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사적 제19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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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33-1 |
소재지 | |
지정일 | 1970.05.26 |
수량/면적 | 3,495,236㎡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영월군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
장릉(莊陵)은 제6대 단종대왕(第6代 端宗大王)의 릉(陵)이다.
단종대왕(端宗大王)은 문종(文宗)의 원자(元子)로서 세종(世宗) 23년(1441년) 7월 23일 경복궁 자선당(景福宮 資善堂)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가 홍위(弘暐)이고 모후(母后)는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이며 모후 권씨(母后 權氏)는 단종 탄생 익일(端宗 誕生 翌日)에 산후병(産後病)으로 승하(昇遐)하였다. 세종(世宗) 30년(1448년) 4월 3일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冊封)되었으며 문종 즉위년(文宗 卽位年)(1450년) 7월 20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고 문종(文宗) 2년(1452년) 5월 14일 문종(文宗)이 승하(昇遐)함에 이 해 5월 18일 경복궁 근정문(景福宮 勤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으니 춘추 12세(春秋 12歲)였다.
문종(文宗)이 임종(臨終)에 앞서 단종(端宗)의 유충(幼沖)함을 염려하여 영의정 황보인(領議政 黃甫仁), 좌의정 김종서(左議政 金宗瑞) 등에 보좌(補佐)를 유언(遺言)으로 남겼으나 고명대신 등(顧命大臣 等)이 단종 원년(端宗 元年)(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피살(被殺)되고 문종(文宗)의 제(弟)이며 왕숙(王叔)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였고 수양(首陽)은 동복제 안평대군(同腹弟 安平大君)이 고명대신(顧命大臣)과 불궤(不軌)를 꾀하였다 하여 강화도(江華島)로 추방(追放)하고 단종(端宗) 3년(1455년) 윤6월(閏6月) 11일 역시 동복제 금성대군(同腹弟 錦城大君)을 역모(逆謀)의 죄(罪)로 종친(宗親), 궁인(宮人), 시신(侍臣)과 함께 유배(流配)시키자 단종(端宗)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선양(禪讓)하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세조(世祖) 3년(1457년) 9월 순흥(順興)에 유배(流配)되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비(端宗妃)의 부 송현수(父 宋玹壽)와의 단종복위계책(端宗復位計策)이 발각되자 노산군(魯山君)은 폐서인(廢庶人)이 되었고 이 해 10월 24일 사사(賜死)되었으니 춘추 17세(春秋 17歲)였다.
단종(端宗)의 유해(遺骸)는 동강(東江)에 흘렀는데 영월호장 엄흥도(寧越戶長 嚴興道)가 국법(國法)을 어기고 어시(御屍)를 수습(收拾)하여 발산 동을지 신좌을향(鉢山 冬乙旨 辛坐乙向)(남서(南西)에서 북동향(北東向))에 밀장(密葬)하였으며 중종(中宗) 11년(1516년)에 노산묘(魯山墓)를 찾으라는 왕명(王命)이 있었고 고노호장 엄수(故老戶長 嚴壽), 양인 지무작(良人 智無作), 관노 이말산 등(官奴 李末山 等)의 진언(進言)으로 이해 12월 15일 성분(成墳)하였으나 다시 방치(放置)되었고 중종(中宗) 36년(1541년)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寧越郡守 朴忠元)이 현몽(顯夢)에 따라 노산묘(魯山墓)를 찾고 묘소(墓所)를 수축 봉제(收縮 奉祭)하였다. 선조(先祖) 13년(1580년) 강원감사 정철(江原監司 鄭澈)의 상계(狀啓)에 따라 상석(床石), 표석(標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을 세웠다.
임란(壬亂) 이후 봉묘치제(奉墓致祭)가 다시 소홀(疏忽)해졌으며 숙종(肅宗) 7년(1681년) 7월 21일 노산군(魯山君)을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追封)하였고 숙종(肅宗) 24년(1698년) 11월 6일 추복(追復)하여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으로 하고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에 부묘(廟)하였으며 릉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단종(端宗)이 승하(昇遐)한지 241년만에 변례(變禮)를 버리고 왕실(王室)의 정례(正禮)를 되찾게 된 것이다.
곡장(曲墻)은 3면(面)이고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은 세우지 아니하였다. 숙종(肅宗) 24년(1698년) 11월 단종(端宗)의 묘호(廟號)와 릉호(陵號)를 추복(追復)하면서 릉상(陵上)의 석물(石物)들은 후릉(厚陵)의 례(例)를 본받아 행(行)하라는 교지(校旨)에 따른 것이며 릉전(陵前)에 상석(床石)이 1좌(座)가 있고 그 좌우(左右)에 망주석 1쌍(望柱石 1雙)이 있다. 그 한 단 아래에 사각옥형 명등석 1좌(四角屋形 明燈石 1座)와 문인석(文人石)과 마석 각 1쌍(馬石 各 1雙)이 상면 설치(相面 設置)되어 있고 무인석(武人石)은 없다. 이는 추봉(追封)된 경릉(敬陵)이나 정릉(貞陵)의 예(例)에 의한 것이며 사각옥형 명등석(四角屋形 明燈石)은 정릉(貞陵)에 이어 장릉(莊陵)에서 시작된다.
릉침(陵寢) 언덕 아래 남측(南側)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丁字閣)은 릉침좌향(陵寢左向)과 같은 방위(方位)로 세우는 것이나 장릉(莊陵)은 릉침좌향(陵寢左向)이 서남(西南)에서 동북향(東北向)인데 비(比)하여 정자각(丁字閣)은 남향(南向)으로 건립(建立)되었으니 이는 단종(端宗)이 사사(賜死)된 후 엄흥도(後 嚴興道)에 의하여 암장(暗葬)되었다가 숙종(肅宗) 24년(1698년) 추복(追復)되고 영조(英祖) 9년(1733년)에 정자각(丁字閣)을 건립(建立)된 것이다. 비면(碑面)엔 조선국단종대왕장릉(朝鮮國端宗大王莊陵)이라 썼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영조(英祖) 9년(1733년)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 서남방(丁字閣 西南方)에 영천(靈泉)이 있으며 장릉 봉제시 사용(莊陵 奉祭時 使用)되었고 영천비(靈泉碑)라고 새겨진 비석(碑石)이 있으며 정조(正祖) 15년(1791년)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 남측(丁字閣 南側)에 홍살문(紅箭門)이 있으며 홍살문 남측(紅箭門 南側)에 단종(端宗)을 위하여 순사(殉死)한 충신(忠臣)들을 봉제(奉祭)하는 배식단(配食壇)에 봉향(奉享)되는 충신위 32인(忠臣位 32人), 조사위 198인(朝士位 198人), 환관군노 28인(宦官軍奴 28人), 여인위 6인(女人位 6人) 모두 264인(人)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한 배식단사(配食壇祠)가 있으며 정조(正祖) 15년(1791년) 2월 정조(正祖)의 교지(校誌)에 따라 당시 영월부사 박기정(寧越府事 朴基正)이 건립(建立)한 것이다.
홍살문(紅箭門)에서 장릉 주차장(莊陵 駐車場)에 이르는 도로 북편(道路 北側)에 재실(齋室)이 있으며 배식단사(配食壇祠)와 재실 중간(齋室 中間)에 엄흥도 정려각(嚴興道 旌閭閣)이 있다. 영조(英祖) 2년(1726년) 엄흥도(嚴興道)를 정려(旌閭)하고 정조(正祖) 16년(1792년)에 정려비(旌閭碑)와 비각(碑閣)을 영월읍 영흥리(寧越邑 永興里)에 세웠는데 영월 도시계획도로(寧越 都市計劃道路)에 편입(編入)되어 1969년 5월 이곳에 이건(移建)되었으며 주차장 북측(駐車場 北側)에 락촌비각(駱村碑閣)과 락촌기적비(駱村紀蹟碑)가 있다. 락촌(駱村)은 문경공 박충원(文景公 朴忠元)의 호(號)로서 박충원(朴忠元)이 중종(中宗) 36년(1541년) 영월군수(寧越郡守)로 부임(赴任)하여 현몽(顯夢)으로 노산묘(魯山墓)를 찾아 수축 봉제(修築 奉祭)한 사적(事蹟)을 기록(記錄)하였으며 1973년 4월 박충원(朴忠元)의 후손(後孫)들이 세운 것이다. 낙촌비각 동남측(駱村碑閣 東南側)에 배견정(拜鵑亭)이 있으며 정조(正祖) 16년(1792년)에 영월부사 박기정(寧越府使 朴基正)이 건립(建立)한 것이다.
릉역내(陵域內)에 릉제(陵制)에 의하여 정(定)하여진 것 외에 배식단사(配食壇祠), 정려비(旌閭碑), 기적비(紀蹟碑), 정자(亭子)가 있는 곳은 장릉(莊陵)뿐이며 왕위(王位)를 찬탈(纂奪)당하고 사사(賜死)된 단종(端宗)과 관련(關聯)된 것들이다.
단종대왕(端宗大王)은 문종(文宗)의 원자(元子)로서 세종(世宗) 23년(1441년) 7월 23일 경복궁 자선당(景福宮 資善堂)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가 홍위(弘暐)이고 모후(母后)는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이며 모후 권씨(母后 權氏)는 단종 탄생 익일(端宗 誕生 翌日)에 산후병(産後病)으로 승하(昇遐)하였다. 세종(世宗) 30년(1448년) 4월 3일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冊封)되었으며 문종 즉위년(文宗 卽位年)(1450년) 7월 20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고 문종(文宗) 2년(1452년) 5월 14일 문종(文宗)이 승하(昇遐)함에 이 해 5월 18일 경복궁 근정문(景福宮 勤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으니 춘추 12세(春秋 12歲)였다.
문종(文宗)이 임종(臨終)에 앞서 단종(端宗)의 유충(幼沖)함을 염려하여 영의정 황보인(領議政 黃甫仁), 좌의정 김종서(左議政 金宗瑞) 등에 보좌(補佐)를 유언(遺言)으로 남겼으나 고명대신 등(顧命大臣 等)이 단종 원년(端宗 元年)(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피살(被殺)되고 문종(文宗)의 제(弟)이며 왕숙(王叔)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였고 수양(首陽)은 동복제 안평대군(同腹弟 安平大君)이 고명대신(顧命大臣)과 불궤(不軌)를 꾀하였다 하여 강화도(江華島)로 추방(追放)하고 단종(端宗) 3년(1455년) 윤6월(閏6月) 11일 역시 동복제 금성대군(同腹弟 錦城大君)을 역모(逆謀)의 죄(罪)로 종친(宗親), 궁인(宮人), 시신(侍臣)과 함께 유배(流配)시키자 단종(端宗)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선양(禪讓)하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세조(世祖) 3년(1457년) 9월 순흥(順興)에 유배(流配)되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비(端宗妃)의 부 송현수(父 宋玹壽)와의 단종복위계책(端宗復位計策)이 발각되자 노산군(魯山君)은 폐서인(廢庶人)이 되었고 이 해 10월 24일 사사(賜死)되었으니 춘추 17세(春秋 17歲)였다.
단종(端宗)의 유해(遺骸)는 동강(東江)에 흘렀는데 영월호장 엄흥도(寧越戶長 嚴興道)가 국법(國法)을 어기고 어시(御屍)를 수습(收拾)하여 발산 동을지 신좌을향(鉢山 冬乙旨 辛坐乙向)(남서(南西)에서 북동향(北東向))에 밀장(密葬)하였으며 중종(中宗) 11년(1516년)에 노산묘(魯山墓)를 찾으라는 왕명(王命)이 있었고 고노호장 엄수(故老戶長 嚴壽), 양인 지무작(良人 智無作), 관노 이말산 등(官奴 李末山 等)의 진언(進言)으로 이해 12월 15일 성분(成墳)하였으나 다시 방치(放置)되었고 중종(中宗) 36년(1541년)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寧越郡守 朴忠元)이 현몽(顯夢)에 따라 노산묘(魯山墓)를 찾고 묘소(墓所)를 수축 봉제(收縮 奉祭)하였다. 선조(先祖) 13년(1580년) 강원감사 정철(江原監司 鄭澈)의 상계(狀啓)에 따라 상석(床石), 표석(標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을 세웠다.
임란(壬亂) 이후 봉묘치제(奉墓致祭)가 다시 소홀(疏忽)해졌으며 숙종(肅宗) 7년(1681년) 7월 21일 노산군(魯山君)을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追封)하였고 숙종(肅宗) 24년(1698년) 11월 6일 추복(追復)하여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으로 하고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에 부묘(廟)하였으며 릉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단종(端宗)이 승하(昇遐)한지 241년만에 변례(變禮)를 버리고 왕실(王室)의 정례(正禮)를 되찾게 된 것이다.
곡장(曲墻)은 3면(面)이고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은 세우지 아니하였다. 숙종(肅宗) 24년(1698년) 11월 단종(端宗)의 묘호(廟號)와 릉호(陵號)를 추복(追復)하면서 릉상(陵上)의 석물(石物)들은 후릉(厚陵)의 례(例)를 본받아 행(行)하라는 교지(校旨)에 따른 것이며 릉전(陵前)에 상석(床石)이 1좌(座)가 있고 그 좌우(左右)에 망주석 1쌍(望柱石 1雙)이 있다. 그 한 단 아래에 사각옥형 명등석 1좌(四角屋形 明燈石 1座)와 문인석(文人石)과 마석 각 1쌍(馬石 各 1雙)이 상면 설치(相面 設置)되어 있고 무인석(武人石)은 없다. 이는 추봉(追封)된 경릉(敬陵)이나 정릉(貞陵)의 예(例)에 의한 것이며 사각옥형 명등석(四角屋形 明燈石)은 정릉(貞陵)에 이어 장릉(莊陵)에서 시작된다.
릉침(陵寢) 언덕 아래 남측(南側)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丁字閣)은 릉침좌향(陵寢左向)과 같은 방위(方位)로 세우는 것이나 장릉(莊陵)은 릉침좌향(陵寢左向)이 서남(西南)에서 동북향(東北向)인데 비(比)하여 정자각(丁字閣)은 남향(南向)으로 건립(建立)되었으니 이는 단종(端宗)이 사사(賜死)된 후 엄흥도(後 嚴興道)에 의하여 암장(暗葬)되었다가 숙종(肅宗) 24년(1698년) 추복(追復)되고 영조(英祖) 9년(1733년)에 정자각(丁字閣)을 건립(建立)된 것이다. 비면(碑面)엔 조선국단종대왕장릉(朝鮮國端宗大王莊陵)이라 썼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영조(英祖) 9년(1733년)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 서남방(丁字閣 西南方)에 영천(靈泉)이 있으며 장릉 봉제시 사용(莊陵 奉祭時 使用)되었고 영천비(靈泉碑)라고 새겨진 비석(碑石)이 있으며 정조(正祖) 15년(1791년)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 남측(丁字閣 南側)에 홍살문(紅箭門)이 있으며 홍살문 남측(紅箭門 南側)에 단종(端宗)을 위하여 순사(殉死)한 충신(忠臣)들을 봉제(奉祭)하는 배식단(配食壇)에 봉향(奉享)되는 충신위 32인(忠臣位 32人), 조사위 198인(朝士位 198人), 환관군노 28인(宦官軍奴 28人), 여인위 6인(女人位 6人) 모두 264인(人)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한 배식단사(配食壇祠)가 있으며 정조(正祖) 15년(1791년) 2월 정조(正祖)의 교지(校誌)에 따라 당시 영월부사 박기정(寧越府事 朴基正)이 건립(建立)한 것이다.
홍살문(紅箭門)에서 장릉 주차장(莊陵 駐車場)에 이르는 도로 북편(道路 北側)에 재실(齋室)이 있으며 배식단사(配食壇祠)와 재실 중간(齋室 中間)에 엄흥도 정려각(嚴興道 旌閭閣)이 있다. 영조(英祖) 2년(1726년) 엄흥도(嚴興道)를 정려(旌閭)하고 정조(正祖) 16년(1792년)에 정려비(旌閭碑)와 비각(碑閣)을 영월읍 영흥리(寧越邑 永興里)에 세웠는데 영월 도시계획도로(寧越 都市計劃道路)에 편입(編入)되어 1969년 5월 이곳에 이건(移建)되었으며 주차장 북측(駐車場 北側)에 락촌비각(駱村碑閣)과 락촌기적비(駱村紀蹟碑)가 있다. 락촌(駱村)은 문경공 박충원(文景公 朴忠元)의 호(號)로서 박충원(朴忠元)이 중종(中宗) 36년(1541년) 영월군수(寧越郡守)로 부임(赴任)하여 현몽(顯夢)으로 노산묘(魯山墓)를 찾아 수축 봉제(修築 奉祭)한 사적(事蹟)을 기록(記錄)하였으며 1973년 4월 박충원(朴忠元)의 후손(後孫)들이 세운 것이다. 낙촌비각 동남측(駱村碑閣 東南側)에 배견정(拜鵑亭)이 있으며 정조(正祖) 16년(1792년)에 영월부사 박기정(寧越府使 朴基正)이 건립(建立)한 것이다.
릉역내(陵域內)에 릉제(陵制)에 의하여 정(定)하여진 것 외에 배식단사(配食壇祠), 정려비(旌閭碑), 기적비(紀蹟碑), 정자(亭子)가 있는 곳은 장릉(莊陵)뿐이며 왕위(王位)를 찬탈(纂奪)당하고 사사(賜死)된 단종(端宗)과 관련(關聯)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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