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천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전남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장으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했다. 광주학생운동의 불길을 우리 독립운동의 일대 전환기로 만들고자 신간회와 협력하여 운동을 경성과 전국에 확산시켰다.
전남 완도군 신지도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인 교사 횡포에 대항한 후 고보 퇴학
장석천(張錫天, 1903.2.25~1935.10.8) 선생은 1903년 전남 완도군에서 10여 리 정도 떨어진 조그만 섬인 신지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장인오(張仁吾)로 지주였으며, 위로는 장석지(張錫之)·장석태(張錫泰) 두 형이 있었다. 큰 형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았고, 작은 형은 경공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뒤에 1924년 조선총독부의 토목기사가 되었다.
선생은 완도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뒤, 1918년경 서울로 올라가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중앙고보에 다니면서 식민지인으로 받아야만 하는 차별과 인격적 모멸감에 반일 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반일 의식은 일본인 교사에 대한 배척으로 나타났다. 중앙고보에 ‘호랑이’라고 불린 일본인 체육 교사가 있었는데, 그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괴롭히곤 하였다.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선생은 그 교사를 응징하였다. 이후 선생은 더 이상 중앙고보를 다니지 못하게 되었지만, 다행히 보성고보로 전학하게 되어 1923년 3월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보성고보를 졸업한 선생은 관립 수원고등농림학교(이하 수원고농)로 진학하였다. 선생은 재학 중에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1925년 11월 열린 조선학생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정되었다. 조선학생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 단위 학생단체인 ‘조선학생대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체된 이후, 1923년 2월에 전문학교 학생 중심으로 창립된 학생 단체였다.
선생은 수원고농 재학시절에 사회운동과 관련한 강연회에 참가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1925년 11월 수원고농 강연부 주최로 서울의 영화관 개성좌(開城座)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가하여 <농촌의 유지(維持)>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고, 이어 1926년 2월에는 조선일보사와 시대일보사 후원으로 개최된 ‘전선조선학생웅변대회’에 참가하여, <‘원만한 인격’ 인간의 인위적 불합리를 논함>이란 주제로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보성고보 졸업 후 도쿄 유학 갔다가 광주로 돌아와 사회운동 시작. 학생조직 ‘성진회’ 지도
장석천 선생은 1926년 6월경 ‘동맹휴학’으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당하자 수원고농을 스스로 중퇴하였다. 그 뒤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에 입학하였지만, 4개월이 지난 1926년 10월경 학업을 중단하고 전남 광주로 돌아왔다. 일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이 광주로 돌아왔을 당시에는 청년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때였다. 광주에서는 1920년대 초부터 광주청년회와 광주노동공제회 간의 세력경쟁이 거셌다. 광주청년회는 ‘청년운동’에 주력한 반면, 광주노동공제회는 ‘소작운동과 노동운동’에 관심을 두었다. 당시 사회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 차이로 불거진 문제였다. 그 뒤 1926년 2월 광주청년회가 계파적 개념이 명확하지 않던 전남청년회연합회를 전남청년동맹으로 개편하면서 두 단체 간의 세력균형이 깨졌다. 더욱이 1926년 6월 광주노동공제회를 주도하였던 인사들이 일제에 의해 대거 체포되면서 세력을 더욱 잃고 말았다.
광주지역 학생비밀단체 ‘성진회’ 조직 기념사진(1926). 성진회는 1929년 6월 독서회로 발전하면서, 학생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게 된다. 당시 정석천 선생이 독서회 결성을 적극 후원하였다.
선생은 광주청년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광주청년회는 “대중을 교도하고 투사를 양성한다”는 목표를 내세워 광주 시내의 중등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비밀결사의 조직과 지원에 힘을 쏟고 있었다. 이는 광주청년회 학생지도부를 책임지고 있던 강해석·지용수 등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이들은 학생비밀조직을 만들기 위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상문제 강연회를 개최하여, 민중이 주인 되는 ‘신사회’의 이상향을 제시하며, 학생들을 비밀결사에 끌어들였다. 그 결과 1926년 11월 초 광주고보·광주농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성진회가 결성되었다. 성진회는 신사상 보급과 연구, 식민지교육체제 반대 등을 실천하고자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당시 선생은 광주청년회에 가입하여 성진회를 지도해 간 것으로 보인다. 광주청년회는 1927년 2ㆍ3월 광주고보·광주농교 졸업생들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이를 주도한 선생은 학생들에게 졸업 후에도 우리 민족을 위해 분투할 것을 격려하였다.
1927년 3월 경 성진회는 해산되었지만, 성진회 출신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광주고보·광주농교·사범학교에서는 신사상 연구를 위한 독서회가 조직되었다. 초기에 독서회는 학교별로 조직되었지만, 1928년 6월 이후 동맹휴학이 전개되면서 조직체로 발전해 갔다. 이 과정에서 전남청년연맹 위원장이었던 선생이 학생들을 지도하며 독서회 결성을 후원하였다.
선생은 1927년 3월 이후 광주청년연맹 활동에 전념하였다. 광주청년연맹은 군내 5개의 청년단체가 연합한 조직이었다. 광주청년연맹은 전남청년연맹에 가입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이 같은 해 4월에 열린 전남청년동맹 정기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면서 두 단체 간 통합이 모색되어 갔다. 이러한 변화는 1927년 5월 선생이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에 장성청년연맹 대표로 참가한 뒤, 같은 해 10월 장성청년연맹이 자진 해체하고 전남청년동맹 소속의 장성청년동맹으로 새롭게 출범했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신간회 전남청년연맹 소속으로 독서회, 야학 활동하며 일제 치하 사회운동의 풀씨들을 퍼뜨려
한편, 선생은 1927년 10월 신간회 광주지회가 창립되자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같은 해 8월 전남청년연맹·광주청년회가 ‘방향전환’을 통해 신간회와 정치운동을 같이하기로 결정한 뒤였다. 이후 전남청년연맹은 단일청년동맹조직을 조직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때 선생은 김재명과 함께 전남청년연맹의 지방 순회위원으로 선출되어 광주·화순·보성·고흥 지역의 청년동맹을 조직하는데 힘썼다. 먼저 1927년 11월 선생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광주청년연맹의 전격 해체를 선언하고 전남청년연맹 소속의 광주청년동맹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당시 선생은 전남청년연맹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런 가운데 1928년 1월 전남청년연맹 중앙집행위원 김재명이 서울에서 활동하기 위해 상경한 뒤 광주지방의 청년운동은 새로운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선생의 사회로 개최된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회에서 김재명의 사표가 수리되고, 선생의 측근 인물들로 상무집행위원이 채워졌다. 이때 집행위원회는 “학생·소년운동의 옹호, 식민지 교육정책 반대,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실현 등을 내걸며 학생층과 연대에 주력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1928년 4월 광주·송정 등지에 수십여 차례에 걸쳐 ‘항일문서’가 뿌려지고, 전남 각 사회단체에 수십여 통의 선전문이 발송되는가 하면, 전남 경찰부장 등에게도 협박문이 보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광주경찰서는 발칵 뒤집혀 닥치는 대로 사회운동가들을 검거하였다. 이에 선생을 비롯한 인사들도 줄줄이 잡혀가 가혹한 취조를 받아야만 했다. 광주경찰서는 4ㆍ5일간 밤낮으로 취조를 계속하였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내보내기는커녕 검거 범위를 더욱 넓혀 광주소년동맹 간부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였다. 이들 대부분은 그날 무사히 방면되었지만, 선생을 비롯한 11명은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넘겨졌고, 1개월만인 5월 8일에서야 아무런 혐의 없이 풀려났다.
선생은 그간의 일로 전남청년연맹 정기대회 개최가 늦춰지자, 담양에서 대회를 열기로 하고 그 준비에 만전을 기울였다. 1928년 6월 모든 준비를 끝내고 정기대회를 치르고자 하는데, 돌연 담양경찰서가 치안방해라는 이유로 이를 금지시켰다. 선생은 대회가 무산될 것을 우려하여 준비위원들과 함께 담양경찰서를 찾아가 항의를 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다만 임시대회는 개최해도 좋다는 허가를 얻어냈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임시대회에서 선생은 집행위원회 서무부장에 선출되면서 전남 일대의 사회운동자 간에 핵심적인 활동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더욱이 1928년 7월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강해석·지용수 등이 일제에 검거되면서 선생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강해석·지용수 등의 검거 이후, 긴급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회가 열렸는데 이때 선생은 임시집행부 의장에 선출되었다. 선생은 경제위원회를 신설하고 농촌학교·야학교 설립, 야학교 교과서 제작, 순회지도 강연 등을 결의하였다. 또한 선생은 학생 독서회를 지도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선생은 신간회 광주지회 간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수원고등농림학교 사진. 장석천 선생은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수학하던 중 동맹휴학에 연루되어, 무기정학 처분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선생은 학생들의 독서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29년 1월 선생은 광주고보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광주 내 각 학교의 졸업생들을 만나 항일운동방안에 관해 협의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같은 해 5월에는 독서회 재정을 지원하기 위해 소비조합을 조직하였으며, 성진회 회원이었던 장재성을 학생부 책임자로 삼았다. 이후 선생은 장재성과 더불어 학생 조직화에 적극 나섰다. 장재성은 각 학교별로 진행되고 있던 연구모임을 통합하고자, 1929년 6월 중순경에 광주고보·광주농교·광주사범학교 등 학생 10여 명을 중심으로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하고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또한 선생은 1929년 6월 이후 전남청년연맹의 조직강화에 주력하였다. 선생은 전남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강해석의 동생인 강석원과 제수인 신경애를 광주대표로 집행위원에 선임하는 등 조직 장악력을 넓혀갔다. 1929년 9월에는 장흥에서 농민운동을 전개하던 왕재일 대신에, 학생 독서회 조직에 나선 장재성을 집행위원으로 선임하였다.
신사참배 거부하고 귀가하던 광주고보생들과 일본 학생들 충돌로 일어난 1차 광주학생운동
1929년 11월 3일 제1차 광주학생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당시는 며칠 전 일어난 ‘나주역 사건’으로 광주지역 한일 학생들 간의 집단적인 충돌로 치닫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날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명치절 행사와 더불어 전남지역 누에고치 증산[産繭] 6만석돌파축하식이 거행되던 날이었다. 광주고보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에 참석한 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귀가하는 길에 일본인 중학생들과 맞닥뜨렸다. 격앙되어 있던 광주고보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간에 격투가 벌어졌고, 이때 일본인 학생이 휘두른 단도에 광주고보 학생들이 부상을 당하였다. 그 뒤 한일 학생들 간의 충돌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양 측의 학교 교사들이 나서고 경찰들이 출동하면서 해산되었다.
학교로 돌아간 학생들은 선후책을 논의하였고, 그 자리에 참석한 전남청년연맹 학생부 책임자 장재성은 독서회 학생들을 통해 시위운동을 지도하였다. 광주고보·광주농교 학생들은 교가와 운동가를 부르며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장작·곤봉·배트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는 광주중학교를 습격하고자 했지만, 일본 경찰과 소방대의 강력한 저지에 무산되자 시위행진을 벌인 뒤에 해산하였다. 경찰 당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주동학생에 대한 대규모 검거에 착수하여 70여 명의 조선인 학생 중 60여 명을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검거 선풍은 한일학생뿐만 아니라 광주지역 사회단체 인사들을 자극하여 제2차 시위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불길을 전국 학생시위로 확산시키자.” 학생투쟁지도본부 만들고 신간회와 협력
전남청년연맹 상임집행위원장이던 선생은 1929년 11월 4ㆍ5일에 걸쳐 각계 사회단체 책임자들을 불러 모은 뒤에 대책을 협의하였다. 이때 장재성은 검거된 학생들의 석방을 위해 시위운동을 제안하였고 참석자들이 모두 이에 찬성하여 제2차 시위계획이 추진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인 학생시위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투쟁을 효과적으로 지도하기 위한 ‘학생투쟁지도본부’를 만들고 각기 업무를 분담하여 계획을 차질 없이 진행시키기로 하였다. 전국적 시위운동을 주도하게 된 선생은 광주 및 전조선의 학생 지도를 전담키로 하였다.
한편,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를 겸임하고 있던 선생은 전문을 통해 신간회 본부에 광주학생 시위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신간회는 광주·송정·장성 지회에 광주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는 한편, 집행위원장 허헌을 책임자로 하여 광주로 파견하였다. 선생은 신간회 나주지회 위원장인 김창용 등과 함께 이들을 맞아 광주사건의 진상을 보고하였다. 이때 선생은 허헌과 대책을 협의하는 가운데 시위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것이라는 계획을 알렸고, 허헌으로부터 신간회 차원에서 이에 적극 협조할 것이며 필요한 경비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러한 논의는 이전에 조선청년총동맹에서 파견된 부건·권유근 등과도 논의하였던 문제였다. 선생은 그들과 함께 시위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한 뒤에, 장성청년동맹 집행위원 강영석으로 하여금 권유근과 함께 상경하여 거사를 준비토록 하였다.
한편, 장재성은 제2차 시위운동을 위해 학생들에게 배부할 전단을 작성하고, 각 학교 독서회 관련 학생들을 불러 모은 뒤에 앞으로의 계획을 알리며 이에 적극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학생들은 이에 적극 찬성을 표하는 한편, 임시휴업이 끝나는 11월 11일에 수업시작 시간을 기하여 세 학교가 일제히 선전 전단을 살포하고 시위운동을 감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선생은 나름대로 완도 출신의 고보 5학년생인 김향남을 통해 학생들의 동향을 살피는 한편, 11월 10일 밤 광주고보생 6명을 규합하여 시위운동에 대해 논의하던 중, 장재성이 거사일을 11일로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12일로 날짜를 변경토록 하였다. 11일은 임시휴업이 끝나고 첫 등교하는 날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등교여부를 확인하기 어렵고, 또한 12일이 장날이기 때문에 시위운동을 벌이기에 적당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조선 민중이여 궐기하자.’ 격문 작성해 광주의 학교들에 배포하고 시위 확산시켜
거사 하루 전날인 11월 11일, 장재성은 일반 민중들에게도 배포할 ‘조선 민중이여 궐기하자’라는 제목의 새로운 격문을 작성하였다. 장재성이 작성한 격문은 독서회원들에 의해 4천부가 인쇄되어 각 학교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다. 밤이 되자 선생은 장재성·강석원·박오봉·국채진 등을 불러 모은 뒤 제2차 시위운동 계획을 최종 점검하였다. 11월 12일 아침, 농업학교의 교실에서 격문 전단이 배포되면서 시위가 촉발되었다. 광주고보에서는 선생의 지시를 받은 김향남이 5학년 을반 교실에서 학생들을 독려하면서 시위운동이 개시되었다. 이에 광주고보와 농업학교는 곧바로 임시휴교에 들어갔지만, 13일에 광주여고보, 전남사범학교로 시위운동이 확산되어 갔다. 일본 경찰들은 즉각 학생들 검거에 나섰고 시위운동의 배후세력을 캐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 결과 광주형무소에 시위운동 가담자 2백여 명이 수감될 정도로 탄압이 혹독하였다.
광주에서의 제2차 시위운동은 일제의 보도통제로 인해 밖으로 알려지지 못하였다. 이는 오히려 광주에서 “조선인 여학생 2명이 코를 일본 군인에게 절단 당하고 한인 남학생 12명이 피살되었다.”는 풍문이 나돌면서 세상을 더욱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선생의 지시로 1929년 11월 8일 서울로 올라온 강영석은 서울의 청년운동 조직인 중앙청년동맹원들의 지원을 받아 서울지역의 학생 시위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그는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장인 차재정을 비롯하여 이항발·황태성 등과 운동방안을 논의하였다. 하지만 총동맹휴학·시위운동·격문살포 등 시위운동 방식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여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논의 끝에 격문을 살포하기로 어렵게 의견을 모았다. 총동맹휴학보다는 시위운동이 낫지만 현실적으로 시위운동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차선책으로 격문 살포가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11월 17일 선생이 서울로 올라온 이후에 시위방식을 두고 또다시 격론이 벌어졌다. 선생은 광주에 이어 서울에서도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고, 차재정·이항발 등은 시위운동에 반대입장을 고수하였다. 서울에서는 경계가 엄중하여 시위운동을 일으키기 어렵고 많은 희생자가 따른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렇듯 각자의 입장이 팽팽한 가운데 황태성이 시위운동에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면서 논의는 급진전되었다. 결국 학생들을 동원한 시위운동과 격문살포를 동시에 추진하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이에 차재정·곽현 등은 격문 제작에 책임을 지기로 하고, 선생과 황태성 등은 시내 각 중등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경성으로까지 번진 학생 항일 시위…30여개학교 1만2천여 명 참여…1천4백여 명 검거돼
그 뒤 선생은 허헌을 만나 시위계획을 전달하며 신간회의 동참과 시위의 전국확산을 논의하였다. 선생과 황태성은 각 중등학교의 학생들과 접촉하며 시위운동 동참을 적극 권유하였다. 선생은 11월 20일 이래 15회에 걸쳐 휘문고보·보성고보·경신학교·배재고보·경성제2고보·중동학교 등의 학생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시위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구체적인 시위운동 방법 등을 지도하였다. 황태성 또한 11월 하순부터 12월 초까지 경성제2고보·중앙고보·보성고보·휘문고보 등의 학교를 찾아가 대표자들에게 시위운동에 적극 동참할 것을 종용하였다.
장석천 선생 병 보석 출옥 기사(《동아일보》1933년 11월 16일자). 선생은 두 차례 옥고를 치렀는데, 1933년 4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후 위장병이 심해져서 11월 7일 보석 출옥되었다.
곽현은 <만천하 학생동제군에게 격함>ㆍ<학생대중제군에게 격함>ㆍ<전국학생 동제군에 격함>ㆍ<피압박민중 제군에게 격함> 등 7종의 격문을 직접 작성하고 8천여 매를 인쇄하였다. 이어 곽현은 권유근을 통해 격문을 배포할 명단까지 확보하여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이때 지방의 사상단체에도 격문을 우송하였고, 선생은 피압박민족의 실정을 호소하는 내용의 진정서를 영국 정부에 보낼 것을 계획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12월 2일 계획에 맞춰 시내 각 중등학교에 격문이 살포되었다. 그 뒤 12월 3일부터 시위를 주동했던 인사들이 일제에 피체되기 시작하였고, 12월 5일에 선생과 차재정 등 10여 명도 피체되고 말았다. 이에 시위운동 자체가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12월 5일 경성제2고보에서 가장 먼저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경성제2고보는 학내문제로 동맹휴학이 계획되어 있었는데, 선생 등의 적극적인 권유에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시위로 발전시키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 시위운동은 각 학교로 번져나갔고, 12월 9일에 이르러서는 연합시위로 발전해 갔다. 서울지역 시위운동은 16일까지 계속되었고 모두 30개교의 남녀 전문학교와 중등학교를 비롯하여 각종학교, 보통학교에서 1만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 또는 맹휴를 전개하였고, 그 결과 1천4백여 명의 학생들이 검거되었다.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항일시위는 선생 등의 이 같은 전국화 노력의 결실로 이듬해인 1930년 3월까지 이어졌다. 전국적으로 194개교, 5만4천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중등학교 학생 전체(8만9천여 명)의 60%가 이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 같은 시위 규모는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것이다.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선생은 시위주동 혐의로 체포돼 옥고 치러
한편, 서울지역 시위를 주도하였던 인사들은 몇 개월에 걸쳐 종로경찰서에서 혹독한 취조를 당해야만 했다. 그런데 선생 등은 광주지역 시위운동의 주동자라 하여 전남 광주경찰서에 의해 광주로 호송되었다. 선생은 광주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은 뒤에 1930년 2월 치안유지법으로 기소되었다. 1930년 10월 일제경찰들이 법정 내외를 철통같이 엄중 경계하는 가운데 광주지방법원 제1호 법정에서 선생을 비롯한 35명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 첫 공판이 열렸다. 김병로·김용무·김성호 등이 변호사로 나섰다. 이 과정에서 재판부는 선생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비공개로 재판을 진행시켰다. 이때 선생은 6년 구형을 받았지만, 1930년 10월 27일 최종 결정에서 1년 6개월의 언도를 받았다.
이에 선생 등 35명은 판결언도에 불복하고 대구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다. 1931년 4월 23일에 개전된 대구복심법원에서 성진회 사건 35명과 독서회 사건 50명의 첫 재판이 열렸다. 그 뒤 6월 13일 선생은 1년 6개월 확정 판결을 받았다. 1년여 넘게 끌어왔던 성진회 관련 사건이 마무리된 것이다. 선생은 왕재일·임종근 등과 함께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12월 13일에 출옥하였다.
출옥하자마자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노동조합 조직에 나섰던 불꽃 인생
선생은 출옥하자마자 사회운동을 재개하고자, 전남청년동맹 상임위원을 지낸 바 있던 유혁을 찾아가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였다. 유혁 또한 사회운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출옥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다. 선생은 유혁에게 전남 곡성군 옥과면에 사는 이정윤을 소개 받았지만, 당시 이정윤은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 뒤 유혁의 도움으로 1932년 1월경 광주읍 명치정 함평여관에서 김호선을 만났다. 김호선은 광주고보 출신으로 항일의식이 치열한 청년이었다. 이에 선생은 김호선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하고, 그 동안 재정문제로 중단되었던 《봉화(烽火)》라는 잡지에 대한 간행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선생은 1932년 2월 급히 서울로 올라가 경성부 혜화동에 기거하면서 자금조달과 전남 연락책 물색에 분주히 움직였다. 그런데 3월 1일 돌연 전남에 있던 김호선 일파가 검거되었다는 소식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그 뒤 선생은 1932년 3월 초순에 좌익관련 서적을 취급하던 민중서원 점원 권태석의 소개로 행정학회인쇄소, 조선제사주식회사, 선일지물주식회사에 다니는 직공 정태익·박영환·신광옥 등을 소개받았다. 당시 선생은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동시에 확고한 결사단체와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었다. 선생은 박영환과 정태익을 만나 사회운동에서의 역할을 분담하였는데 자신은 출판관련부분을 담당하여 사회운동에 매진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선생의 노동조합 결성 계획은 일본 경찰의 검문·검색이 강화되면서 탄로 나고 말았다. 당시 일본 경찰은 1932년 9월 4일 국제노동절에 맞춰 지방의 항일 인사들이 서울로 잠입하여 공장의 노동자들과 연락을 꾀하고자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검문을 강화하였고, 그 와중에 용의자로 지목된 조선제사주식회사 직공 박영환이 종로경찰서에 붙들렸다. 일본 경찰은 박영환을 가혹하게 취조하였고, 그 결과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였던 선생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자 한다는 정보를 얻어냈다. 결국 선생은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1932년 10월 선생은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 취조를 받은 뒤에 이른바 ‘치안유지법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32년 10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 기소ㆍ공판에 회부되었고, 같은 해 12월 24일 징역 2년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3년 4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는데, 이후 만성 위장병이 극심해지자 형무소 측은 선생을 11월 7일 보석 출감시켰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출옥한 선생은 끝내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광주 자택에서 치료를 받다가 1935년 10월 18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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