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화

아서 존 엘슬리 / 아이들과 애완동물들이 행복한 세상

문성식 2016. 11. 20. 23:06

 

아서 존 엘슬리 /  아이들과 애완동물들이 행복한 세상

 

출장길에 시간이 조금 남아 옷을 파는 가게를 들어갔습니다. 자꾸 어린 아이 옷에 눈길이 가더군요. 둘째 아이가 군에 입대를 한 것이 한참 전 일인데 왜 이럴까 싶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바로 옆집에 사는 조카 손녀를 염두에 두고 있더군요. 어린아이들이 그렇게 예쁠 수 가 없는 것을 보면 확실히 나이를 먹긴 먹었습니다. 영국의 아서 존 엘슬리 (Arthur John Elsley, 1860-1952)는 젊어서부터 아이들이 예뻤던 모양입니다.

 

항구의 풍경   A Harbor Scene, 57x96cm, 1904

그 녀석들, 참 예쁜 모습입니다. 할아버지 혼자서 배를 끌어올리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는지 작은 힘이라도 보탤 생각으로 함께 줄을 당기고 있습니다. 그림자로 봐서는 저녁 무렵이군요. 지는 석양은 할아버지와 아이들에게 내려앉았고 빛의 효과로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세월이 흔적이 굵은 주름살로 남은 할아버지에게 여리디 여린 아이들의 힘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아이들 마음은 세상의 그 어떤 무거운 것도 당길 듯합니다. 그것을 아는 할아버지의 깊은 눈과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군요.

엘슬리는 런던에서 여섯 아이의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마부이자 아마추어 화가였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마부는 시내버스 운전기사나 택시기사 같은 직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엘슬리가 12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폐결핵에 걸리자 마부를 그만두고 주식중개회사의 관리인 일을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전시회에도 출품한 적이 있다고 하니까 엘슬리의 재능은 아버지에게 흘러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첫눈에 반했어  Love at First Sight

너 누구니?라고 물어볼 사이도 없이 지나치는 길이지만 다시 한 번 고개를 돌아보는데 그 아이도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는 중이었습니다. 순간 눈이 마주치자 먼저 떠오른 것은 입가의 미소입니다. 저만한 나이에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끌리는 마음만큼은 분명히 있지요. 그것도 사랑이라고 한다면 저도 꽤 어려서부터 사랑에 빠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제 머릿속에 기억된 이름 중에 가장 오래된 이름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잠깐 짝이었던 김은주입니다. 그 아이 때문에 거의 병을 앓다시피 했죠.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나이에 걸맞지 않게 후덕한 인상인데, 졸업 후 단 한 번도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물론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런데 위의 그림과는 달리 그 애는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지요.

열한 살 때 강아지를 그린 것이 엘슬리가 남긴 스케치 중 가장 이른 나이의 것이라고 합니다. 런던동물원을 자주 찾았던 그는 기린과 얼룩말, 침팬지 등을 그렸습니다. 그런 재능을 살리기 위해 열네 살이 되던 해 사우스캔싱턴 미술학교에 입학합니다. 이 무렵 홍역을 앓고 난 그는 시력에 심각한 장애를 얻게 됩니다. 시력 장애를 앓고도 빅토리아 여왕 후반기와 에드워드 왕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된 그를 생각하면 장애는 잠시 불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핍 보  Peep Bo!, 1893

아이들을 키울 때 일입니다.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손바닥을 치우면서 ‘까꿍’ 하면 아이들이 자지러지게 웃었지요. 제 얼굴이 워낙 크니까 아이들에게는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마치 그림 속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는데 그렇다고 제가 누나처럼 저렇게 달려가지는 않았습니다. 얼마 전 조카 손녀 앞에서 예전 생각이 떠올라 ‘까궁’을 했는데, 울더군요. 시대가 달라서 까꿍이 더 이상 아이들에게 먹히지 않는 것인지 저의 까꿍이 시간이 지나면서 공포로 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당분간 까꿍은 접어야 할까 봅니다.

1876년, 열일곱 살의 엘슬리는 로열 아카데미의 견습생이 됩니다. 이 기간 동안 그를 지도하던 여러 교수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한 열성적인 자전거 애호가이던 그는 자주 자전거를 타고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그림에 대한 영감을 얻곤 했습니다. 2년 뒤, 열아홉이 되던 해 엘슬리는 로열 아카데미에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이 작품을 보러 왔고 이것이 아버지가 본 마지막 아들의 작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한 달 뒤 세상을 떠납니다. 엘슬리는 스물세 살이 되던 해까지 로열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계속합니다.

금어초  Snapdragon, 70.5x93.3cm, 1894

그림 속 아이들이 어떤 놀이를 하는지 이리저리 궁리를 해도 알 수가 없군요. 제목과 관련이 있을까 해서 금어초를 찾아봤더니 우리나라에서는 꽃이 금붕어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금어초, 금붕어꽃이라고 부르고 서양에서는 용의 모습을 닮았다고 보고 스냅드래곤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 정도입니다.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뺨이 볼록하도록 부는 모습과 손바닥 사이로 보이는 빛을 봐서는 혹시 불씨 같은 것 아닐까 싶은데 그렇다면 손이 너무 뜨거울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놀란 막내의 모습과 마구 짖어대는 강아지의 놀란 눈이 닮았다 싶습니다. 혹시 무슨 장면인지 아시는 분 있나요?

학교를 졸업 한 엘슬리는 어린이와 개, 말 등을 주제로 한 작품을 그려 생활비를 벌기 시작합니다. 이때 그의 가장 큰 고객은 브링햄에 살고 있던 베넷 스탠포드라는 정치인의 집안이었습니다. 졸업한 다음 해, <젊은 영국>(Young England)라는 잡지에 그의 작품이 소개되면서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할 무렵 엘슬리는 조지 맨튼이라는 친구와 같이 화실을 쓰게 되는데, 맨튼의 소개로 당대 영국의 유명 화가였던 프레데릭 모건을 소개받습니다.

다시 오세요  Home Again, 1900

떠나는, 헤어지는 장면이 이렇게 환할 수도 있었군요. 연기를 내뿜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배웅을 나온 아이들이 모두 나무 난간 앞으로 모이더니 손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시선이 닿은 곳, 기차를 타고 떠난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해졌습니다. 아이들 모두 활짝 웃는 얼굴을 보니 엄마나 아버지는 아닐 듯싶습니다. 혹시 대처에 사는 부유한 고모나 이모 아닐까요? 제 어렸을 때 기억을 기준으로 하면 선물을 잔뜩 가지고 오시는 어른들이 가실 때마다 또 오시라는 인사를 아주 많이 했었거든요. 아이들의 모습이 대견했는지 기차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아이들을 향했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흰 손수건, 그 중에 더러는 정말 손수건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요.

모건은 이미 아이들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유명했지만 동물을 그리는 데는 서툴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동물을 그려야 할 때는 다른 화가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엘슬리가 모건의 화실을 드나들면서 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1889년 엘슬리는 모건의 화실로 이사를 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가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좋았다는 이야기는 나중에는 그렇지 못했다는 이야기이겠지요.

리틀 핍 보  Little Peep Bo, 81.3x57.1cm, 1900

핍 보는 동화 속 주인공이라고 하는데 덜렁대는 성격이라고 하더군요. 말을 안 듣는 양떼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꾸미는 내용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습니다. 어린 양이나 보 핍이나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천방지축인 양들 때문에 어지간히 속이 상했는지 소녀의 표정이 샐쭉합니다. 속 모르는 양들은 여전히 장난칠 궁리는 하는 것 같은데 소녀의 뺨은 더욱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1891년, 수정궁에서 개최된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으로 은메달을 수상합니다. 화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이후 금전적으로 성공을 거둔 엘슬리는 그동안 자신의 작품 모델이었던 사촌 에밀리와 결혼을 합니다. 에밀리가 엘슬리보다 열 살이 어렸다고 합니다. 10년 후 둘 사이에는 딸이 태어나는데 이 아이도 엘슬리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델이 됩니다. 아내와 딸을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렸으니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애를 맡을까?  Which May I Keep, 87.6x65.4cm, 1901

양손에 강아지를 한 마리씩 든 소녀가 어미 개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둘 중에 한 마리는 내가 맡아볼게. 말은 안 통하지만 어미 개는 영 불안한지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어미개의 불안한 눈빛은 새끼들에게 가 있습니다. 아마 개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런 말 정도가 오고갔겠지요. “너도 어린데 누가 누구를 돌본다고 그래?” 아이의 천진스러운 표정과 어미 개의 걱정 가득한 표정을 보다가 웃고 말았습니다. 엘슬리 선생님, 참 대단하십니다. 개의 감정까지 그림에 담으셨군요!

1894년, 영국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화가 찰스 바버가 세상을 떠납니다. 어린아이와 애완동물을 한 화면에 묘사한 그의 후계자로 자연스럽게 엘슬리가 떠올랐습니다. 그에게는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었겠지요. 그런데 좋은 일은 항상 혼자 오지 않고 나쁜 일과 같이 움직이더군요. 엘슬리와 모건의 사이가 틀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루 수확물  The Day's Catch, 82x102cm, 1902

사내 녀석들 짓궂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또 같습니다. 그물을 들고 바닷가로 나갔지만 아이들에게 잡힐 만한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내아이는 제법 큰 게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잡은 게를 자랑도 하고 싶고 또 여자아이들을 놀리고도 싶었겠지요. 그물을 앞에 두고 질겁을 하는 여자아이들 표정이 너무 귀엽습니다. 그나저나 소년은 오른쪽 소녀의 손에 들린 소라를 보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더 했다가는 소라가 날아올 것 같은데요. 저도 퇴근하면 저렇게 매일 자랑하고 싶은데, 소라를 맞을 수도 있겠군요.

프레데릭 모건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엘슬리를 고소했습니다. 아이들이 있는 장면은 대개 비슷비슷해서 모건의 말처럼 엘슬리가 가져갔을 수도 있지만 엘슬리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은 평생 차가운 사이가 됩니다. 두 사람이 합동으로 작품을 만들던 사이였는데 좀 너무하다 싶지만, 자신의 영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예술가들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새 옷  The New Dress, 1912

“이 옷 예쁘지?” 관객들 앞에서 한껏 옷 자랑을 하고 있는데 관객들의 반응은 별로입니다. 관객들 입장에서는 하루 이틀 본 풍경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소녀의 마음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새 옷에 관한 한 소녀의 마음이나 저의 마음이나 비슷합니다. 저도 새 옷을 무척 좋아합니다. 머리가 하늘에 닿을 정도는 아니지만 날개를 단 느낌이 있거든요. 거울 앞에서 새 옷을 입고 서성거리다 보면 히죽거리는 또 다른 저를 만나게 됩니다.

모건과의 사건이 있고 난 뒤 엘슬리의 작품 제작에 변화가 옵니다. 엘슬리는 모든 작품을 화실에서 제작합니다. 아이들과 등장하는 애완동물들을 따로 그렸습니다. 야외 풍경은 이전에 그가 스케치한 것을 참고로 하거나 사진 또는 전원생활을 소개한 잡지에서 가져왔습니다. 한편으로는 어려서 다친 시력으로 인해 원근법 표현에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과 따기  Picking Apples, 96.5x68.5cm, 1919

사과 따는 풍경은 그림의 좋은 주제입니다. 혼자보다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여인이 그냥 손을 뻗으면 사과를 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내아이가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어려도 남자는 남자인가요? 소년이 아이에게 건네주는 사과로 모든 시선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가면 모두들 행복한 얼굴입니다. 저는 나무를 타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높은 곳에 대한 무서움 때문입니다. 그래도 훗날 사과를 따주어야 할 일이 있으면 행복한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엘슬리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3년간 그가 그린 작품은 4점이었습니다. 그나마 3점은 상업용이었고 순수 작품은 한 점뿐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쟁 기간 중 엘슬리는 폭격을 위한 조준기 만드는 공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는데 시력이 안 좋았던 그에게 이 일은 그의 시력을 더욱 나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보호자  Safety Guard, 80x60.1cm, 1924

그림 속의 개가 세인트버나드 종이라고 하던가요? 언니와 배드민턴 놀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소떼가 나타났습니다. 놀란 어린 소녀가 제일 먼저 기댄 곳은 자신보다 훨씬 큰 개입니다. 사실 저 정도 크기가 되면 확실한 보호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빙그레 웃는 언니도 큰 힘이 되겠지만 소녀에게 이 순간 확실한 가장 듬직한 보호자는 따로 있었군요. 지금 나는 누구의 가장 믿음직한 보호자일까요?

엘슬리는 1878년부터 1927년까지 모두 52점의 작품을 로열 아카데미에 출품 전시를 했다고 합니다. 물론 영국 전역에서는 더 많은 작품 전시회가 열렸지요. 아흔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기 전 엘슬리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력을 거의 잃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정원을 가꾸는 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제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비록 앞을 보기 어려웠겠지만 늘 아이들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엘슬리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