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 대장전(大藏殿)에 봉안되어 잇는 목각탱은 1684년(숙종(肅宗)10년, 강희(康熙) 23년 )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어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후불정(木刻後佛幀) 중 가장 이른 작품이다.
목각탱의 기본구조는 상하가 긴 장방형(長方形)이지만 좌우로 운문광선(雲紋光線)을 표현한 능형(稜形)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이같은 장엄은 다른 예에서 찾아볼 수 없는 수법으로 특히 주목된다.
조각면(彫刻面)의 중앙에 봉안되어 있는 본존불(本尊佛)은 보상당초문(寶相唐草紋)이 새겨진 화려한 키형 광배(光背)를 등지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다. 넓적한 얼굴, 날카로운 눈, 작은 입을 꽉다문 얼굴은 불안(佛顔)을 성공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못한 인상으로 조선후기 불상기법 가운데 다소 떨어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형은 팽이모양으로 육계(肉계)표현이 생략되고 정상과 중간부분에 각각 계주(계珠)가 묘사되었다. 어깨는 약간 움추린 듯 표현되었지만, 앉아 있는 신체는 중후한 모습이다.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렸는데 손가락을 왼손은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여 엄지와 중지를 잡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의 아미타불인(阿彌陀佛印)을 묘사하고 있다. 오른손을 어깨까지 올리지 않아 마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처럼 보이게 한 것은 올릴 경우에 생기는 기법상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방편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같은 점은 조선조 후기 조각장들의 열의가 부족하였음을 엿보게 해준다. 이같은 현상은 당대 대부분의 아미타불상 특히 목각탱이나 목불감(木佛龕)의 아미타상에 주로 나타난다. 통견(通肩)의 불의(佛衣)는 두터운 편이지만, 지극히 간략한 도식적인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을 구분하여 주름이 없다면 신체의 근육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본존불 이외에 대중(大衆)들은 사천왕(四天王), 8대보살(八大菩薩), 두 제자들인데 모두 상 ·중 ·하 3행(行)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하열(下列)은 사천왕상으로 본존대좌 좌우로 2구(軀)씩 일렬로 서 있는데, 조선조 후기 명부전(冥府殿)의 인왕상(仁王像)들과 비슷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중열(中列)과 상열(上列)에는 각기 좌우 2보살씩 모두 8대보살이 배치되었고, 상열의 보살좌우에 다시 무릎을 꿇고 합장하는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미(美)를 살리고 있다. 8대보살은 모두 같은 모양의 관(冠), 평판적인 얼굴, 작달막한 체구, 두터운 천의(天衣) 등의 표현으로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불보살상 사이의 공간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하여 조각면을 보다 장엄하게 하고 있다.
이같은 목각탱 앞면에는 삼존목불좌상이 놓여져 있는데 이는 그 기법상 목불탱의 불보살과 꼭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진 원각상(圓刻像)이라 하겠다. 본존상의 경우 육계가 생략되었고, 반달형의 중앙계주가 표현되었으며, 신체는 중후한 모습이지만 각 부분은 둥글게 처리되었다. 또한 통견의 불의는 그 두께가 두꺼워 신체 윤곽이 선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옷주름 또한 지극히 단순화되어 도식적인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이 본존상이 목각탱과 동일한 작가에 의해 동시에 조성된 작품임이 확실하지만 목각탱의 상(像)에 비해 가슴 표현 등이 비교적 유기적이며 조각기법상 어려운, 들고 있는 손을 표현한 점 등에서 조각가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의 조성기(造成記)가 하단에「강희이십삼년갑자계(康熙二十三年甲子季)」라고 묵서(墨書)되어 있어 숙종(肅宗)10년(1684)에 조성된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이들 조각은 17세기 후기의 조각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높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