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역사 - 제3절 한국불교 - 5. 근대 이후의 불교 - 2) 일제 강점기의 조선불교계

문성식 2016. 11. 27.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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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5. 근대 이후의 불교
        2) 일제 강점기의 조선불교계 사찰령과 본산제 1910년 일본 제국의 강점 이후 불교계를 비롯한 모든 종교계는 일본의 정책에 의해 극심한 제약을 받았다. 특히 일본이 불교에 대한 통제책으로 내세운 것은 1911년 반포된 사찰령과 그 시행규칙이다. 전문 7개조로 이루어진 사찰령과 전문 8조의 시행규칙은 한국불교의 체제를 철저히 일본의 지배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사찰령과 시행규칙에는 사찰을 병합, 이전하거나 폐지하고자 할 때에는 총독의 허가를 얻도록 명시하였고, 전국의 사찰을 30개의 본사(本寺)와 말사(末寺)로 재편하는 규정을 담고 있었다. 또한 본사와 말사의 경우에, 본사 주지는 총독, 말사 주지는 도장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규정과 각 본사는 사법(寺法)을 제정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등의 규정이 명시되었다. 그 결과, 법통(法統)의 전승이 중시되어야 할 본말사(本末寺)의 관계가 행정적인 조직이 되었고, 사찰의 주지는 총독부의 지배를 받는 관료와 다를 바 없는 위치가 되었다. 또한 전국 사찰을 30개의 본산을 중심으로 나누어 통치함으로써 불교계 전체의 단합적 활동이나 협력을 억제하고 본사 주지에게 사찰운영의 권한을 집중시켰다. 이와 같은 본말사 제도는 1920년에 화엄사가 본산으로 추가되어 31본산 체제로서 확립되었고, 일본의 패망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불교정책은 한국불교의 행정체계를 총독부에 종속시키고 승려의 세속화를 권장하면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크게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불교개혁론의 제창 일본의 지배 아래 한국불교의 전통과 발전 방향이 크게 왜곡되어 가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불교계의 자각과 개혁을 부르짖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먼저, 백용성은 1910년 『귀원정종(歸源正宗)』을 통해 기독교의 활발한 포교활동에 비해 훨씬 뒤떨어진 불교의 상황을 꼬집고 적극적으로 포교에 나설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1913년에 발표된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사회 진화론적 인식에 기초를 두고 불교의 평등주의, 구세주의에 개혁의 이상을 설정하였다. 한용운은 구체적인 개혁방안도 제시했는데, 승려 교육의 진흥, 참선법의 개정, 염불당의 폐지, 의식의 간소화 등을 통해서 불교의 본질을 회복하자고 역설했다. 또한 사원을 도시로 옮기고, 승려의 취처를 허용하여 교세를 확장시키고, 승려의 단결을 촉구하면서 교단 통일기관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개혁안들은 일본불교의 영향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보여 주고 있지만, 침체에 빠진 조선불교를 개혁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개혁론은 불교청년운동으로 이어졌고 그 이론적 논거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불교계의 항일 운동 불교계의 항일 운동은 1919년 3ㆍ1 운동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지금까지 불교계의 항일은 3ㆍ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 불교인인 한용운, 백용성을 중심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불교계의 3ㆍ1 운동은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표충사, 석왕사, 봉선사, 건봉사 등 전국 주요 사찰이 광범하게 동참하였고, 청년 승려들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한용운이 3ㆍ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하고 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만해 한용운은 불교계에 독립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중앙학림(오늘날의 동국대학교)의 학승들을 대대적으로 조직하여 전국 사찰로 독립 선언서의 배포와 만세운동의 확산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3ㆍ1 운동 당일 중앙학림의 학승들 거의 전원이 탑골공원의 독립선언에 동참하였고 가두시위를 하였다. 이윽고 만해의 지시를 받은 학승들은 연고 사찰로 흩어져 전국 주요 사찰 승려들의 만세운동 동참을 이끌어 냈다.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건봉사, 봉선사 등 주요 사찰들은 강원 학승들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전국 방방곡곡이 민족적 자존심을 되새기는 데 기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승려들이 투옥되어 수형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시적인 만세운동의 동참에서 나아가 조직적으로 항일 운동에 동참한 승려들도 많았다. 상해 임시정부 이전에 13대 대표자 회의가 인천 월미도에 열려 한성 임시정부의 창립을 선언하였는데, 여기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박한영, 이종욱이 참여하였다. 특히 이종욱은 월정사 승려로 3ㆍ1 운동 당시 시위에 동참하였고, 곧이어 27구국 결사대에 행동대원으로 동참하였다. 이후 이종욱은 김법린, 김상호, 백성욱, 신상완, 김상헌, 송세호, 백초월, 정남용, 이석윤 등 많은 승려들과 협의하여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승려 신분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전국 지리에 밝아 주로 산중 사찰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의 조직과 재정후원사업에 동참하였다. 특히 이종욱의 활약은 주목할 만하였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내무부 국내 특파원과 참사, 그리고 의정원(오늘날의 국회) 의원이 되었고, 임정의 국내 행정조직인 ‘연통제’의 국내 총책 소임을 맡기도 하였다. 이종욱은 국내 특파원으로 들어와 청년 승려들을 독려하여 전국 사찰의 재정모금을 꾀하였고, 주요 사찰을 기반으로 연통제의 확산과 의승군 조직을 도모하였다. 의승군은 임진왜란 당시 의승들의 전통을 되살리는 시도였으나 중도에 탄로가 나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이들은 1920년에 「승려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불교계 주요 고승 10여 명의 서명을 받아 상해와 프랑스 파리까지 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교계의 이러한 항일 운동은 일제의 간교한 탄압으로 대부분 구속되어 와해되어 갔으며, 일부 청년 승려들은 청년회를 조직하여 사찰령 철폐운동을 벌여 나가기도 하였다. 3ㆍ1 운동 이후에 일본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현실을 자각하고 비판을 가하던 청년 승려들은 대체로 전통적 강원이나 선방을 거치지 않고 중앙학림 등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근대적 학문을 익힌 경우가 많았으며, 전통불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불교청년운동의 조직으로는 1920년에 창립된 조선불교청년회, 1921년에 창립된 불교유신회, 1922년에 창립된 조선여자불교청년회 등을 들 수 있다. 청년들은 정교 분리라든지, 사찰령의 철폐, 주지의 전횡 반대 등을 주장하며 교단의 자율적 운영과 발전을 꾀했다. 하지만 점차로 침체되어 가던 불교청년운동은 1928년에 조선불교청년회로 재기하였고, 1929년 1월에 개최되었던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중앙종회의 구성과 종헌의 제정을 이루어 내기도 했다. 선학원과 전통불교의 수호 일제의 강압적인 불교정책과 주지들의 세속화 경향, 근대적인 불교개혁이 교단의 풍토를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전통불교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던 선방 수좌들의 입지는 점차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선학원(禪學院)은 그러한 수좌들의 자구책으로서 전통 선의 보존과 중흥을 위해 설립되었다. 선학원은 1920년에 남전(南泉), 도봉(道峯), 석두(石頭) 등의 수좌들이 중앙에 대표적인 선원을 만들자고 결의하여, 용성, 만공(滿空), 성월(惺月) 등의 협의를 거쳐서 1921년 11월에 완공되었다. 선학원은 창설 목적으로서 전통 선을 발전시켜 불조의 정맥을 계승하고 교리연구와 정법포교를 통하여 불법을 널리 선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선학원은 1922년 3월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를 창설하여 전국 선원과 청정 비구들을 회원으로 설정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점차 세속화되어 가는 주지들에게 배척받는 수좌들의 상황은 어려워져만 갔다. 선학원은 1924년에 자금난으로 인해서 활동을 중단하고, 1926년 5월에는 범어사 포교소로 전환하는 등의 곡절을 겪다가, 1931년 1월에 침체에 빠진 선학원을 적음(寂音)이 인수하면서 중흥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적음(寂音)은 침술로서 재정을 마련하여 선학원을 살려낸 뒤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수좌들을 모아서 참선에 전념케 하고 용운, 만공, 용성 등이 대중법회를 열기도 하였으며, 「선원(禪苑)」을 창간하여 선의 대중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이후 선학원은 1934년 12월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으로 개편하고 그 위상을 더욱 안정화시켰다. 1941년, 선학원에서 열린 유교법회(遺敎法會)는 청정 비구승 40여 명이 모인 대규모 법회였다. 이 법회는 일제 말 점차 희미해져 가는 선종의 전통을 확인하고 승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행사였다. 선학원 이외에도 일본의 불교정책과 일본불교에 맞서서 전통불교를 수호하고 정체성을 지키려는 여러 움직임이 있었다. 1925년 용성이 망월사에서 주도한 ‘만일선회결사(萬日禪會結社)’라는 참선결사를 비롯하여, 1926년 용성이 주축이 되어 100여 명의 승려가 함께 ‘대처 식육’을 반대하는 건백서를 총독부에 제출한 것도 전통적 수행풍토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해방 이후 정화운동 과정에서 선승들이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명분을 갖게 한 큰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