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문화】
제2절 가람과 건축
2.우리나라의 가람배치
일탑일금당식(一塔一堂式)의 가람배치는 백제 사찰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들 백제 사찰 가운데 군수리 사지(軍守里寺址), 정림사지(定林寺址),
금강사지(金剛寺址) 등에서 정연한 일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의 가람배치는 고구려 사찰에서 볼 수 있다.
현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평양의 청암리 사지(靑岩里寺址),
정릉사지(貞陵寺址) 등에서 그 유형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신라시대의 가람배치 또한 일탑일금당식이 기본이었으리라고 추정한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탑이 법당 앞 양쪽에 짝을 이루고 서 있는
이른바 쌍탑가람(雙塔伽藍)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중국의 궁궐이나 사찰에서
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하는 관습이 우리나라로 전해온 것이다.
이러한 쌍탑가람으로 대표적인 사찰이 감은사지(感恩寺址), 실상사, 보림사 등이다.
이 때 부터는 탑보다 법당의 규모가 훨씬 커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불자들의 불보(佛寶)에 대한 인식이 탑뿐만 아니라
불상으로까지 확대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거대한 불상을 주조할 수 있는 능력과
그러한 불상을 모실 대규모 법당을 지을 수 있는 건축술을 이미 축적해놓았기 때문에,
탑 못지않게 실제로 부처님 모습을 보여주는 불상과
불상을 모신 법당을 짓는 데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이 무렵부터 석탑이 크게 유행했는데,
재질이 무거워 목탑처럼 크게 세울 수 없었으므로
자연히 탑보다 법당 건물을 웅장하게 세웠다고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기본 가람배치는 전통적인 일탑일금당식을 답습했다.
과거의 엄정한 질서에서 자유로워지고 포용하는 흐름을 보여주었다.
별도의 법당과 부속건물들을 전체 배치와 관계없이 적절한 장소에 세웠고,
탑도 마찬가지로 절 한가운데가 아니라 절 안을 벗어난 곳에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성주사나 운주사 등에는 여러 개의 탑을 세우는
다탑가람(多塔伽藍)이 조성된 적도 있으며,
이와는 정반대로 송광사와 같은 명찰(名刹)에서는 탑을 조성하지 않기도 하였다.
이처럼 가람배치면에도 우리 민족 특유의 자연친화적인 요소를 많이 곁들이는 등,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불교가 한국식 민족종교로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 불교가람 분위기는 비록 활발하지는 못했지만
조선시대의 불교가람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가람의 배치와 구조면에서 볼 때, 우리나라 사찰은
평지가람(平地伽藍)과 산지가람(山地伽藍)의 두 종류로 크게 나뉜다.
평지가람은 평지에 세워진 사찰을 말하는데
고대에서부터 중요한 사찰들은 왕도(王都)나 고을 한복판의 평지에 주로 세워졌다.
따라서 평지가람 중에는 대규모 사찰들이 많았다.
경주의 황룡사터, 익산의 미륵사터 등이 대표적인 평지가람이다.
또한 평지가람은 건물 배치방식이 궁궐건축의 중문(中門), 정전(正殿), 회랑(回廊) 등과
비슷해서 궁궐만큼이나 질서 있고 당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산지가람은 산중에 터를 잡은 사찰을 말한다.
산지가람은 기본적인 가람의 질서를 존중하되, 산세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 안에 부속건물을 조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축대를 여러 단으로 쌓아 높낮이가 서로 다르게 터를 다지고,
적절히 건물을 배치한다.
그러므로 때로는 진입로가 꺾이거나 휘어지기도 하고,
사찰 전경도 똑바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평지가람처럼 법당 주위로 회랑을 배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반면에 절 입구에서부터 일주문, 천왕문, 문루 등을 거칠 때마다
절 안의 광경이 새롭고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특징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 사찰 대부분은 이러한 산지가람 형태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건물 규모와 공간 배치형식을 결정할 때는 산세와의 조화를 중시했다.
따라서 산중에 이름난 가람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부석사, 화엄사 등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지가람이다.
이러한 산지가람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전통 건축양식과 주변 환경을 잘 보존해온
문화유산이며, 고귀하게 보전해야 할 성보(聖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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