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국 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日帝)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평화 위에 세계 일가(一家)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 백정기 의사, 1933년 3월 17일 중국 침략의 주범 중 하나인 주중 일본공사 처형에 나서기 전 -
일찍이 부친을 여의었으나 성격이 활발하고 글읽기를 좋아하다
백정기(白貞基, 1896. 1. 19(음)~1934. 6. 5) 의사(義士)는 1896년 1월 19일(음) 전북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 농가(農家)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구파(鷗波), 자(字)는 용선(溶善)이며, 수원 백씨(水原白氏)이다. 어릴 때 엄친(嚴親)을 여의고 편모(偏母) 슬하에서 성장하는 등 어려운 가정환경과는 달리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활달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여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밤에는 독학(獨學)으로 공부를 하였으며 의리가 강하였다.
14세 전후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할 정도로 영특했으며 서도(書道)에 있어서도 상당한 천재적 소질을 발휘하였다. 또한 신학문을 배워 정치에 대한 식견(識見)도 높아 향리에서 일이 생길 때마다 그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곤 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어린 소년의 가슴에 항일의식이 싹트다
의사(義士)가 15세가 되던 1910년에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어린 소년의 가슴에는 울분과 굴욕감을 가져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일념(救國一念)이 싹트고 있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항일의식은 이미 10대 소년시절부터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며 일제를 타도하는 일에 신명(身命)을 바칠 것을 결심하게 하였다. 시대적 갈등과 마찰 속에서 스스로 고민에 빠지곤 했던 의사는 애국의 길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정읍(井邑)같은 시골에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서울에는 사람도 있고 문화도 있고 기댈 곳도 있고 싸울 상대도 있으니 상경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1919년 2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향리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선도(先導)하다
광무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毒殺)되었다는 소식에 이어 3․1독립만세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게 되자 서울에 있을 것이 아니라 시골에 내려가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외쳐 큰 일을 해보자는 결심을 하고 급히 귀향(歸鄕)하여 3개 마을을 누비면서 일제의 침략 사실을 진지하게 알리고 궐기할 것을 호소하여 3․1독립만세운동을 선도하였다. 그 해 8월 동지(同志) 4명과 함께 다시 상경하여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일제기관의 파괴, 방화와 침략원흉(侵略元兇)의 처단, 보급로(補給路) 차단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일경(日警)에 탐지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국외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수색,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안동(安東)(현 단동(丹東)역)에 도착하였다. 안동은 국내로 진입하는 교통의 요충지(要衝地)로서 시내 북감자(北坎子)에는 영국 국적(國籍)의 죠오지 엘 쇼우(Gorge L. Show)가 무역상 대리점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그 이륭양행(怡隆洋行) 2층에 임시정부(臨時政府) 교통부(交通部) 산하 안동 교통지부(交通支部)가 설치되어 있어 각종 정보의 수집, 교환, 연락 및 군자금(軍資金)을 모집하는 등 항일활동의 주요 활동무대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의사는 조오지 엘 쇼우를 찾아가 상담하고 그의 알선으로 봉천(奉天(현 심양(沈陽))에 갔으며, 그 곳에서 이강훈(李康勳)을 만나 후일(後日) <육삼정의거(六三亭義擧)>의 동지로서 첫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1920년 겨울 재차 서울에 들어와 군자금모집 활동을 하던 중 이듬해 초 수상히 여긴 일경(日警)의 불심검문(不審檢問)으로 피체(被逮)되어 서울 중부경찰서에 구금(拘禁)되었으나 광부(鑛夫)로 변성명(變姓名)하고 본적과 행적(行蹟)을 속이는 등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의사는 일제의 세력이 미치는 국내에서는 항일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시 신의주, 봉천(奉天)을 경유하여 1921년 말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당시 그 곳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이회영(李會榮)․유자명(柳子明)․이을규(李乙奎)․정화암(鄭華巖)․신채호(申采浩) 등과 자주 접촉하였다.
북경에서 신채호 등으로부터 무정부주의 영향을 받다
단재(丹齋) 신채호는 1923년에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발표하여 무지배, 무권력의 민족 자신의 역량으로 독립을 관철(貫徹)할 것을 촉구하고 아나키즘[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을 주창(主昌)하였는데 의사는 이때 이회영․신채호 등의 영향으로 무정부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농촌사회 건설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24년 의사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일본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의 대파괴계획(大破壞計劃)을 수립, 추진하였으나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과 소위 불령사건(不逞事件)으로 인하여 일본인 폭도들의 조선인에 대한 대학살(大虐殺) 만행으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동년 말 북경으로 다시 돌아왔다.
백정기 의사의 옛집과 '구파백정기의사순국기념비(鷗波白貞基義士殉國紀念碑)' 사진(전북 정읍 소재).
옛 집은 본래 초가였던 것을 함석으로 보수한 것이다.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정의공보>를 간행하다
북경에 도착한 의사는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이론과 방법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되었다. 1924년 4월에 의사는 이회영․이정규․이을규․정화암․유자명 등과 함께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하여 기관지로써 <정의공보(正義公報)>를 순간(旬刊, 열흘에 한번 간행)으로 발행하였다. 이 기관지는 아나키즘에 기초하여 독립운동의 방향을 나름대로 제시하였으나 자금난으로 휴간(休刊)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4년 9월 정화암 등과 함께 일본관헌의 탄압을 피해 상해에 가서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에 들어가 폭탄제조기술을 익혔으며, 1925년 5월 30일 총파업이 일어나자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더불어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 만 명 단위의 대노동자조합(大勞動者組合)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27년 여름 중국 동지 진망산(秦望山)․양용광(梁龍光)․진춘배(陳春培) 등의 제청으로 농촌의 자치운동을 한․중․일 3개국 동지들의 합작으로 일으키게 되었다. 복건성(福建省) 천주시(泉州市)에 민단훈련소(民團訓練所 : 단장, 중국인 진망산(秦望山))가 설립되고 항일독립투사가 이곳에서 양성되었다. 의사는 이정규 형제와 정화암 등 동지들과 농민자위군(農民自衛軍)을 조직하여 농촌계몽과 조직화에 힘썼으며 후에 조직이 확대되어 3,500명 규모의 대오를 정비하고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동방무정부주의자동맹 결성시 참석하여 한․중 연합투쟁을 할 것을 호소하다
1928년 5월초에는 일본상품배격운동(排擊運動)을 지도하였고 5월말에는 남경(南京)에서 중국, 일본, 필리핀, 베트월남, 인도 등 7개 민족대표 120명이 모여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同盟)를 조직하였는데 의사는 한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한․중 양국이 연합하여 공동의 적인 일제를 섬멸할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의사는 이 동맹의 기관지인 <동방(東方)>의 편찬위원 중 1인으로 활약하던 끝에 과로로 병을 얻게 되었으며, 동지들의 권고와 강요에 못 이겨 북경 향산(香山)에서 반년 동안 정양(靜養)하였다. 여기에서 병세가 호전되자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1930년 의사는 상해에서 유자명․정화암․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창립하였다. 이 연맹은 일본 침략세력저지작전과 밀정(密偵) 섬멸작전을 그 임무로 하였다. 이 연맹은 중일전쟁(中日戰爭)때 두 개의 전지공작대(戰地工作隊)를 조직하였다. 일대(一隊)는 정화암․유기석(柳基石)․유자명․이강(李剛) 등에 의하여 학도병 귀순공작과 포로구출작전을 담당하였고, 다른 일대(一隊)는 나월환(羅月煥)․이하유(李何有) 등의 대원으로 이루어져 실전에 참전하였으며 후에 광복군 제2지대로 개편되었다.
항일구국연맹 조직하고, 민족을 반역한 친일 주구배들을 처단하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의사는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남화아나키스트연맹,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기간(基幹)으로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을 조직하고 그 기관지로서 <자유신문(自由新聞)>을 발행하여 서사(誓死) 항일투쟁을 선전 고취했으며 제1차 상해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나자 전화민(田華民)․왕아초(王亞樵, 중국)․진수방(陳樹芳, 대만) 동지 등 15인으로 파괴,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영어명으로는 블랙 테러리스트 파티(Black Terorist Party)라는 행동대를 조직하여 일제기관 파괴와 침략원흉의 처단을 계획하였다.
이들의 행동이 점점 활발해지자 일본 군경은 전력을 경주하여 그 근거를 뽑으려고 기도하였으나 1932년 10월 백 의사의 주도로 정화암․이달(李達) 등과 함께 밀고자로 지목되어 오던 이규서(李圭瑞)․연충열(延忠烈) 등 주구(走狗) 3명을 처단 하였다. 1933년 5월에는 오면직(吳冕稙)․엄순봉(嚴舜奉)․주열․안경근(安敬根)이 일본 영사관의 밀정으로 지탄받고 있던 이종홍(李鐘洪)을 처단하였으며 동년 8월에 변질자로 지목되어온 옥관빈(玉觀彬)을 처형하였다. 그리고 1935년 3월 25일에는 엄순봉과 이규호(李圭虎)․이규창(李圭昌)이 상해조선인거류민회(上海朝鮮人居留民會) 부회장과 고문(顧問)을 역임한 바 있는 친일파(親日派) 이용로(李容魯)를 처형하였다.
상해 육삼정(六三亭)에서 침략 주구인 주중 일본공사 등을 처단하기로 결정
1933년 3월 일본 육군대신 황목정부(荒木貞夫)를 중심한 일본 군벌(軍閥)은 주중공사(駐中公使) 유길명(有吉明)에게 4천만원(2천만달러)란 거액(巨額)을 주어 열하성(熱河省)을 근거로 반만항일유격전(反滿抗日遊擊戰)을 전개하고 있는 의용군과 한족(韓族)의 항일독립군을 공격하고 탄압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협력하기 이해 국민정부(國民政府)에 기생(寄生)해 있는 부일분자(附日分子)와 고급 장성(將星)을 매수(買收)하려는 비밀회의가 상해 공동조계(共同租界)에 있는 육삼정이란 고급 요리점에서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흑색공포단은 1933년 3월 5일 의사의 숙소인 상해 프랑스조계 복이리로(福履理路) 정원방(亭元坊)에서 정화암․원심창(元心昌)․엄순봉․이강훈․이달․이수현․정해리․오세민(吳世民)(일본인 : 본명, 야다베(失田夫))이 회합(會合)하여 시국을 분석하고 그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육삼정을 습격하여 유길명 등을 처단하기로 결정하였다. 모두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기회가 독립운동자의 죽음의 장소라 생각하여 이 값있는 일을 서로 담당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날 회합에서는 거사를 담당할 사람을 결정하지 못하고 이튿날 다시 모여 추첨으로 두 사람이 결정되니 의사와 이강훈이 뽑혔다.
폭탄 2발, 권총 2자루, 탄환 20발, 수류탄 1개로 만반의 처형 준비를 갖춰가다
원심창은 참모로서 적의 동정과 현장의 조사 등을 맡기로 하고 유자명․오면직․정화암 등은 거사일인 17일까지 은밀히 만전의 준비를 서둘렀다. 무기는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백천대장(白川大將) 등을 처단했을 때 사용한 것과 똑같은 대형폭탄을 선택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김구(金九) 주석(主席)이 상해를 떠나 가흥(嘉興)으로 이동할 때 오면직에게 맡긴 폭탄 2개를 비롯하여 중국인 왕아초(王亞樵)와 화균실(華均實)로부터 권총 2자루와 탄환 20발 그리고 수류탄도 1개 더 준비하였다. 그리고 백 의사와 이강훈은 폭탄투척 연습으로 거사에 실수가 없도록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하였다. 일본군 수뇌(首腦)들이 육삼정에서 회합을 갖는 것은 3월 17일 오후 9시부터 11시까지이므로 이 시간대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거사일인 3월 17일 오후 6시 남시(南市) 진진다관(津津茶館)에서 차를 마신 두 의사는 유자명․오면직과 “죽어 저승에서 만나자”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이규호가 불러온 서역(西域) 자동차회사의 차에 의사와 이강훈․원심창 등 5명이 함께 타고 조계(租界)를 넘어 동일 오후 8시경에 현장 부근에서 내렸다. 의사는 육삼정 건너 무창로(武昌路) 271호 중국요리점인 송강춘(松江春) 2층으로 올라 가고 이강훈은 중국 옷에 과모(瓜帽)를 쓰고 대형폭탄을 옆에 낀 채 절름발이로 가장하여 절둑거리며 형세를 보니 주위의 감시가 철옹성 같았다. 의사는 자세한 현장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일본인을 만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일본인은 육삼정 부근에서 유길명(有吉明) 공사가 출발하는 것을 감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나키스트라고 떠들어 대던 그 일인(日人)을 믿은 것이 실수였다.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상해의 국제테러단>(동아일보 1933년 11월 11일자 기사 사본)
백정기 의사 등의 의거 및 취조와 공판소식을 전하고 있으며 우측은 같은 날 실린 백정기 의사의 사진.
믿었던 일본인의 기밀누설로 처형 실행 직전에 체포되다
계획이 사전에 누설된 것도 모르고 일인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는 전과자로서 일본 영사관에서 그가 백정기 등과 접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밀정으로 이용하였다. 일본측은 백정기 등 동지들을 체포하려고 그를 설득하여 과거의 죄과를 덮어주고 경제적인 편의를 제공해 주기로 하고 계획적인 음모를 꾸며 그를 통하여 유길명 공사 등 살해계획을 알아낸 다음 육삼정 부근의 인력거꾼에서부터 식당의 종업원까지 형사로 변장시켜 사전에 배치하였다.
동지들은 갑자기 일본 영사관의 좌백(佐伯)과 등정(藤井) 경무보(警務補) 등 10여 명이 갑자기 덮쳐 손 쓸 새도 없이 붙잡혀 거사를 이루지 못했다. 비록 거사 직전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이 <육삼정 사건>은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략음모를 폭로시켜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에 큰 영향을 주어 항일전쟁을 하게끔 유도했고, 한국인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사상 큰 사건이라고 하겠다.
일본 장기(長崎.나가사키)로 압송된 후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로 시달리던중 순국하다
의사는 곧 일본 장기(나가사키)로 압송되었다. 이 의거가 있은 후 양일동(梁一東)이 일본으로 건너가 이 사실을 일본에 있는 동지들에게 알리고 최학주(崔學柱)․정찬진(鄭贊鎭)․정철(鄭哲)․홍성환(洪性煥) 등과 협력하여 압송지를 알아내고 구원운동(救援運動) 비용을 마련하였다. 홍성환이 장기까지 찾아가 백 의사 등 3인을 면회하고 변호사를 선정하는 등 구원운동을 폈으나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일본 장기법원(長崎法院)에서 백 의사와 원심창은 무기징역을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언도 받았으며, 의사는 옥고 중 1934년 6월 5일 천추(千秋)의 한을 가슴에 품고 향년 39세로 옥중(獄中)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의사의 유해(遺骸)는 적지(敵地) 일본에 묻혔다가 조국광복 후 1년 만인 1946년 7월 6일 이봉창(李奉昌)․윤봉길 두 의사의 유해와 함게 조국에 봉환(奉還)되어 국민장(國民葬)으로 천묘의식(遷墓儀式)을 치룬 뒤 효창원(孝昌園)에 안장(安葬)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인물과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명하(趙明河,1905. 4. 8(음력)~1928. 10. 10) (0) | 2015.07.30 |
---|---|
노백린(盧伯麟,1875. 1. 10~1926. 1. 22) (0) | 2015.07.30 |
김창숙((金昌淑, 1879. 7. 10∼1962. 5. 10) (0) | 2015.07.27 |
이동녕(李東寧, 1869.2.17~1940. 3. 13) (0) | 2015.07.27 |
박은식(朴殷植, 1859. 9. 30~1925. 11. 1) (0) | 2015.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