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58.jpg 신문왕릉(神文王陵)의 동쪽 얕은 구릉상에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1.2m, 높이 5m이다. 봉분밑에 호석(護石)의 자연석 받침돌 몇 개가 보이고 있어 무열왕릉(武烈王陵)과 같은 형식의 호석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외의 장식물은 하나도 없다.

신라 제52대 효공왕(孝恭王)(재위(在位) 897-912)은 본명이 김요(金嶢)이고, 헌강왕(憲康王)의 서자(庶子)이다. 재위기간은 국정이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며,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과 후고구려(後高句麗)의 궁예(弓裔)에게 국토를 유린당하여 많은 국토를 빼앗겼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912년 왕(王)이 죽자 시호(諡號)를 효공(孝恭)이라 하고, 사자사(師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왕이 죽자 사자사(師子寺) 북쪽에서 화장(火葬)하여 그 유골을 모아 구지제(仇知堤)의 동산(東山) 옆에 묻었다고 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왕릉(王陵)의 남쪽에 사지(寺址)가 있어 사자사(師子寺)터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