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완주군 소양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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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2010년 2월 15일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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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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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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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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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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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채에 걸린 편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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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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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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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및 연혁〕
위봉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먼저 1799년 전국의 사찰에 대해 기록한 『범우고(梵宇攷)』에는 고려 초에 최용갑(崔龍甲)이라는 인물이 처음 암자를 세운 뒤 나옹스님이 중창한 것이라 하였다. 수록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봉사는'圍鳳寺'라고도 한다. 속전에 의하면 산의 형세가 사방이 둘러싸여 있고, 처음 창건할 때 마침 봉황새의 이적(異蹟)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고려 초 전주의 최용갑(崔龍甲)이 명산을 유람하다가 이 터를 얻고 처음 암자를 건립하였다. 이후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이곳을 지나다가 지형의 아름다움에 탄복하였으며, 석잠(釋岑) 스님이 구조를 고쳤다가 승숭(僧崇) 스님이 큰 사찰로 만들었다. 산내에는 북암(北唵)ㆍ달마암(撻摩唵)ㆍ승가암(僧伽唵)ㆍ익수암(益水唵)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지정년간(至正年間, 1341~1367)에 창건된 것들이다.
그러나 현재 사찰 내에 남아 있는 「극락전중건기(極樂殿重建記)」에 의하면, 신라 말에 최용각(崔龍角)이라는 사람이 산천을 섭렵하다가 3마리의 봉황이 날아든 흔적을 발견하고 이곳에 절을 지어 위봉사라 칭했다고 한다.
창건에 관한 또 한 가지 설은 신라시대인 604년(진평왕 26) 서암(瑞巖) 스님에 의해 세워졌다는 기록이다.
창건에 관한 설이 분분한 가운데 늦어도 고려 초에는 위봉사가 창건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후 1359년(공민왕 8)에 나옹스님이 대규모로 중창하여 전사(殿舍)가 28채, 외암(外唵)이 10여 개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이미 고려 말부터 거찰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는데, 현재 보광명전 앞에 있는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이 무렵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나옹스님은 고려 후기 불교를 이끌어간 위대한 고승으로, 이러한 위상 때문인지 「추줄산위봉사사적사병서(崷崒山威寺事蹟詞幷序)」에는 나옹을 창건주라 기록하였다. 무경자수(無竟子秀) 스님이 지은 『무경집(無竟集)』에 수록된 이 병서(幷序) 역시 절의 역사와 관련된 자료인데, 이상의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위봉사와 나옹화상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최용갑' 또는최용각이라고 표기되는 인물은 위봉사 창건시기의 시주자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뒤 최용각의 후손인 최흥남(崔興男)이 1466년(세조 12) 진도군수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선조의 유적을 살펴보러 위봉사에 들렀다가, 선석(善釋)ㆍ석잠(釋岑) 대사로 하여금 절을 중수하도록 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위봉사는 14ㆍ15세기의 두 번에 걸쳐 중창 및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1359년(공민왕 8)에는 나옹(懶翁)이 이 절의 주위가 처음 보는 경승지임을 알고 크게 중창하였는데, 당시의 규모는 28동이었고 암자도 10동이나 되는 대가람이었다. 1911년에는 선교31본산(禪敎三十一本山)의 하나로 전라북도 일원의 46개 사찰을 관할하였으나,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하여 지금은 그 규모가 매우 축소되었다.
이후 1675년(숙종 1년)에 전주부윤(全州府尹) 권대재(權大載)이 사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위봉산성(威鳳山城)이 축조하고,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봉안되어 있는 이태조(李太祖)의 영정을 유사시에 이안하기 위한 6칸 규모의 행궁(行宮)과 다른 부속건물 등을 산성 내에 설립하였다. 이때 성밖의 태조암(太祖庵)도 함께 설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처럼 태조의 영정을 보관하기 위한 목적으로 위봉산성을 축조한 것은 17세기 이후 위봉사의 성격이 성곽 수호의 임무도 띄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17세의 사찰기록을 살펴보면 보광명전 암막새에 새겨진 명문(銘文)이 전하여 1673년(현종 14)에 번와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1675년(숙종 1)에 동종(銅鐘)이 조성되고 1687년(숙종 13)의 벽허당대사(碧虛堂大師)의 부도 등이 세워졌다. 1838년(헌종 4)에 보광명전을 중수하였고, 1868년(고종 5)에 포련대사(布蓮大師)가 60여 칸에 이르는 불전을 중수하여 가장 큰 규모의 중수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때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는 전반적인 중수와 함께, 건물에 수장될 대부분의 성보(聖寶)도 함께 조성ㆍ봉안되었다.
19세기에 60여 칸의 위용을 자랑하던 위봉사는 20세기 초반까지도 그 명성이 이어져, 1911년 조선총독부의 30본말사법 제정에 따라 본산의 하나로 지정되면서 전북 일원의 50여 사찰을 관할하기도 했으나, 광복 후 6.25를 거치면서 급속히 퇴락하였다.
그러나 폐사 직전이던 위봉사는 1988년 법중(法中)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10년에 걸친 대불사를 시작하여, 보광명전ㆍ관음전을 보수하고 10여 동 100여 칸의 건물에 60여 명의 대중이 머무는 옛 대찰의 면모를 회복하였다.
1990년에 위봉선원을 짓고 삼성각을 보수하였다. 1991년에는 나한전을 중건하고 일주문을 세웠다. 1994년에는 극락전을 건립하여 아미타여래상을 봉안하였으며, 2000년에는 범종각을 지었다.
〔당우 및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보광명전(普光明殿)과 극락전·관음전·나한전·삼성각·위봉선원·나월당(羅月堂)·일주문·요사채가 있다.
세조 때 포효대사가 지은 〈보광명전현판기〉에는 이 절의 당우 수가 32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 중 보광명전은 보물 제608호로서, 내부에는 중앙에 개금(改金)한 석가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좌우에 여러 구의 입불(立佛)이 있는데, 이 중에는 육환장을 든 지장보살이 있다.
보광명전 내부의 천개(天蓋)가 정교하고, 거대한 후불탱화가 있으며, 뒷벽에는 문이 장치되어 있는데 열어보면 높이 3m 정도의 인자하고 아름다운 백의관음상(白衣觀音像)이 있다. 이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의장(意匠)이다.
또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요사채는 조선 말에 건축한 것으로 익공식아자형(翼工式亞字形)이다.
이 밖에도 나옹이 중건할 때 축조한 삼층석탑이 있고, 절에서 위봉폭포로 가는 300m 지점에 벽허당(碧虛堂) 등의 부도(浮屠) 4기가 있다.
지정문화재 목록 및 해설
〔가람배치〕
추줄산 남쪽기슭에 자리한 위봉사는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본산으로서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6.25를 겪으면서 무인지경이 되도록 퇴락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시피 하다가 1990년대 들어 현재의 모습으로 가람이 일신되었다.
사역(寺域)은 보광명전을 중심으로 정면에 봉서루가 자리하고 있으며, 봉서루 밑으로 천왕문과 일주문이 나란히 줄지어 있고 봉서루 동쪽에는 범종각이 있다. 보광명전의 동쪽으로는 나한전과 ㅁ자 구조인 극락전이 있고, 서쪽으로 工자 구조의 관음전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보광명전 뒤쪽으로는 높은 축대 위에 위봉선원이 남향하고 있으며, 선원의 서쪽에도 역시 삼성각이 남향하고 있다.
〔사찰풍경〕
위봉사는 고려후기의 불교를 이끌어간 나옹(懶翁) 스님이 머무르며 거찰의 면모를 일구어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 유사시에 왕실의 영정을 보관하고자 사찰 주위에 위봉산성을 축조하였던 17세기에는 성곽 수호의 임무까지 띄게 되어, 동학 농민혁명 당시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던 태조의 영정을 이곳으로 피난시켜 수호하기도 했으니 그 위세는 대단하였을 것이다.
근세 초까지 이 지역을 대표하는 큰 사찰로서, 1911년 조선총독부가 모든 사찰을 30본말사로 구획할 때 위봉사는 전북 일원의 50여 사찰을 관할하는 본사(本寺)의 위상을 갖추고 있을 정도였다. 또한 명강사와 무수히 많은 인재를 배출해온 강원(講院)으로서 사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으면서 퇴락하였다가 1988년 주지 법중(法中) 스님의 원력으로 10여 간의 대정비에 매진함으로써 오늘날 전북을 대표하는 비구니 선원으로 일신하였다. 현재 50여 명의 비구니 스님이 수행하며 포교의 전당으로 도량을 일구어가고 있다.
〔설 화〕
범으로 둔갑한 효자이야기
옛적 운장산(雲長山) 기슭에 효심이 지극한 김만수(金萬壽)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사십 고개를 넘어선 그는 환갑이 지난 홀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두 남매를 거느리며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낮이면 아내와 함께 땀 흘려 일하고 밤이면 호롱불을 밝히고 책을 읽는데 시간가는 줄 모르는 어엿한 선비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서방에게는 한 가지 커다란 고민이 있었다. 늙으신 어머니가 유난히도 고기를 좋아하여 밥상에 고기반찬이 오르지 않으면 숟갈을 들 생각도 않는 것이었다. 늙으면 어린애처럼 된다던가, 환갑이 지난 뒤부터 식성은 더욱 까다로워져서 고기반찬이 없으면 투정을 부리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위봉사에 도사 스님 한 분이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김서방은 "옳다, 그 분에게 가서 상의하면 좋은 방법을 일러 주시겠지" 라고 무릎을 쳤다.
다음날 아침 김서방은 새벽밥을 먹고 수 십리 고갯길을 단숨에 달려가, 스님을 뵙고 자초지종 사정얘기를 했다. 김서방의 얘기를 듣고 한참 동안 묵묵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스님은 "내 그대의 효성에 감복해서 이 책을 주노라. 책에 쓰인 주문을 읽으면 능히 둔갑을 할 수 있느니라" 하고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책을 사용할 수 있는 자세한 방법까지도 일러주었다.
스님에게 수십 번 감사의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김서방은, 식구들이 깊이 잠들자 부엌에 들어가 등잔불을 켜 놓고 책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김서방은 사나운 범의 모습으로 변모했고, 둔갑한 김서방은 집을 뛰쳐나가 삼경(三更)이 지난 뒤 커다란 산돼지 한 마리를 물고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마당에서 산돼지를 발견한 아내가 깜짝 놀라 김서방을 깨웠다. 김서방은 엉겹결에 산아 놓아둔 덫에 산돼지가 걸렸기에 새벽에 옮겨 놓았다고 둘러대었다. 아내는 미심쩍은 점이 있었지만 횡재한 산돼지가 대견하기만 해서 동네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열고, 며칠간 어머니에게 배부르도록 고기봉양을 해드렸다.
그러나 고기가 떨어지자 김서방은 또 다시 범으로 둔갑해서 산짐승을 잡아와야 했다. 이렇게 하기를 몇 차례, 아무래도 의심을 풀 수 없게 된 아내는 어느 날 밤 잠든 체하고 남편의 거동을 살폈다. 밤이 깊어지자 김서방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주문을 외우고 범으로 둔갑하여 쏜살같이 산으로 달려나갔다.
"내가 범 남편과 살다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와들와들 떨며 어쩔 줄 모르던 아내는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남편이 처마 끝에 꽂고 간 주문 책을 꺼내어 불에 태워버렸다.
"원수 같은 이 놈의 책!"
집에서 일어난 일을 알 까닭이 없는 효자 범은 짐승을 잡아서 돌아와 보니 책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안타깝게 처마를 뒤지는 남편 범을 보고, 아내는 보다 못해 손짓으로 불태워 버렸다는 시늉을 했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 범은 펄펄 날뛰다가 날이 밝아오자 눈물을 쏟으며 산으로 돌아갔다.
그제서야 남편을 잃어버리게 된 것을 알게 된 아내는 울고 불며 후회한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도 며느리로부터 아들의 사연을 듣고 사흘 동안 대성통곡을 했다. 자신의 못된 식성이 외아들을 돌아오지 못할 길로 보냈다며 피맺힌 넋두리를 했지만 이 역시 부질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이제 마지막 한 길, 위봉사에 가서 아들이 다시 사람이 되도록 불공을 드리는 수밖에 없다고 깨달았다. 그리고는 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고 3년 동안을 하루같이 지성을 다해 천일기도를 드렸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효자 범은 때가 되면 잊지 않고 산짐승을 날라다 놓고는 사라졌다. 아내는 그때마다 고기를 마을사람들에게 고루 나눠주었고, 마을에는 큰 일이 생겨도 고기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고마운 나머지 마을사람들은 김서방네 농사를 모두 지어주고 ‘효자 범’ 이라고 부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김서방을 칭송했다.
그 사이 천일기도를 끝낸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며느리와 함께 범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사흘이 지나자 범은 또 짐승을 물고 나타났다. 어머니는 등잔불을 높이고 위봉사의 스님이 준 두루마리를 펼쳐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주문을 끝까지 외우고 두루마리를 불사르자 순간 범은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는 김서방이 서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네사람들도 큰 잔치를 벌이며 함께 기뻐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어, 임금은 김서방 내외에게 큰상을 내리고 모든 백성이 길이 본받도록 했다고 한다.
교통안내
호남고속도로 익산IC - 799번 지방도로 7.8km - 봉동로터리 - 직진(전주방면 17번국도 로 7.6km) - 용진면소재지 - 12번군도로 - 명덕교지나 좌회전 26번 국도진입 후진안방면 - 송광사 - 위봉사
현지교통
전주시외터미널에서 806번버스(위봉마을행)운행/배차간격 1일5회/소요시간 70분/ 하차정류장은 위봉산성/승차위치 모래내시장(고속터미널에서 15분거리)
주변관광지
입 장 료
주차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