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에두아르 들로르
따뜻하고 세련된 색의 향연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무엇에 기대고 살아야 할지 암담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을 걱정하던 종교가 이제 세상이 종교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작년 가을, 제가 ‘반 성직자 미술(Anti-clerical Art)’ 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를 사용하며 프란체스코 므루네리의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이미 그 시절의 화가들도 세상의 종교를 근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브루네리와 같은 주제를 일부 다뤘던 프랑스의 샤를 에두아르 들로르(Charles Edouard Delort, 1841-1895)의 작품 중에도 그런 걱정이 느껴집니다.
퐁텐블로 숲에서의 결혼식 Les Noces, Fontainbleau
결혼식이 방금 끝난 모양입니다. 성장을 한 손님들이 이곳저곳에 모여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비록 그림 속이라고는 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부신 사람이 신부일 것 같은데, 혹시 누군지 감이 오는지요? 제 생각에는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주인공이 아닐까 싶습니다. 탁 트인 이런 곳에서의 결혼식도 좋겠다 싶습니다. 결혼은 또 다른 세계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누가 신랑인지 도대체 알 수 가 없군요.
들로르는 프랑스 남부의 님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들로르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가 많지 않아 많은 부분 추정과 상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려서 자란 곳은 님과 조금 떨어진 보르도 지역이었습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들로르는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러나 고되고 딱딱한 훈련을 견딜 수 없어서 입학 후 얼마 안 되어 학교를 그만둡니다.
금요일 Friday, 55.9x81.3cm
가톨릭에서 금요일은 금육(禁肉)의 날입니다. 신자들의 의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요즘 세상에서 지켜지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금육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를 기억해서 선행을 하거나 절제를 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합니다. 신자 한 명이 금요일에는 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교님께 큰 생선을 한 마리 가져왔습니다. 원래는 금식까지 가야 하는데 뒷짐을 한 주교님의 시선은 생선에서 떨어질 줄 모릅니다. 생선은 고기가 아니니까― 혹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얼마 전 소개한 마네도 해군사관학교 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화가가 되었는데, 들로르도 비슷한 길을 걸은 것이지요. 아마 학교를 그만두고 난 뒤,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브르타뉴에 있는 로리앙 대학에 입학 한 들로르는 뒤우세(Duhousset)라는 드로잉 담당 교수 밑에서 잠시 공부를 합니다. 잠시라고 하는 이유는 들로르가 또 다시 학교를 그만두었기 때문입니다.
추기경을 위한 게임 Game For The Cardinal, 91.4x66cm
그림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고민을 해봤지만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추기경 집무실로 한 청년이 찾아왔는데, 한 손에는 새를, 또 한 손에는 생선을 들었습니다. 아마 추기경이 손에 든 편지와 함께 도착한 선물처럼 보입니다. 편지를 읽고 나서 청년의 손에 든 새와 생선을 보는 추기경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작은 눈에서 탐욕을 봤다면 잘못 본 것일까요? 혹시 ‘이 선물을 추기경이 받을까? 받지 않을까?’에 대해 누군가가 내기를 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시험에 든 추기경’이 되는데 이 것 큰일입니다. 가톨릭 신자인 저는 추기경이나 사제를 비웃는 그림을 만나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이 우리 사는 곳에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드로잉 교수는 들로르를 군사학교에 입학시킬 목적으로 그를 준비시켰습니다. 혹시 들로르에게 군인으로서의 자질이 엿보였던 것은 아닐까요? 화가가 되기로 한 들로르는 1859년 열아홉의 나이로 파리에 도착합니다. 그의 가족 중의 친구가 당대 아카데믹 화풍의 대가였던 장 제롬이었습니다. 들로르는 제롬의 추천으로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 입학합니다.
미사 끝나고 나가는 길 La Sortie de la Messe, 69.2x101.6cm
미사 전부터 시작된 비가 미사를 끝나고 나왔지만 여전히 내리고 있습니다. 지체 높은 사람은 가마를 타고 있고 우산을 같이 쓰자고 권유하는 모습도 실루엣으로 보입니다. 붉은 우산을 쓴 두 여인이 성당 문을 나서자 한 무리의 남자들 시선이 그녀들을 따라오고 있습니다. 복장을 보니 군인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선이 이해됩니다. 저라도 그랬을 것 같거든요. 그나저나 성령이 가득한 말씀으로 엄숙한 분위기에 젖어 있다가 문을 나서자마자 만나는 속세는 이렇게 활기찹니다. 이렇게 보면 신의 세계보다는 인간의 세계가 더 매력적이군요.
샤를 글레르는 에콜 드 보자르의 교수였지만 그의 화실은 다른 화실에 비해 좀 더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고 하죠. 오귀스트 톨무슈를 소개할 때 말씀 드렸던 것처럼 글레르는 모네, 시슬리, 바지유 같은 화가들에게 미술을 지도했기 때문에 인상파와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화가입니다. 글레르의 지도 아래 들로르의 그림 실력은 아주 빠른 속도로 늘어납니다. ‘비 온 뒤 죽순 자라듯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혹시 당시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을까요?
콩코르드 광장의 우아한 모습 Elegant Figures in the Place de la Concorde
비가 멈춘 지 얼마 안 된 콩코르드 광장, 마차들이 부지런히 갈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사내가 우산을 들고 길을 걷고 있습니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악기 가방을 들었습니다. 뒷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그 사내의 모습이 비가 온 거리의 풍경과 잘 어울립니다. 마차에 앉은 사람들도 그의 모습에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뭘 보세요? 시선이 거추장스러웠을까요? 고개를 들어 여인에게 혹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내의 행동에 비해 오른쪽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는 사내의 모습은 가벼워 보입니다. 옆에 나란히 달리고 있는 말의 다리처럼 사내의 다리도 모두 하늘에 떠 있거든요.
1862년, 들로르는 장 제롬의 이집트 여행길을 따라 나섭니다. 당대 미술계의 대가였던 제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기회였고 아울러 그의 멘토이자 미술의 안내자였던 제롬과의 여행을 통해서 그의 미술에 대한 공부가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들로르는 중요한 일련의 작품들을 완성하게 됩니다. 좋은 스승과의 여행, 이보다 더 유익한 것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사랑을 위하여 건배 A Toast to Love, 100.3x73cm
아주 낭만적인 모습입니다. 말에 올라탄 사내가 가까운 식당에서 술을 한 병 주문하고는 창가에 서 있는 여인을 위하여 건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 때맞춰 비둘기도 날아오르고 있으니 요즘 표현대로라면 굉장한 ‘이벤트’가 만들어 진 셈입니다. 이 모습을 내려다본 여인의 표정도 환합니다. 그런데요, 저러면 말에서 내려 술병을 들고 여인의 집으로 찾아갈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까 그것은 제가 호흡이 빠른 시대에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은 그림 속 연인들처럼 느긋해야 오래가는 것 아니던가요?
파리에서 조금 떨어진 마를로트로 거처를 옮긴 들로르는 몇 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작품을 제작합니다. 여행에서 얻은 영감을 가지고 그는 오리엔탈 풍의 대작을 구상하는데, 이렇게 제작된 작품들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극도로 작업에 매달린 결과 오른쪽 손의 마비가 왔습니다. 그 마비가 풀릴 때까지 왼손으로 작업하는 방법을 배워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까 들로르는 참 대단한 의지의 소유자였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2막 2장 캐퓰릿 가의 정원)
Romeo and Juliet (Act II Scene II, Capulet's Garden), 54.6x34.3cm
줄리엣의 방 아래, 로미오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창문을 열어다오 내 그리운 줄리엣 뭐 이런 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은데, 실제로 이런 대사는 없었지요. 그러나 두 남녀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충분히 가능한 상황입니다. 내려다보는 줄리엣이나 올려다보는 로미오, 두 사람의 두근거림과는 달리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위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사랑이 비극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요. 어쩌면 화가는 그런 비극의 끝을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시선을 엇갈리게 한 것일까요?
1864년, 스물세 살이 된 들로르는 살롱전에 데뷔할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다프니와 클로에’라는 작품을 출품합니다. 그리스 신화 속 연인들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작품 전시가 계속 되면서 들로르의 인기가 올라가자 마를로트에 있는 그의 집으로 미술품 수집가들과 화상들의 방문이 이어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작품의 소장 가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자 당대의 흐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의 화가로서의 인기는 확실했던 것 같습니다.
청혼 The Proposal, 56.5x90.8cm
잔뜩 흐린 하늘 밑, 해는 이미 졌는데 사내의 끈질긴 청혼은 끝날 줄을 모릅니다. 호수를 건너오는 바람이 차가운지 여인은 몸을 웅크리고 있지만 자신의 이야기에 취한 사내는 눈치도 없이 지리를 일어 설 줄 모릅니다. 아무리 봐도 남자의 나이가 너무 많아 보입니다. 신랑이 아니라 신랑 아버지나 혹시 중매쟁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뭔가 불순한 느낌이 듭니다. 아가씨, 생각 잘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1875년, 들로르는 마농 레스코와 관련된 주제의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 메달을 수상합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작품 속 배경이 18세기인 것이 늘어납니다. 1882년에도 살롱전에서 2등 메달을 수상했다는 것을 보면 살롱전에서 얻은 호평도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요염한 담배연기 A Voluptuous Smoke
정말 들로르의 작품일까 여러 번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너무 이질적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몸에 감고 있는 것은 물담배를 피우는 기구인 것 같은데 너무 길어서 묘한 느낌을 줍니다. 여인의 뒤편에 일본풍의 작품까지 겹쳐지면서 이국적인 느낌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얼굴을 서로 부딪고 있는 새의 모습과 여인의 자세가 겹쳐지면서 요염함이 극에 이르고 있습니다. 글쎄요, 제가 이제까지 본 그림들 중에서 가장 ‘야한’ 것이었습니다.
들로르에 대해 따뜻하고 세련된 색의 향연을 펼친 화가라는 평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많은 잡지에 삽화를 그린 삽화가로도 상당한 유명했습니다. 성직자들에 대한 비평에서부터 오리엔탈, 18세기를 무대로 한 주제까지 그는 여러 모습을 그림에 담아냈습니다.
추수 축제 The Harvest Festival, 69.8x101.6cm
원 작품이 이렇게 붉은 것이지 알 수 없지만 가을의 붉은색이 세상 모든 것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모두들 기쁜 모습입니다. 항상 이렇게 살 수는 없지만 자주 이런 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는 곳이 언제나 그림 속 축제의 장이 될 수 있을까요? 저도 대열에 끼여 북을 치고 나팔을 부르고 싶습니다.
쉰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들로르에 대한 정보는 여기까지 입니다. 그가 남긴 작품에 비해 알려진 개인사가 너무 없어 아쉽습니다. 물론 남아 있는 그림이 더 중요하지요. 그래도 늘 궁금한 것은 혹시 결혼은 했을까? 아이는 몇이나 있었을까? 아내와의 사이는 좋았을까? 하는 것들입니다. 왜냐고요? 모든 힘은 가족에서 비롯된다고 믿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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