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56.jpg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의 동쪽에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9.3m, 높이 7.6m인 이 왕릉(王陵)의 호석(護石)은 무열왕릉(武烈王陵) 형식에서 한단계 발전한 모습이다.

봉토의 아래에 벽돌 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들을 오단(五段) 정도 돌려쌓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덮은 호석(護石)에 단면 사각형으로 가공한 석재를 수십개 돌려 받쳐주고 있다. 이와 같은 호석(護石) 구조는 무열왕릉(武烈王陵) 형식에서 성덕왕릉(聖德王陵) 형식으로 발전하여 가는 중간 형식이다. 호석 받침돌 가운데 남쪽을 향하고 있는 석재에서 '문(門)'이라고 음각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뜻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호석 밖에 난간(欄干) 장식이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등은 보이지 않으며, 그의 석사자(石獅子)·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의 배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왕릉(王陵)의 호석은 일부가 땅 속에 묻혀 있었으나 1970년대에 원형을 복원하고 철책을 둘러서 보호하고 있다. 왕릉(王陵)의 동쪽에는 석상(石床)이 있는데 성덕왕릉(聖德王陵)의 석상에 비해 비교적 얕고, 석재도 고르지 못하여 원래의 석상인지 의심스럽다.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재위 681-692)은 본명이 김정명(金政明)(혹은 김명지(金明之))이며,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장자(長子)이다. 재위기간 동안 삼국통일 이후의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정비하는데 주력하였으며, 685년 구주(九州)를 완전히 정비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92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능(陵)은 낭산(浪山)의 남쪽 방향에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망덕사(亡德寺) 동쪽에 있다고 한 효소왕릉(孝昭王陵)과 그 위치가 부합되므로 이 능(陵)은 효소왕릉(孝昭王陵)이며, 신문왕릉(神文王陵)은 낭산(浪山) 동쪽인 황복사지(皇福寺址) 아래쪽에 십이지석(十二支石)이 남아 있는 폐왕릉(廢王陵)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