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역사 - 제3절 한국불교 - 5. 근대 이후의 불교 - 3) 불교계의 위상 정립과 총본산 건립

문성식 2016. 11. 27. 20:55
다음카페 : 『 가장행복한공부 』
    【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5. 근대 이후의 불교
        3) 불교계의 위상 정립과 총본산 건립 교육과 포교 활동 불교의 중흥을 위한 전제로서 중시되었던 것은 청년 인재의 양성이었다. 교계 지도급 인사들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불교계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는 일반 학문에 대한 연구와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수립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1906년에 설립된 명진학교는 1910년 통감부의 사립학교령에 의해 불교사범학교로 개편되었다. 그 후 불교사범학교는 1914년에 30본산의 주지들의 결의에 따라 불교고등강숙(佛敎高等講塾)으로, 1915년에는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으로 개편되었고, 지방에는 중앙학림 바로 전 단계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으로서 지방학림(地方學林)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로써 초등학교 과정의 보통학교, 중등학교 과정의 지방학림, 전문학교 과정의 중앙학림으로 이어지는 근대 승가교육체계가 완성되었다. 이와 같이 근대적 교육이 선호되고 있던 가운데 지방학림의 성장으로 전통 강원은 점차 세력을 잃어 가는 듯했으나,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전통 강원을 부활시키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근대 학문을 익힌 자들이 보여 준 세속화 경향, 근대 학문의 실효성에 대한 의심 등으로 인해서 근대 교육제도에 대한 전반적 회의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5년에 대강백 진하(震河)의 입적을 계기로 대강백의 육성을 위해서는 전문 강원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크게 작용하여 해인사, 범어사, 개운사 등에 전문 강원이 복원되었고, 이후 건봉사, 유점사, 통도사 등 전국 각지의 강원이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학술 분야에서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불교에 대한 역사적 시각의 연구가 나타난 것이다. 1910년대 발표된 권상로의 『조선불교약사(朝鮮佛敎略史, 1917)』,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1918)』는 한국불교 종파의 기원과 법통 문제, 선의 본질 논쟁, 한국불교사의 시대 구분 등의 문제의식을 학계에 던져 주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각종 불교잡지가 발행되어 한국불교의 역사와 교리뿐만 아니라 불교계의 현안과 교세 확장을 위한 각종 포교 방안을 제시하였다. 포교 문제는 개항 이후 기독교의 급속한 교세 확장에 충격을 받은 불교계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과제였다. 교계 인사들은 포교당의 확대, 도심 포교, 문서 포교 등 새로운 포교 전략을 수립하는 데 골몰했다. 그 결과 1910년대에는 각황사 1개소에 불과했던 포교당의 수는 1924년에 71개소, 1933년에 147개소, 해방 후인 1946년에는 335개소로 급속히 늘어났다. 본사급의 사찰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경쟁적으로 포교당을 설치했던 것이다. 교육과 포교활동의 중요한 축이었던 역경사업에서는 1920년대에 한용운과 백용성이 크게 활약하였다. 한용운은 사라져 가는 고승들의 학설과 행적을 보존하기 위해서 1922년에 법보회(法寶會)를 조직하고 팔만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백용성도 3ㆍ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직후인 1921년에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고 금강경, 신역대장경, 능엄경, 원각경, 범망경 등을 번역하였다. 그들의 역경 사업은 안진호, 허영호 등으로 이어졌으며, 그 당시 편찬된 강원 교재들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조선불교 총본산의 탄생 불교계 통일기관의 설립은 도성출입금지 해제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숙원 사업이었다. 통일기관의 설립은 일본이 획정한 31본산 체제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1본산 체제는 불교의 역량을 결집시키고 통일적 사업을 실현시키는 데 가장 큰 장애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1920년에 조선불교청년회에 의해 본사 주지들의 전횡에 맞서 정교 분립과 사찰령의 폐지를 주장하는 개혁운동이 일어난 이래, 1921년에 창립된 조선불교유신회는 1922년 10개 본사와 함께 조선불교중앙총무원을 출범시켜서 불교계의 자주적 통합기구를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1922년 조선불교선교양종교무원을 출범시켰고 총무원과 교무원 양 세력은 종단 운영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하다가, 1924년 4월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 교무원은 종단 운영의 전반을 수행하는 기구라기보다는 일제에 종속된 채 불교계의 사업만을 담당하는 법인의 역할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29년 1월에 열린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는 불교계 통일운동을 한 단계 진전시킨 사건이었다. 이 승려대회에서 조선불교도들은 자주적으로 종단 질서를 규정한 종헌을 제정하고 중앙종회를 결성하였으며, 교무와 제반사업을 통괄하는 ‘중앙교무원’을 두기로 결의한 것이다. 이것은 사찰령과 31본산이라는 식민지 불교체제를 어느 정도 벗어나 불교계의 자율적인 교정(敎政)을 실현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종헌의 실행은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일제가 승인하지 않았고, 또한 일제의 승인 없는 자율적인 교정 운영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제가 1930년대 중일전쟁을 거쳐 전시체제로 돌입하게 되면서 상황은 변하게 된다. 불교계의 숙원사업이었던 통일기관의 설립을 일본 측에서 전시 동원체제 확보를 위해 적극 나서게 된 것이다. 일제는 처음 장충동 부근의 박문사라는 일본사찰을 조선불교 총본산으로 정하여 한국불교를 통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기밀이 사전에 누설되어 조선불교도의 자주적 지향을 담은 총본산 건설 운동이 김상호와 같은 뜻있는 청년 승려들과 월정사 이종욱과 같은 일부 본사 주지들의 암중모색으로 제창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불교계 통일기관 총본산 신축이 본사 주지들 사이에 공론화되어 월정사 주지 이종욱이 대표로 선출되어 불사에 착수하였다. 드디어 1937년 2월, 3월에 이르러 본사주지회의에서 통일기관의 설치안을 확인하고 총본산 대웅전 건축을 위한 실무회의를 여는 것으로 총본산 건설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총본산의 건설은 조선불교선교양종의 중심이 되는 총본산 대웅전을 신축하는 사업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마침 총본산의 위상에 걸맞은 조선 전통의 건물이 정읍에 있었는데, 보천교(普天敎)의 십일전(十一殿)이었다. 보천교는 일제의 민족종교 탄압으로 해산 조치를 당하여 그 건물은 경매 처분을 받았는데, 불교계 대표들은 이 건물의 규모가 크고 목재가 좋은바 경매에 응하여 목재를 인수하였다. 부족한 목재와 기와는 새로 구입하여 대웅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1938년 10월 25일에 낙성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신문보도에 의하면 조선불교 총본산 대웅전 건물은 동양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로 평가되었고, 서울에 일본식 사찰건물이 많았는데 4대문 안에 순조선식 전통 목조 대웅전이 웅장하게 들어서 전통문화도 계승하면서 암울한 식민지 상황에 처한 조선불교도의 자부심을 세우는 데 큰 기여를 하였고 오늘날 한국불교 총본산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총본산 대웅전 낙성 직후 총본산의 위상과 성격에 대한 문제가 본사 주지회의에서 논의되었다. 총본산의 이름은 태고사(太古寺)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태고 보우의 법맥을 계승한다는 법통의식을 내세우려 한 것이다. 이어 1940년 11월 열린 본사주지회의에서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는 종명 대신 ‘조선불교조계종’이라는 종명이 담긴 사법, 즉 태고사법을 확정하여 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 태고사법의 가장 큰 의의는 총본산를 태고사로 정한 사실과 종명을 조계종으로 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는 한국불교 고유의 종명이었던 ‘조계종(曹溪宗)’을 재건함으로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조선불교도들의 자존심을 세우는 데 기여하였다. 이어 1941년 6월에 조선불교조계종 제1회 중앙종회에서는 선거를 통하여 조계종 종정에 방한암(方漢岩)을 선출하고, 9월에는 이종욱(李鍾郁)을 종무 총장에 임명하여 인가를 받게 된다. 이러한 총본산의 건립과 조계종의 탄생은, 비록 일제의 정책적 지원에 의해 이루어진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1920년대 이후 지속된 불교계 통일기관 설립운동의 결과이자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종단을 설립하였다는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후반 이후 조계종단은 그 출발의 한계에서도 예견되었듯이 일제의 전시 동원체제에 많은 협력을 해야 하는 비극도 겪어야 했다. 1942년에 일본군에 대한 감사 및 전몰장병조문결의안을 채택하고 일본군의 필승을 기원하는 법회 개최를 각 사암에 지시하였다. 또한 조계종 임시종회에서 국방 자재의 헌납을 결의하였고, 승려들도 참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불교계는 모두 5대의 군용기를 일본에 헌납하고, 1943년부터는 전국 각 사찰의 불상과 범종, 유기를 공출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