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가지 동쪽에 있는 낭산(狼山)에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3.6m, 높이 6.8m이다. 봉분 밑에는 30-60㎝ 크기의 깬돌 2, 3단으로 호석(護石)을 둘렀고, 그 외부에 호석의 높이만한 크기의 돌을 기대어 받쳐놓아 무열왕릉과 같은 호석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나 난간(欄干) 구조물은 보이지 않고, 기타 장식물도 배치되지 않았다. 전면에 보이는 석상(石床)은 후대에 설치한 것이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在位) 632-647)은 본명이 김덕만(金德曼)이며 진평왕(眞平王)의 장녀(長女)로 신라 최초의 여왕(女王)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재위기간에는 당(唐)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정에 힘썼다. 634년 년호(年號)를 인평(仁平)으로 고쳤으며, 자장(慈藏)의 청에 의해 645년에 황룡사 구층탑(皇龍寺 九層塔)을 세우고, 분황사(芬皇寺)와 첨성대(瞻星臺)를 건립하는 등 문화발전에 힘썼다. 또한 김유신(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의 보필로 선정을 베풀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47년 1월에 왕(王)이 죽자 시호(諡號)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왕의 유언에 따라 낭산(浪山)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지기삼사(知幾三事)로 유명한 일화(逸話)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는 자신의 죽음에 관한 것으로 죽을 날을 미리 예언하고 자신이 죽으면 이천(利天) 가운데 묻어달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그곳이 어딘지 몰라 물으니 왕이 낭산(浪山) 남쪽이라고 하였다. 예언한 날에 왕이 돌아가자 예언대로 낭산(浪山) 남쪽에 장사지냈다. 문무왕(文武王) 때에 이르러 능(陵) 아래쪽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으니 불경(佛經)에 사천왕(四天王) 위에 이천(利天)이 있다고 한 것과 일치되어 왕(王)의 영성(靈聖)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