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역사 - 제3절 한국불교 - 5. 근대 이후의 불교 - 4) 해방 이후의 불교 2

문성식 2016. 11. 27.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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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5. 근대 이후의 불교
        4) 해방 이후의 불교 2 조계종의 내분과 발전 통합종단 출범 이후 곧바로 안정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승단정화와 한국불교의 전통 복원이라는 대의명분에서 교단을 인수하여 운영하게 된 비구승들은 행정경험의 부재와 운영관리 역량의 미비로 1990년대 말까지 크고 작은 내분이 적지 않았다. 특히 1980년 10ㆍ27 법난은 한국불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치욕적 사건이었다. 당시 계엄군은 불교계를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10월 27일 새벽 전국 사찰에 들이닥쳐 종정과 총무원장, 본사 주지 등 종단 지도부 다수를 연행하여 조사한 뒤 그 중 20명 가까이 구속하였다. 이 수사과정에서 일부 혹독한 고문이 행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계엄군은 불교비리를 수사한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종권을 둘러싼 암투, 폭력 행위, 사찰 재산의 유용 등에 대하여 수사하여 그 결과를 조치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군사독재가 지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법난에 대하여 진상규명을 한 바 혹독한 고문과 강압적 수사로 조작된 것이 많았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불교계에 대하여 정치권력이 왜 이처럼 치욕적인 탄압을 가한 것일까? 물론 불교계 안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70년대 종단은 종정과 총무원장 사이의 권한 갈등으로 인한 분규로 극한적인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종교계 내부의 문제로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정교분리가 헌법에 보장된 사회에서 합당한 일일 것이다. 당시 군사정부가 불교계에 탄압을 가한 것은 자신들이 정변의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사회정화’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내분이 있어 온 불교계를 표적으로 삼은 결과였다. 즉 군사정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종교계 중 취약했던 불교계를 희생시킨 것이다. 한편, 10ㆍ27 법난으로 불교도들은 자주적 각성이 일어나게 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느닷없이 전국 사찰에 들이닥쳐 총부리로 위협받는 수모를 당해야 했던 승려들과 이러한 사실을 지켜본 재가 불자들은 군사정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갔고, 불교도들이 단결하여 자주적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에서도 통합종단은 불교 발전을 위한 3대 지표, 즉 역경ㆍ도제 양성ㆍ포교라는 종책과제를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통합종단은 적지 않은 혼란이 거듭되었지만, 이 3대 지표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나아가 1964년에 종립 동국대와 협력하여 동국역경원을 설립하여 고려대장경의 한글화 불사에 착수하였다. 이 역경 불사는 2002년에 완수하게 되었다. 도제 양성은 승려교육을 말하는 것으로 정화 무렵에는 동국대와 주요 사찰의 강원 교육이 전부였으나 지금은 종립 동국대, 중앙승가대 이외에 전국 주요 본사와 사찰에 승가대학, 학림, 율원, 승가대학원, 기초선원 등이 설립되어 약 2천여 명의 승려를 교육하고 있다. 특히 1994년 개혁 불사를 통해 승가교육을 관장하는 교육원을 총무원과 대등한 별원으로 승격시켜 이 불사를 전담하게 하였다. 또한 당시 출가자는 4년 동안의 승려 기본교육 의무화를 제도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포교 방면에서도 중앙신도회(전국신도회)를 비롯한 많은 신도단체와 군법사, 교법사, 경승단, 대한불교청년회, 대학생불교연합회, 어린이지도자연합회 등 다양한 포교기관, 단체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특히 1994년 개혁 불사를 거치며 포교원도 별원으로 승격되어 신도교육과 포교사업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이후, 월간 『법회와 설법』의 발간, 파라미타청소년협회ㆍ상담개발원ㆍ여성개발원ㆍ 포교사단 창립 등의 성과가 있었다. 특히 포교원은 종단 차원의 신도교육 체계를 정비하여 신도교육 기관의 확충을 꾀하고 신도 기본교육의 의무화와 신도 종단등록사업을 추진하여 사부대중 공동체의 기반을 다져 나가고 있다. 그 외 많은 신도교육 교재와 포교자료를 개발하여 보급해 나가고 있다. 아울러 국제포교 방면에도 몇몇 원력승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큰 성과를 이루었다. 이 방면에 가장 큰 공로자는 숭산이다. 그는 1966년 일본 홍법원을 개원한 이래 미국,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 선을 가르쳐 50여 명의 외국인 출가 승려와 50,000여 명의 외국인 신도들을 지도하고 있다. 숭산은 달라이라마, 틱낫한과 함께 세계 3대 고승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세계적인 활약을 하였다. 더 나아가 종단의 본래 면목인 수행방면에서도 괄목할 변화가 있었다. 1969년 안거 결제선원은 39개이고 동참 대중은 600여 명으로 추산되었으나, 2000년에 이르면 90여 개 선원에 2,000여 명을 넘는 대중이 동참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도심과 사찰에 시민선원이 있어 정진의 열기가 점점 높아가고 있는 추세이다. 한국불교계 종단의 현황 20세기 후반 한국불교계가 직면한 변화 중 하나는 다종단(多宗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물론 해방 전후부터 천태종 등의 법화계열과 진각종 등의 밀교계열이 창종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공식화된 것은 1962년 제정된 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해서 18개 종단이 불교단체로 등록하면서부터였다. 이후 1987년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고, 전통사찰보존법으로 대체되면서 군소종단의 분종과 창종은 줄지어 일어나 현재는 한국불교의 전통 대표 종단인 조계종 이외에도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총지종 등 30여 개의 종단이 설립되어 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조계종 총무원장은 종단협의회 당연직 의장을 맡고 있다). 종단이 다양화되는 상황에서 불교계의 통일성과 종단의 고유성을 조화시키는 일은 앞으로 불교계의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교육면에서 조계종립 동국대학교와 중앙승가대학교 이외에 1990년대 이후 진각종에서 위덕대학교, 천태종에서 금강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밖에도 다수의 초ㆍ중ㆍ고등학교가 신설되어 불교계 종립학교로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포교활동에 언론매체가 끼치는 역할도 크게 증대되었다. 1960년에 조계종의 기관지로 「대한불교」, 즉 지금의 「불교신문」이 창간된 이후로 특히 8, 90년대에는 다수의 불교계 신문과 잡지 등이 창간되었다. 또한 각 종단별로도 기관지를 창립하여 정기적으로 발간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세계 최초로 라디오 불교방송국(BBS)과 케이블 텔레비전 불교TV가 개국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지금은 정보화시대의 포교를 위해 ‘불교 종합 정보망 달마넷’을 개설하여 운영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