지는 예외였습니다.

그런데 듣고 있는 ‘수컷’중 하나인 제 입장에서는 ‘황소’보다 못한 ‘수컷’들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미카가 죽고 보뇌르는 미국 출신 화가 안나 크롬푸케와 같이 삽니다. 안나는 그녀보다 34세 어렸습니다.



안나 크롬푸케가 그린 로자 보뇌르의 초상화  

Anna Klumpke Portrait of Rosa Bonheur / 1898 / oil on canvas / 117.2cm x 98.1cm /  Metopolitan Museum of Art


보뇌르는 일흔 일곱 살에 세상을 떠납니다. 자신보다 먼저 죽은 미카와 함께 묻혔지요. 유일한 상속인이 된 안나 역시 세상을 떠나고 그녀들과 함께 묻힙니다. 보뇌르는 자신이 살던 성에 파드마(Fathma)라고 이름을 붙인 암사자를 기르기도 했습니다.

‘나는 미술과 결혼했고 미술은 내 남편이고 나의 세계이자 나의 꿈이고 내가 숨쉬는 공기’라고 했던 보뇌르는 20세기 페미니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우 리에게서 사라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수컷’들의 훼방이었을까요?



사자 머리    Lion head / 1879 / oil on canvas / 95cm x 76cm / 프라도 미술관


보뇌르의 남동생 오귀스트와 여동생 줄리엣은 훗날 그녀처럼 동물화가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남동생 이시돌은 조각가가 되었지요.

1869년, 영국의 유전학자 프란시스 골턴은 ‘유전에 의한 천재’의 예로 이들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만약 보뇌르가 당시의 많은 여인들처럼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고 남편 내조를 했어도 오늘날 그녀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자신 인생의 주인이 철저하게 자신이었던 ‘사람’을 만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