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사적 제19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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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산2-1 |
소재지 | |
지정일 | 1970.05.26 |
수량/면적 | 1,915,891㎡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국유, 사유 |
관리자 | 동구릉관리소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
![6727.jpg 6727.jpg](http://simjeon.kr/xe/files/attach/images/179/995/030/672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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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암산(儉巖山)의 지세(地勢)는 북방(北方)의 산정(山頂)을 중심(中心)으로 하여 동서(東西)의 좌우(左右)로 남향(南向)의 완만(緩慢)한 산세(山勢)가 이어지며 산세말미부(山勢末尾部)는 다시 내향(內向)하여 아늑한 하나의 분지(盆地)를 이루는 형국(形局)이다. 동구릉(東九陵)의 9개(個) 각 릉(陵)은 이러한 분지형국(盆地形局)의 안에 각 지세(地勢)의 여러 지맥(支脈)의 언덕에 좌향(坐向)을 정하고 설릉(設陵)되었으니 각 릉(陵)의 분포(分布)를 보면 검암산(儉巖山) 전역(全域)의 중앙북방(中央北方)에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이 남면(南面)으로 설릉(設陵)되었고 건원릉(健元陵) 동편(東便)의 남향(南向)하는 산세(山勢)의 내측(內側) 지맥(支脈)의 언덕에 선조(宣祖)의 목릉(穆陵)이 그 다음 남측(南側) 아래로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이 있으며 다시 그 다음으로 문조(文祖)의 수릉(綏陵)이 있으니 동구릉(東九陵)에 설릉(設陵)된 최후(最後)의 릉(陵)이다. 중앙(中央)의 건원릉(健元陵) 서편(西便)으론 인조(仁祖) 계비(繼妃)의 휘릉(徽陵)이 있으며 그 다음으로 헌종(憲宗)의 경릉(景陵)이 있고 그 아래로 영조(英祖)의 원릉(元陵)에 이어 경종비(景宗妃)의 혜릉(惠陵)이, 그 다음 검암산(儉巖山) 서편(西便) 산세(山勢) 끝에 현종(顯宗)의 숭릉(崇陵)이 있다.
동구릉(東九陵)의 전체(全體) 지형(地形)에 의한 각(各) 릉(陵)의 설릉(設陵) 위치(位置)로 볼 때에 중앙북방(中央北方)의 건원릉(健元陵)을 위쪽 중심(中心)으로 하여 동편(東便)으로 3릉(陵)을, 서편(西便)으로 5릉(陵)을 거느린 형국(形局)이다. 각 릉(陵)에 대한 설릉(設陵) 경위(經緯)를 볼 때에 육지(陸地)를 여러 곳으로 찾았으나 길지(吉地)를 얻지못하고 마침내 동구릉(東九陵)의 동서(東西) 각(各) 능원(陵原)에 400여년(餘年)에 걸쳐 자리잡았음은 동구릉(東九陵)의 지세(地勢)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한 명당지지(明堂之地)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조선왕릉중(朝鮮王陵中) 한 경역내(境域內)에 왕릉군(王陵郡)을 이루고 있는 곳은 동구릉(東九陵)을 비롯하여 경기도(京畿道)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의 서오릉(西五陵)과 같은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의 서삼릉(西三陵)이 있으나 그 중 동구릉(東九陵)이 가장 많은 능(陵)이 봉안(奉安)되어 있으며 설릉(設陵) 순(順)으로 인조(仁祖) 계비(繼妃)의 휘릉대(徽陵代) 또는 영조(英祖)의 원릉대(元陵代)까지는 동오릉(東五陵) 또는 동칠릉(東七陵)이라고 불렸던 사실(事實)이 기록(記錄)에 전하며 철종(哲宗) 6년(1855년) 문조(文祖)의 수릉(綏陵)이 아홉번째로 천릉(遷陵)된 이후 60여년(餘年) 뒤 왕조(王朝)의 쇠망(衰亡)으로 동구릉(東九陵)이란 호칭(號稱)이 굳어졌다.
동구릉(東九陵)은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고 조선조(朝鮮朝)의 능제(陵制) 상설(象設)은 여조(麗朝)의 것을 의용(依用)하였던 것으로 여조(麗朝) 능(陵) 중 가장 완비(完備)되었다는 여대말(麗代末) 공민왕(恭愍王)과 노국공주(魯國公主)의 현(玄)·정릉제(正陵制)를 습용(襲用)하여 건원릉(健元陵)이 조영(造營)되었다. 건원릉(健元陵)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최초(最初)의 왕릉(王陵)으로서 이후(以後) 왕릉(王陵)의 전범(典範)이 되었으나 그 뒤 누대(累代) 400여년(餘年)에 걸친 왕릉(王陵)의 조영(造營)에서 각(各) 시대(時代)의 변화(變化)에 따라 각(各) 릉(陵)이 변형(變形) 수용(受容)함으로써 병풍석(屛風石), 명등석(明燈石), 수석(獸石), 문(文)·무인석(武人石), 정자각(丁字閣) 등(等)에서 여러 변모(變貌)를 살필 수 있다. 기록상(記錄上) 각(各) 릉(陵) 조영시(造營時) 각(各) 릉(陵)의 재실(齋室)이 축조(築造)된 것으로 전(傳)하나 각(各) 릉(陵)마다의 재실(齋室)은 현재(現在) 없고 9릉(陵)을 하나의 경역(境域)으로 하여 수릉(綏陵) 남측(南側)에 재실(齋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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