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27.jpg 조선왕조(朝鮮王朝) 창업주(創業主) 제1대(第1代) 태조대왕(太祖大王)의 건원릉(健元陵)을 위시하여 제5대(第5代) 문종대왕(文宗大王)과 동비(同妃) 현덕왕후(顯德王后)의 현릉(顯陵), 제14대(第14代) 선조대왕(宣祖大王)과 동원비(同元妃) 의인왕후(懿仁王后), 동계비(同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목릉(穆陵), 제16대(第16代) 인조대왕(仁祖大王)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의 휘릉(徽陵), 제18대(第18代) 현종대왕(顯宗大王)과 동비(同妃)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숭릉(崇陵), 제20대(第20代) 경종대왕(景宗大王) 원비(元妃) 단의왕후(端懿王后)의 혜릉(惠陵), 제21대(第21代) 영조대왕(英祖大王)과 동계비(同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원릉(元陵), 추존(追尊) 문조대왕(文祖大王)과 동비(同妃)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수릉(綏陵), 제24대(第24代) 헌종대왕(憲宗大王)과 동비(同妃) 효현왕후(孝顯王后), 동계비(同繼妃) 효정왕후(孝定王后)의 경릉(景陵)의 구릉(九陵)이 양주(楊州) 검암산(儉巖山)의 동서(東西) 산세(山勢) 각지맥(各支脈)의 명당지원(明堂之原)에 봉릉(奉陵)되어 한 경역(境域)을 이루고 있으며 도성(都城)의 동방(東方)에 있는 구릉(九陵)이라 하여 동구릉(東九陵)이라 호칭(號稱)케 되었다.

0995.jpg 태종(太宗) 8년(1408년) 5월 태조(太祖)가 승하(昇遐)하여 한양(漢陽)에 가까운 곳으로 능기(陵基)를 찾던 중 좌의정(左議政) 하륜(河崙)의 천거(薦擧)로 택정(擇定)되고 이해 9월 9일 건원릉(健元陵)이 봉릉(奉陵)되었으며 조선왕조(朝鮮王朝) 최초(最初)의 왕릉(王陵)이 설릉(設陵)된 이래(以來) 40여년(餘年) 후 현릉(顯陵)이, 그 150여년(餘年) 후(後)에 목릉(穆陵)이, 다시 70여년(餘年)이 지나서 숭릉(崇陵), 그리고 100여년(餘年) 후(後)엔 원릉(元陵)이, 수릉(綏陵)이 철종(哲宗) 6년(1855년)에 양주(楊州) 용마산(龍馬山)에서의 천릉(遷陵)을 마지막으로 하여 동구릉(東九陵)으로 되었으니 건원릉(健元陵) 봉릉(奉陵) 이래(以來) 440여년간(餘年間)에 왕(王)과 비(妃) 17위(位)의 단릉(單陵) 3, 쌍릉(雙陵) 2, 삼연릉(三連陵) 1,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2, 합장릉(合葬陵) 1의 9릉(陵)이 조영(造營)되었다.

검암산(儉巖山)의 지세(地勢)는 북방(北方)의 산정(山頂)을 중심(中心)으로 하여 동서(東西)의 좌우(左右)로 남향(南向)의 완만(緩慢)한 산세(山勢)가 이어지며 산세말미부(山勢末尾部)는 다시 내향(內向)하여 아늑한 하나의 분지(盆地)를 이루는 형국(形局)이다. 동구릉(東九陵)의 9개(個) 각 릉(陵)은 이러한 분지형국(盆地形局)의 안에 각 지세(地勢)의 여러 지맥(支脈)의 언덕에 좌향(坐向)을 정하고 설릉(設陵)되었으니 각 릉(陵)의 분포(分布)를 보면 검암산(儉巖山) 전역(全域)의 중앙북방(中央北方)에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이 남면(南面)으로 설릉(設陵)되었고 건원릉(健元陵) 동편(東便)의 남향(南向)하는 산세(山勢)의 내측(內側) 지맥(支脈)의 언덕에 선조(宣祖)의 목릉(穆陵)이 그 다음 남측(南側) 아래로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이 있으며 다시 그 다음으로 문조(文祖)의 수릉(綏陵)이 있으니 동구릉(東九陵)에 설릉(設陵)된 최후(最後)의 릉(陵)이다. 중앙(中央)의 건원릉(健元陵) 서편(西便)으론 인조(仁祖) 계비(繼妃)의 휘릉(徽陵)이 있으며 그 다음으로 헌종(憲宗)의 경릉(景陵)이 있고 그 아래로 영조(英祖)의 원릉(元陵)에 이어 경종비(景宗妃)의 혜릉(惠陵)이, 그 다음 검암산(儉巖山) 서편(西便) 산세(山勢) 끝에 현종(顯宗)의 숭릉(崇陵)이 있다.

동구릉(東九陵)의 전체(全體) 지형(地形)에 의한 각(各) 릉(陵)의 설릉(設陵) 위치(位置)로 볼 때에 중앙북방(中央北方)의 건원릉(健元陵)을 위쪽 중심(中心)으로 하여 동편(東便)으로 3릉(陵)을, 서편(西便)으로 5릉(陵)을 거느린 형국(形局)이다. 각 릉(陵)에 대한 설릉(設陵) 경위(經緯)를 볼 때에 육지(陸地)를 여러 곳으로 찾았으나 길지(吉地)를 얻지못하고 마침내 동구릉(東九陵)의 동서(東西) 각(各) 능원(陵原)에 400여년(餘年)에 걸쳐 자리잡았음은 동구릉(東九陵)의 지세(地勢)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한 명당지지(明堂之地)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조선왕릉중(朝鮮王陵中) 한 경역내(境域內)에 왕릉군(王陵郡)을 이루고 있는 곳은 동구릉(東九陵)을 비롯하여 경기도(京畿道)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의 서오릉(西五陵)과 같은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의 서삼릉(西三陵)이 있으나 그 중 동구릉(東九陵)이 가장 많은 능(陵)이 봉안(奉安)되어 있으며 설릉(設陵) 순(順)으로 인조(仁祖) 계비(繼妃)의 휘릉대(徽陵代) 또는 영조(英祖)의 원릉대(元陵代)까지는 동오릉(東五陵) 또는 동칠릉(東七陵)이라고 불렸던 사실(事實)이 기록(記錄)에 전하며 철종(哲宗) 6년(1855년) 문조(文祖)의 수릉(綏陵)이 아홉번째로 천릉(遷陵)된 이후 60여년(餘年) 뒤 왕조(王朝)의 쇠망(衰亡)으로 동구릉(東九陵)이란 호칭(號稱)이 굳어졌다.

동구릉(東九陵)은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고 조선조(朝鮮朝)의 능제(陵制) 상설(象設)은 여조(麗朝)의 것을 의용(依用)하였던 것으로 여조(麗朝) 능(陵) 중 가장 완비(完備)되었다는 여대말(麗代末) 공민왕(恭愍王)과 노국공주(魯國公主)의 현(玄)·정릉제(正陵制)를 습용(襲用)하여 건원릉(健元陵)이 조영(造營)되었다. 건원릉(健元陵)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최초(最初)의 왕릉(王陵)으로서 이후(以後) 왕릉(王陵)의 전범(典範)이 되었으나 그 뒤 누대(累代) 400여년(餘年)에 걸친 왕릉(王陵)의 조영(造營)에서 각(各) 시대(時代)의 변화(變化)에 따라 각(各) 릉(陵)이 변형(變形) 수용(受容)함으로써 병풍석(屛風石), 명등석(明燈石), 수석(獸石), 문(文)·무인석(武人石), 정자각(丁字閣) 등(等)에서 여러 변모(變貌)를 살필 수 있다. 기록상(記錄上) 각(各) 릉(陵) 조영시(造營時) 각(各) 릉(陵)의 재실(齋室)이 축조(築造)된 것으로 전(傳)하나 각(各) 릉(陵)마다의 재실(齋室)은 현재(現在) 없고 9릉(陵)을 하나의 경역(境域)으로 하여 수릉(綏陵) 남측(南側)에 재실(齋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