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마네
모호한 그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시절, 미술 시간에 배운 화가들의 이름은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어두운 밤길, 골목길로 접어드는 순간 어둠 속에서 사내 네 명이 갑자기 나타나 “너, 우리 이름을 말해봐” 하면 자동적으로 “마네, 모네, 드가, 세잔”이라고 할 정도로 화가들의 이름을 외웠었지요. 물론 시험 때문이었지만 인상파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들의 이름만 담았습니다. 늘 맨 앞에 나왔던 마네에 대한 이야기를 언제 한 번 ‘레스까페식’으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때문에 ‘올랭피아’나 ‘풀밭 위의 점심’은 제외했습니다. 어떻게 써도 지금까지 이미 책으로 소개된 다른 분들의 정보의 양을 따라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정체가 모호한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 이야기입니다.
<불로뉴 항구에 내리는 달빛 Moonlight over Boulogne Harbor, 1869, 81.92x100.97cm
대낮처럼 환하게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고 높이 솟은 돛대는 마치 가로등처럼 서서 여인들과 검은색 물감으로 번져 나고 있는 항구를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무리를 지어 앉아 있는 여인들의 얼굴 표정은 알 수 없지만 그녀들 모두에게서 짙은 초조함이 느껴집니다. 바다로 나갔던 배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겠지요. 방금 돌아온 사내들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벗어나 여인들을 향해 오고 있지만 그녀들이 기다리던 사람들은 아닌 모양입니다. 하늘이 저렇게 맑고 환한데, 별이 총총한데,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여인들의 기다림은 이 밤이 다 가도록 계속될 모양입니다.
마네는 상류층 집안 출신입니다. 아버지가 판사였고 어머니는 외교관의 딸이었죠. 마네의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처럼 법률가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어디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커줍니까? 준비된 미래를 걷어차고 마네는 화가를 꿈꿉니다. 그런 그를 그의 삼촌 푸르니에가 화가가 되라고 격려합니다. 마네를 자주 루브르에 데리고 간 사람도 삼촌 푸르니에였고 그의 첫 드로잉 선생님도 삼촌이었습니다. 옆에서 보면 그 아이의 재능이 더 잘 보이는 경우가 있지요.
압생트 마시는 사람 The Absinthe Drinker, 1859
술병이 바닥에 뒹굴고 있지만 망토를 두른 사내는 무표정합니다. 앞으로 뻗은 발의 모습이 아무리 봐도 어색한데, 오히려 그것이 사내의 우수 어린 눈매와 어울려 마음을 축축하게 합니다. 19세기 유럽의 예술계를 흔들었던 ‘악마의 술’이라고 불렸던 압생트 때문에 많은 예술가들이 목숨을 잃었지요. 옆에 놓인 잔이 아마 마지막 잔이겠군요. 기다리다가 한 병을 다 비운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바보 같은 일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라고 했습니다. 외로운 것, 사람이니까 견딜 만한 일 아니겠습니까?
열 살이 되던 해 마네는 중등학교에 입학합니다.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삼촌의 권유로 화가인 앙토냉 프루스트의 특별 드로잉 반에 입학,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합니다. 마네 인생의 전반부는 삼촌이, 후반부는 여인들이 그를 지배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저나 마네를 해군사관학교에 보내고 싶어했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열여섯 살이 되자 리우데자네이루 행 훈련선에 그를 태웁니다. 아버지 마음도 조금은 이해됩니다. 세상 아버지들은 모두 비슷하거든요.
스페인 가수 The Spanish Singer, 1860, 147.3x114.3cm
왼손으로 기타 치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어색합니다. 관객을 바라보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자세가 여러모로 불편하군요. 살짝 들린 발밑에는 발을 올려놓아야 할 받침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저 자세로 기타를 오래 치기는 어렵거든요. 장식 없는 벽 앞, 작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유명한 가수는 아닌 것 같고 이곳저곳을 떠도는 가수처럼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얼굴에 삶의 피곤함이 슬쩍 흐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노래로 생계를 유지한다면, 아주 정직하고 복된 일입니다. 적어도 듣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거든요.
훈련선을 타고 머나먼 브라질에도 다녀왔지만 마네는 해군사관학교 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맙니다. 마네 개인에게는 불행이었을지 모르지만 대신 ‘인상파의 아버지’를 얻었으니 미술사에서 보면 기쁜 일입니다. 마네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가 되는 것에 동의합니다. 열여덟이 되던 해 마네는 토마 쿠튀에르의 화실에 입학, 화가가 될 준비를 시작합니다.
놀란 님프 The Surprised Nymph, 1859~1861
아, 실례했습니다. 여기 있는 것을 모르고 그냥 숲을 헤치고 말았군요. 황급히 놀란 님프가 옷을 들어 몸을 가렸지만 밝은 햇빛 아래 우윳빛 살결의 몸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님프와는 많이 다르군요. 가녀린 님프를 머릿속에 넣고 있다가 우리나라 ‘중년 아줌마’의 몸을 닮은 님프가 있다는 것을 오늘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다고 그렇게 싸늘한 표정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님프는 나이를 먹어도 님프거든요. 문득 아내를 돌아보니 아내도 ‘님프’군요.
5년간 쿠튀에르의 화실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마네는 루브르를 찾아가 대가들의 작품을 습작합니다. 또한 1856년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루브르에서 본 그들의 작품 속에 있는 빛과 영감에 대해 가졌던 의문을 여행을 통해 해결했다고 하니까 많이 보는 것만큼 좋은 것도 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행이 좋은 것이지요.
거리의 여가수 Street Singer, 1862
노래를 부르다가 허기가 진 것일까요? 한 손에는 기타를 들고 또 다른 손으로는 포도 한 송이를 입에 가져갔습니다. 그녀의 뒤로 살짝 열린 문 안을 들여다보니 카페처럼 보입니다. 혹시 그 카페에서 노래 한 곡 부르고 포도를 얻은 것일까요?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서 표정을 읽어내기가 어렵습니다. 삶의 양에 여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옷차림이 깨끗한 것을 보니 희망은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고 물랭 루즈 같은 곳의 전속가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스물네 살이 되던 1856년, 마네는 파리에 개인 화실을 엽니다. 화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것이지요. 처음에는 사실주의 화풍으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당시 사실주의 화가들의 주제는 가수,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 집시, 거지 등이었습니다. 때문에 마네의 작품에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화나 신화를 묘사한 작품은 몇 점 되지 않습니다.
독서 Reading, 1865~1873
햇빛이 좋은 창문 앞에 아주 편한 자세로 앉았습니다. 창문의 안과 밖에 배치된 푸른 잎사귀들은 여인의 흰옷과 어울려 더 싱싱해 보입니다. 분위기가 아주 맑고 신선합니다. 그런데 여인의 뒤편, 검은색 배경 속 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한 손에 책을 들고 있는 그 남자의 모습은 여인의 화사한 모습과는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데 여인의 남편이라기보다는 집안일을 맡아보는 집사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사람은 여인이 아니라 남자였군요. ‘책 읽어주는 남자’, 괜찮군요.
1861년 살롱전에 출품한 마네의 작품 두 점 중 한 점인 <스페인 가수>가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당시의 젊은 화가들과는 달리 뭔가 좀 느슨하고 새로운 기법이 섞인 그의 작품은 곧 젊은 화가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그러다가 1863년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 <풀밭 위의 점심>을 살롱전에 출품합니다. 그해 낙선한 4000점의 작품 중에서도 마네의 이 작품은 엄청난 반향을 가져왔습니다. 그의 스승인 쿠튀에르도 제자인 마네에게 악평을 했을 정도였지요. 그 후 그에 대한 비난은 <올랭피아>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피리 부는 소년 The Fifer, 1866, 160.02x97.79cm
그림 속 소년의 얼굴은 <풀밭 위의 점심>에서 나체로 앉아 있던 빅토린 몰랭입니다. 여인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소년의 얼굴로 ‘페이스오프’한 것이지요. 때문에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앞으로 내민 한 발의 그림자만 없다면 일체의 입체감도 느껴지지 않는 이 작품을 처음 본 것은 중학교 미술책 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중학생인 제가 떠오릅니다. 그림 속 소년은 검은색과 붉은색의 대조가 선명해서 금방이라도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올 것 같지만 중학생 때 제 모습은 소년의 배경처럼 흐릿했었습니다. 지금은 나는 무슨 색과 어떤 색의 조화일까요?
마네의 거친 그림 스타일과 사진을 찍어 놓은 듯한 구도와 빛을 젊은 화가들은 현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검은 외곽선을 이용해서 작품을 평면으로 보이게 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신선했습니다. 곧 그의 주변에는 젊은 화가들이 모입니다. 특히 드가와 여류화가 베르토 모리조와 친했는데 나중에 모리조는 마네의 제수가 됩니다. 모리조를 좋아했던 마네가 가까이 두고 싶어서 자신의 동생과 결혼을 시켰다는 말이 있기도 합니다.
넝마주이 The Ragpicker, 1869
이 작품도 앞서 <피리 부는 소년>의 배경과 닮았습니다. 그러나 피리 부는 소년이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올 것 같다면 넝마주이는 배경 속으로 숨어들 것 같습니다. 예전에 소개했던 쥘 바스티엥 르파주의 <걸인>이라는 작품과 많이 닮았습니다. 단순한 배경 때문에 오히려 걸인의 모습이 쓸쓸합니다. 바지에 크게 난 구멍을 꿰맬 형편도 안 되는 넝마주이 앞에 음식 쓰레기가 보입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넝마주이의 눈빛이 안타깝습니다.
드가와 모리조 등 인상파 화가들은 마네를 자신들의 리더로 생각했지만 마네는 젊은 인상파 화가들 그룹에 가입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비록 인상파의 화풍을 차용하기는 했지만 마네는 끝없이 살롱전에 출품했습니다. 비평가들이 모네와 마네를 헛갈리는 것에 대해서 매우 짜증을 내기도 했던 그는 진정한 인상파 화풍이라고 부를 만한 작품은 그린 적이 없었습니다.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불렸는데 정작 자신은 그것과 거리를 둔 마네가 제게는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정원에서 In the Garden, 1870
아이는 유모차에 누워 있고 남자는 턱을 괴고 풀밭에 누웠습니다. 남자의 저런 자세는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속에 곧잘 등장하곤 합니다. 그 가운데 흰 드레스의 여인이 아주 얌전한 모습으로 앉았습니다. 마네의 작품 속 인물들에게서 제가 느끼는 공통점은 표정을 읽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마치 사진기를 들이대면 얼굴이 굳어지는 사람들 같거든요. 그래도 분위기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마네도 좀 너무했다 싶습니다. 아이의 얼굴과 남자의 얼굴은 그리다 만 것처럼 묘사했고 여인만 ‘잘’ 그렸거든요.
1863년, 서른두 살의 마네는 쉬잔 렌호프와 결혼합니다. 그보다 두 살이 많은 그녀는 네덜란드 출신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원래 마네 아버지에 의해 마네 형제들의 피아노 교육을 맡았지요. 그러니까 거의 10년 가까이 마네와 관계가 있었던 여인입니다. 1852년, 그녀는 혼외 임신으로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이는 아마 마네 아버지의 자식이었을 것이고 그녀는 마네 아버지의 정부였다는 추측이 유력한데, 마네는 그의 아버지가 매독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녀와 결혼합니다. 그녀가 낳은 아들은 그녀의 남동생으로 등록되었고, 이름이 레옹인 그 아이는 훗날 마네 작품 속에 모델로 몇 번 등장합니다. 진실은 무엇일까요?
오페라에서의 가면무도회 Masked Ball at the Opera, 1873~1874, 60x73cm
이 그림을 처음 보고 많이 웃었습니다. 가면무도회인데 온통 검은 실크해트를 쓴 신사들이 대부분이고 얼굴에 가면을 쓴 여인은 몇 사람 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남자들의 모습이 다 비슷비슷해서 오히려 가면을 쓴 것 같습니다. 가면이라는 것이 내가 누구인지를 감추는 것이라면 적어도 그림 속 남자들은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하겠지요. 맨얼굴이 가면을 이길 수도 있습니다. 그림 가운데 붉은색 양말의 두 발, 어디선가 본 듯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서 저런 다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마치 사진을 찍듯이 다리만 묘사한 것은 친구 드가에게서 배운 것일까요?
인상파 화가들이 자신들의 전시회에 마네의 출품을 원했지만 마네는 거부합니다. 그의 관심은 살롱전에 있었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마네가 자란 환경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부유한 집의 아이로 자라면서 몸에 담긴 자신의 생각이 있었겠지요. 어쩌면 마네는 살롱전과 인상파의 경계에 서 있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마네의 이후 행동을 보면 살롱전을 통해서 그는 끝없이 자신을 확인하는 몸짓을 느낄 수 있거든요.
맛있는 맥주 A Good Glass of Beer, 1873, 94x83cm
손에 맥주 한 잔을 들고 담배를 피워 물었습니다. 이미 마신 술로 얼굴은 불콰해졌지만 기분은 좋습니다. 멋진 팔자수염과 모자 그리고 목에 두른 스카프까지 아주 멋진 모습인데, 맥주를 너무 좋아하셨나 봅니다. 배가 많이 나왔군요. 여름철 운동이 끝나고 마시는 맥주보다 맛있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요? 요즘 서서히 다시 맥주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도 그림 속 사내를 닮아 갈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맛있는 맥주를 포기할 수는 없지요.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마네는 국민방위군으로 복무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파리로 돌아온 그는 부분적으로 파괴된 자신의 화실을 보게 됩니다. 마네는 파리 거리의 풍경들을 그림에 담습니다. 이 무렵 파리는 거대한 변화의 시간을 겪게 됩니다. 오늘날 파리의 모습을 완성시키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지요. 그 공사는 파리의 모습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모습도 바꿔 놓은 것이었지요. 상류층 사람들이 일상을 즐기는 모습이 마네의 또 다른 주제였습니다.
철길 The Railroad, 1873, 93x114cm
철책 너머 기차에서 뿜는 수증기가 신기한지 아이는 눈을 뗄 줄 모릅니다. 여인의 품에 안긴 강아지는 그런 소리에도 불구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여인의 푸른 옷과 소녀의 허리에 달려 있는 푸른 리본이 참 잘 어울리는구나 싶습니다. 책을 펴고 있는 여인이 지나가는 저를 힐끔 쳐다보았습니다. 참 편안한 모습입니다. 말은 건넸지만 여인은 제 말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쇠로 된 증기기관차의 역동성이 철책 건너에서 꿈틀대고 있지만 여인이 있는 곳은 고요한 정적의 세계처럼 느껴집니다. 여인의 눈빛 때문이겠지요.
1873년 마네는 살롱전에서 다시 성공을 거둡니다. 1881년에는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으로 2등 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레종 드뇌르 훈장을 받습니다. 인상파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마네가 끝없이 원했던 살롱전에서 나름 성취를 얻은 것이지요.
폴리 베르제르 바 A Bar at the Folies-Bergeres, 1881~1882, 95.89x130.16cm
뒤에 달린 거울을 통해서 바의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휘황한 실내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웃음소리로 왁자지껄합니다. 주문을 기다리는 여자 바텐더가 손을 올려놓고 멍하니 실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른쪽 여인의 뒷모습이 앞을 보고 있는 바텐더의 모습이지만 과학적으로 이런 구도가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제게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대신 초점을 애써 피하고 있는 여인의 속내가 더 궁금합니다. 삶의 피곤함에 온몸을 맡기기에는 아직 너무 젊거든요. 젊음이 좋은 것은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의 숫자가 줄어들고 마침내는 한두 개밖에 남지 않게 되지요. 여인이 일하고 있는 바의 이름이 우리말로 옮기면 ‘미친 여자 양치기 바’가 되는데,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요?
5년 가까운 투병 끝에 마네는 쉰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얻은 병은 매독이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았던 병이고 19세기 예술가들을 압생트와 함께 죽음으로 이끈 매독이 그에게도 닥쳤던 것일까요? ‘마네, 모네, 드가, 세잔’ 중에서 제일 먼저 입에 오른 이름 마네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 쓸수록 블랙홀에 빠진 기분입니다. 더 공부를 해야겠지만 여전히 그는 제게 모호합니다. 그와 얽힌 여인들의 이야기나 작품 속 모델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책 한 권은 되겠지요. 언제고 다시 시간이 되면 제게는 여전히 안개 속에 남아 있는 마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벗겨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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