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김창숙((金昌淑, 1879. 7. 10∼1962. 5. 10)

문성식 2015. 7. 27. 11:36

김창숙 “죽어도 일제에 굴복은 없다.” 조선 선비의 불굴의 지조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대의에 모순되는 일이다.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결코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
- 김창숙 선생, 대구형무소 옥중투쟁 중에 (1928년) -

정통 유학자 집안의 후손. “성현이 세상을 구제한 뜻을 모르면 가짜 선비다.”

김창숙 이미지 1

김창숙((金昌淑, 1879. 7. 10∼1962. 5. 10)은 1879년 7월 10일 경북 성주군(星州郡) 대가면(大家面) 칠봉동(七峰洞)에서 호림(護林)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조선 중기의 명현인 동강(東岡) 김우옹의 후손이다. 자(字)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직강(直岡), 혹은 일제에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여 지체 부자유의 앉은뱅이가 되었으므로 자칭 벽옹(躄翁·앉은뱅이 노인)이란 별호를 쓰기도 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정은석(鄭恩錫)에게 한학을 배웠고, 18세 이후에는 당대의 이름난 학자인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장석영(張錫英) 등을 찾아 다니며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하지만 당시 나라 안팎의 정세는 선생을 학문의 길에 놓아두지 않았다.

당시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획득을 위해 동아시아 제국(諸國)들을 침략하면서 인류의 양심인 정의(正義)와 인도주의(人道主義)는 무너지고 양육강식의 제국주의 논리만이 판치고 있던 시기였다.

이 같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틈바구니에서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이제 막 자본주의체제를 갖춘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를 흉내 내 우리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화하기에 혈안이었다. 당시 우리 민족은 한편으로는 일제를 비롯한 외세의 침략과 간섭을 극복하여 민족 자주성을 확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봉건적 악습을 타파하고 개혁하여 사회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중(二重)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 학자들이 한갓 성리(性理)의 오묘한 뜻만 고담준론(高談峻論)할 뿐 시급한 구국책을 강구하지 않음을 선생은 병폐로 생각하여 탄식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성인이 세상을 구제한 뜻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가짜 선비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이따위 가짜 선비들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를 논하는 데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민족 문제와 동떨어져 있는 선비가 아니라 그 문제 해결에 솔선수범하는 선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궐 앞에 나아가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고 상소

선생의 이러한 신념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체결을 계기로 격렬하게 표출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됨에 따라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광무황제의 통치권이 현저히 손상되는 망국적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때 선생은 스승인 이승희를 따라 상경하여 대궐 앞에 나아가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려, 조약 체결에 적극 동조한 이완용(李完用)·이지용(李址鎔)·박제순(朴齊純)·이근택(李根澤)·권중현(權重顯) 등 역신(逆臣)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선생은 통곡하며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뛰어 들었다.

“문 닫고 글만 읽을 때가 아니다.” 국채 보상 운동과 국력 자강 운동에 뛰어들어

특히 1906년 말부터 “우리 대한제국은 1,300만원의 국채를 지고 있는데 이를 보상할 국고가 없으므로 2천만 국민이 3개월 간 흡연(吸煙)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보상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자”고 하는 취지로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시작되자, 선생은 전국단연동맹회(全國斷煙同盟會) 성주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것마저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자, 선생은 성주 지방에서 모은 단연금을 기금으로 자신의 선조인 동강(東岡) 선생을 모신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사립 성명(星明)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하고, 이어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이 체결되면서 망국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강제 해산되어 민족 자위력이 박탈되고, 정부 각부의 한국인 대신(大臣) 아래 일본인 차관이 앉아 제멋대로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등 우리 나라는 식민지나 다름없는 형편이었다. 이 같은 위기상황 속에서 해산 군인들과 일반 민중들이 대거 의병투쟁에 참여하였고 장기적인 국권 회복운동 전략으로 진행되고 있던 구국계몽운동 역시 한층 고조되어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일으키기에 우리 민족은 온갖 정열을 바쳐 갔다.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 단체 가운데는 1907년 11월 결성된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있었다. 이 단체는 “나라의 독립은 오직 자강(自强)의 여하(如何)에 있다”고 하면서 국력 배양운동을 전개하다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계열의 인사들이 조직한 것이었다. 김가진(金嘉鎭)이 회장, 오세창(吳世昌)이 부회장을 맡고 있던 이 단체는 그 전신인 대한자강회의 사업을 계승하여 대한협회회보와 대한협회월보를 발행하고,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여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경북 성주 소재 김창숙 선생 생가

선생은 당시 “나라가 곧 망하겠다. 지금 문을 닫고 글만 읽을 때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1908년 대한협회의 지부를 성주 향사당(鄕射堂)에 설치하고, 그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이때 선생은, “우리들이 이 모임을 만든 것은 장차 조국을 구하고자 함입니다. 조국을 구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구습의 혁파부터 시작해야 하며, 구습을 혁파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계급타파로부터 시작하여야 하며 계급을 타파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우리의 이 모임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며 봉건적 신분 질서의 청산과 그를 통한 전민족적 구국운동을 주장하였다. 이 같은 주장은 혁신적 유학자로서 선생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난 것으로, 이는 성리학적 신분 질서에 집착하고 있던 당시 유림들의 인식 전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은 자 또한 역적이다.” 매국노 규탄 성토문을 각 신문에 발표

특히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사주를 받아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선생은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라고 울분을 토로하면서 즉각 이들의 매국행위를 규탄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성주의 유림들을 모아 연명으로 일진회와 매국노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중추원(中樞院)에 제출하고, 또 각 신문 지상에 발표함으로써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일로 선생은 성주 주재 일본군 헌병분견소와 경찰주재소에 피체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고, 성토문의 취소를 강요 받았지만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10년 8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선생은 통분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여 술을 마시고 미친 듯이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학문을 닦으면서 서서히 우리 나라의 광복을 도모하되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곧 너의 나아갈 길이다”라고 하신 모친의 말씀을 듣고, 느낀 바 있어 이후 오직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에 의해 민족자결주의가 천명되고, 그 해 11월 11일 공식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면서 다음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졌다. 우리 민족은 이 같은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을 획득하고자 국내외에서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와중에 강제 퇴위되어 덕수궁에서 칩거 중이던 광무황제가 1919년 1월 21일 갑자기 붕어(崩御)하고, 나아가 일제에 의한 독살설까지 전파되자 우리 민족의 반일감정은 더욱 촉발되어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곧 이어 일어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은 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던 3·1독립선언 계획을 가속화시켜 갔다. 선생은 모친의 병환으로 상경을 미루다가 이 같은 독립선언 계획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고, 결국 3·1독립선언은 유교계 인사들이 빠진 채 천도교·기독교·불교계의 민족대표들만으로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경북 유림단 관련 기사(동아일보 1927년 2월 11일자 사본)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보장하라.” 유림이 작성한 파리장서(巴里長書), 파리강화회의 제출

우리 나라는 유교의 나라인데 유림이 민족대표에서 빠진 것을 선생은 치욕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선생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국 대표들에게 호소해서 국제 여론을 환기시켜 우리의 독립을 인정받도록 한다면 우리 유림도 독립운동의 선구가 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보고,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들어 보낼 계획을 추진하였다. 우선 선생은 스승이자 영남 유림의 영수(領袖)인 곽종석에게 알려 협조를 구하는 한편 파리장서의 작성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동지들을 파견하여 유림대표들의 지지와 동참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호서유림도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거의 같은 동기와 목적에서 장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려고 준비하는 중임을 알게 되어 양측은 공동으로 파리장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곽종석·김복한 및 선생 등 137명의 유림대표들의 연명으로, “한민족은 불행히도 그간 일제의 간악한 침략으로 인하여 현재는 노예적 상태에 있지만, 역사적 전통과 현실적 역량에 있어서 충분히 독립자존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인간 및 만물을 통한 독립생존의 원리에 비추고, 또 강화회의에서 실현코자 하는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한민족에 대해서도 자주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한 파리장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아울러 이를 선생으로 하여금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도록 결정하였다.

선생은 3월 23일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용산 역을 출발하여 중국 안동과 봉천을 거쳐 3월 27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파리장서를 영문으로 번역 인쇄하여 우편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송부하는 한편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냈다. 또한 한인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해외 각지에도 보냄으로써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 만방에 전파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정 후원하는 중국 인사들의 한국 독립후원회 조직

김창숙 선생이 사용한 부채 사진

이 시기 상해 독립운동계에는 3·1운동에서 표출되고 있는 민족 독립의 열기를 수렴하고,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지도 통괄하기 위한 임시정부 수립 논의가 전개되고 있었다. 선생 또한 이시영(李始榮)·신채호(申采浩)·이동녕(李東寧)·신규식(申圭植) 등과 임시정부 설립 문제를 논의한 뒤,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구성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경상북도 의원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공헌하였고, 나아가 교통위원회 위원으로서 활동하면서 안창호(安昌浩)를 도와 연통제(聯通制)를 실시하는데 협조하였다. 이후 선생은 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중국 국민당의 손문(孫文)을 비롯하여 오산(吳山)·서겸(徐謙)·장병린(張炳麟) 등과 교류하면서 한중 합작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설득하고, 이들과 함께 광주(廣州)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국독립후원회(韓國獨立後援會)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 청원한 사실 준열하게 비판하는 성토문 발표

1920년 8월 말 광주에서 다시 상해로 돌아온 선생은 중국 공교회(孔敎會) 회원인 임복성(林福成)의 자금 지원으로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창간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선전하고, 한중 양민의 혁명사상을 고취하여 갔다. 그리고 선생은 1921년 1월 북경으로 옮겨 와 신채호가 박숭병(朴崇秉)과 함께 발행하고 있던 천고(天鼓)라는 잡지의 편집을 도와주면서 국내에 사람을 보내 군자금을 모집했다. 특히 같은 해 4월 선생은 신채호·김원봉(金元鳳)·이극로(李克魯)·오성륜(吳成崙) 등과 함께 1919년 2월 이승만(李承晩)이 미국 윌슨에게 우리 나라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을 준열하게 규탄하는 이승만 성토문을 발표하여 절대 독립론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후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통할기관으로 만들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상해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의 개편 문제를 둘러싸고 기존의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하여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으로 하자는 개조론과 그것을 해체하고 새로운 독립운동 최고 통솔기관을 조직하자는 창조론으로 의견이 갈리어 서로 반목 갈등하는 모습을 노정하고 있었다. 이때 선생은 여러 차례 국민대표회의의 출석을 요청 받았고, 또한 창조파에 의해 국민의회 대의원으로 선임되기도 하였지만 독립운동세력의 분열을 우려하여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선생이 예견한 대로 국민대표회의는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독립운동 세력의 혼란과 분열만 가중시킨 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국민들의 독립 정신에 혼을 불어넣자.” 의열단원 나석주를 식민수탈기관 파괴에 투입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선생은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李會榮) 등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 동삼성 일대에 재만 한인동포들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이곳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으로 양성한 뒤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전쟁방략을 추진하였다. 우선 선생은 중국 참의원 의원 이몽경(李夢庚)의 주선으로 풍옥상(馮玉祥) 장군이 관할하고 있던 만몽(滿蒙) 접경지의 황무지 3만 정보에 대하여 사용허가를 얻었다. 그런 다음 선생은 개간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1925년 8월 김화식(金華植)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여 경기·충청·경상 지역의 유림과 부호들을 대상으로 약 8개월 동안 비밀리에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선생은 1926년 3월 16일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되돌아 왔다.

국내외 독립운동이 매우 침체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선생은 김구(金九)·이동녕·유자명(柳子明)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국내의 정세를 설명하면서, “인심이 이미 죽었으니 만약 비상수단을 써서 진작시키지 않으면 우리 해외에 있는 사람들 또한 장차 돌아갈 곳이 없어 궁박하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오. 청년 결사대들에게 자금을 주어 무기를 가지고 국내에 들어가 왜정기관을 파괴하고 친일 부호를 박멸하여 한번 국민의 의기를 고취시켜 봅시다”라고 제안하였다. 이에 김구와 유자명은 적극 동조하면서 행동대원으로 의열단원인 나석주(羅錫疇)를 추천하였다.

선생은 국내에서 가져온 자금을 유자명에게 주어 폭탄과 권총 등 무기를 구입하게 한 뒤, 천진에서 나석주를 만나 이를 전해주면서 국내에 잠입하여 거사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나석주는 중국인으로 가장하여 위해위(威海衛, 웨이하이)에서 배편으로 1926년 12월 26일 인천에 도착하였고, 이튿날 서울에 잠입하여 식민수탈기관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투탄하고, 권총을 발사하였다. 일본인 3명이 사살되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마지막 남은 한 발의 탄환으로 자결, 산화했다.

김창숙 선생의 시(詩)와 평(評). 김창숙 선생이 일원정(一源亭)에서 고향을 기리며, 의협심을 노래한 시.
그리고 이에 대한 김동한의 평이 실린 글. 창작 연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상해서 체포돼 국내로 압송, 참혹한 고문 당해. “그러나 죽어도 너희들에게는 말하지 않는다.”

나석주를 국내로 잠입시킨 뒤 선생은 상해에서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지내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을 추진하였고, 1926년 12월 27일에는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건에도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갔다. 그러던 중 신병으로 상해 공동조계의 영국인 병원 공제의원(共濟醫院)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1927년 5월 1일 이 같은 사실을 탐지한 일경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일본 나카사키(長崎)를 거쳐 국내로 압송되어 대구경찰서와 형무소에 감금되어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너희들이 고문을 해서 정보를 얻어 내려느냐. 나는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고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불요불굴(不搖不屈)의 독립의지로 버텼다.

김창숙 선생의 가족 사진(1962.3.1).

“본적이 어디냐”는 일본 재판장에게 “나라가 없는데 본적(本籍)이 어디 있는가.”

특히 선생은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의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라고 하면서 변호사의 변론을 거부하였다. 나아가 선생은 일본인 재판장이 본적이 어디냐고 물으면 “없다”고 대답하고, 왜 없냐고 물으면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어디 있냐”고 되묻는 등 재판 자체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8년 12월 징역 14년을 받고 공소도 거부한 채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던 중 일경의 고문과 장기간의 수형생활로 다리를 못쓰게 되고, 병이 위중하여 1934년 9월 형징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창씨 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의 남한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7일 피체되어 왜관(倭館)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 전국 유림 결속시켜 유도회(儒道會) 조직하고, 성균관대학 세워

광복 이후 선생은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비상국민회의 최고 민중지도자, 민주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반탁 민주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1946년에는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를 조직하면서 그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아울러 같은 해 선생은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을 재건하여 학장·총장을 역임하면서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후진양성에 이바지하다가 1962년 5월 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84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발행2011.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