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새남터 성지

문성식 2015. 6. 15. 12:08

새남터 성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많은 성직자, 지도자들이 치명한 순교 성지


새남터는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비롯하여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명 중 11명이 순교하신 곳이며, 그중 8명과 교회의 지도급 평신자 3명이 성인품에 오른 한국의 대표적 순교 성지다. 또한 이곳 성지에는 9명의 성인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었다. 새남터는 본래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의 철도 공작창 인근으로, 새남터 성당 남쪽 150~200m 지점에 있었다. 일부에서는 그 위치를 원효로 4가 부근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새남터는 이 지역이 북쪽 한강변의 노들 나루터 인근에 위치한 낮은 모래 언덕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과 국사범과 같은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어 왔다.

새남터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부터였다. 즉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의금부에서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이곳으로 옮겨져 5월 31일(음 4월 19일) 처형당함으로써 이곳의 첫 순교자가 된 것이다. 당시 주문모 신부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그 시신은 닷새 동안 백사장에 버려졌다가 군사들에 의해 몰래 이장됨으로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이후 새남터는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자들의 처형장이 되었다. 우선 1839년의 기해박해 때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Maubant, 羅伯多祿, 1803-1839, 베드로)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가 9월 21일(음 8월 14일)에 주문모 신부처럼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이어 1846년 병오박해 때는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가 9월 16일(음 7월 26일)에, 현석문 가롤로가 9월 19일에 역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를 비롯하여 브르트니에르(Bretni´eres, 白, 1838~1866, 유스토), 볼리외(Beaulieu, 徐沒禮, 1840~1866, 루도비코), 도리(Dorie, 金, 1839~1866, 헨리코),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미카엘),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신부 등이 정의배(丁義培, 1795~1866, 마르코)와 우세영(禹世英, 1845~1866, 알렉시오)과 함께 3월 11일에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처럼 새남터에서는 모두 14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또한 새남터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명 중 11명이 순교하신 곳이며 이 11명 중 8명과 교회의 지도급 평신자 3명 모두 11명이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됨으로써 이곳은 한국의 대표적 순교 성지가 되었다.

◆ 새남터 기념관(2006. 9. 3 축성)

서울 새남터 성당은 2006년 9월 3일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관’ 축복식을 가졌다. 새남터 성당 지하 100여평 공간에 마련된 ‘새남터 기념관’은 4개 공간으로 나눠 꾸며졌다.

○ 도입공간 및 상징의 장 : 새남터 성지 역사와 103위 성인 성화 등 전시
○ 추모의 장 :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 11인의 흉상과 부조 설치
○ 전시 공간 : 천주교 수용과 창설, 박해, 순교의 과정을 그래픽과 유물 등을 통해 전시
○ 체험 및 교육공간 : 조배실과 다목적 영상실을 설치, 신자들이 순교 성인에 대해 묵상 기회 제공


◆ 조선조의 천주교 박해

조선왕조의 천주교 박해는 한국 교회가 창설(1784년 11월경)된 지 약 반년만인 1785년 3월(음)에 벌써 시작되었다. 중인인 역관 김범우는 그의 집에서 종교의 모임을 가졌다 하여 수감되었다가 장형을 당하고 도배(徒配)되었다. 그 후 한국교회는 4대 박해로 불리는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를 비롯하여 비교적 규모가 작았던 박해로 신해(1791년), 을묘(1795년), 을해(1815년), 정해(1827년), 경신(1860년)박해 등이 잇달았다. 이중에서 4대 박해는 이른바 조정의 공식적 개입에 의하여 야기되었으나, 기타 박해는 조정의 공식적인 지시 없이, 포도대장이나 일부 지방관이 독단적으로 박해를 지시하여 비롯된 점에서 구분된다.

○ 신유박해(1801)
정조의 뒤를 이은 11세의 순조 때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섭정(攝政, 국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는 사람)이 되었는데, 대비는 노론벽파에 속하는 여인이었다. 순조 원년(1801년) 1월 11일(음) 대왕대비가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선포하고, 전국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고 세금, 치안 등에서 조정의 통제력을 강화하던 제도)을 세워 빠짐없이 고발케 하여 근절을 기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신유박해다.
그 결과 남인의 거두인 이가환(李家煥, 호 錦帶, 貞軒, 1742~1801)과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은 장살당하고,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과 홍낙민(洪樂敏, 1751~1801, 루카) 등은 순교하였으며,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이 처형되고, 정약전(丁若銓, 자 天全, 1758~1816)·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형제는 유배됨으로써 남인 세력은 거의 몰락하였다.
그런데 오랫동안 잠적하였던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3월 12일(음) 자현(自現)하여 박해는 재연되고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온 독실한 여회장 강완숙(姜完淑, 1761~1801, 골룸바)과 궁녀 등이 순교하고 주 신부는 군문효수 되었다.
9월 29일(음)에는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이 체포되어 대역 부도죄(大逆不道罪)로 순교하였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는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일변시켰다. 위정자들은 그것을 마치 천주교회의 가르침인 양 단정하고, 외세를 불러들이는 매국도당으로 몰아 박해를 합리화시키는 구실로 삼게 된 것이다.

○ 기해박해(1839)
1839년 헌종 5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이른바 사학 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시작된 이 박해는 사학(邪學, 사악한 배움이란 뜻으로 박해자들이 천주교 등을 비판하여 부른 말)인 천주교를 퇴치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내면적으로는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꺾으려는 벽파 풍양 조씨들의 책동에서 온 것이었다. 당시 시파인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너그러웠으나, 벽파인 풍양 조씨는 천주교를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그 결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역적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천주교도를 몰아세운 이 박해로 4월 12일(음) 남명혁(南明赫, 1802~1839, 다미아노)과 궁녀 박희순(朴喜順, 1801~1839, 루치아) 등 9명이 순교하고, 6월부터는 유진길(劉進吉, 용심, 1791~1839, 아우구스티노), 정하상(丁夏祥, 1795~1839, 바오로), 조신철(趙信喆,1795~1839, 가롤로) 등 한국 교회 재건운동의 요인들이 잇따라 체포되었다. 7월 1일(음)에는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가 수원에서 자현하고, 주교의 권고로 충청도 홍주에서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과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도 자현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래서 8월 14일(음) 3인의 선교사가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았고, 이튿날 유진길과 정하상이 서소문 형장에서, 나흘 후에는 조신철 등 9명이 순교하였다. 이때 정부는 공적인 처형이 너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서울의 교우들에게만 교수형을 처하였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일기》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중에서 고문 또는 병들어 죽은 교인이 60여 명이나 되었다. 이 밖에도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등을 참고하면 실제로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순교자들도 상당수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 병오박해(1846)
헌종 12년(1846년)에 정부는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천주교에 또 박해를 가하였다. 이것이 병오박해다. 김대건은 선교사들의 입국이 비교적 안전한 해로(海路)를 개척하고자 서해의 등산진(登山鎭)까지 갔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마침내 7월 26일(음) 25세의 젊은 나이로 한강변 사장(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 박해는 김 신부와 관련되어 투옥된 현석문(玄錫文, 1797~1846, 가롤로) 등 남녀 교우 9명이 처형된 외에 다른 희생자는 없었다.

○ 병인박해(1866)
고종 3년(1866년) 대원군(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1898, 호 石坡) 치하에서 한국 교회사상 최대의가혹한 박해가 또 일어났다. 이것이 병인박해다.
이 박해의 배경이 되는 원인은 당시 시베리아를 차지한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대원군은 천주교의 협조를 청해 왔고, 이어 승지인 남종삼(南鍾三, 호 煙波, 1817~1866, 요한) 등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맺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능히 러시아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대원군은 이를 만족히 여기고, 남종삼에게 한국 교회의 책임자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를 만나도록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황해도에 인편을 보내어 포교 중이던 베르뇌 주교를 서울에 돌아오게 하였는데, 그의 도착은 남종삼이 대원군의 요청을 받은 지 한 달 뒤의 일이었다. 1866년 1월 31일(음 12월 15일) 남종삼은 주교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다시 대원군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를 맞은 대원군의 태도는 너무나 냉담하였다. 대원군의 태도가 표변한 원인은 얼마 전에 북경에서 조선 사신이 보내온 중국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천주교 금령(박해령)이 내려졌다는 서신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가혹한 박해로 한국에 있던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남종삼 등 수많은 저명 인사들이 참수되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 철저한 탄압을 가하여 1866년부터 1873년 전후까지 광의의 병인박해 기간에 약8천 명에 달하는 교우의 생명을 앗아갔다.

◆ 김대건 신부의 옥중에서의 편지 3통← 클릭하면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 순교자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1821∼1846)
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1836년 나 베드로(모방) 신부는 그를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그는 6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1845년 8월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서울과 용인 지방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846년 음력 4월 주교의 명에 따라,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김 신부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서울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취조 중, 김 신부의 넓은 식견과 당당한 태도에 대관들은 그를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고 생각하였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의 처형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Lurent Marie Joseph) 주교(1796∼1839)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며 주교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 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모방, 정 샤스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 교회 설립 53년 만에 비로소 선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1839년 초 신자수는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사제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 닥친 박해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모방, 샤스탕 두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3세였으며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 성 장 시므온 베르뇌(Berneux, Francois) 주교(1814∼1866)
‘베르뇌’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장 시므온 주교는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이며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프랑스의 르망 교구 출신인 장 주교는 1837년에 사제가 되었고 동양의 선교 지역인 베트남으로 건너갔다가 2년 동안 옥살이를 치렀다. 그 뒤 만주 요동 지역에서 10여 년 동안 활동하였고,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3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깊은 신심과 신학을 겸비한 장 주교는 이 땅에서 10년 동안 사목 활동을 하면서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인쇄소 두 곳을 설립하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당뇨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목에 힘써 여러 지역의 교우들을 열심히 돌보았다. 1866년 2월 23일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앞 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고도 고통스러운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3월 7일 백 유스토, 서 루도비코, 김 헨리코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 성 나 베드로 모방(Maubant, Pierre Philibert) 신부(1804∼1839)
한국 이름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1836년 1월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제2대 교구장인 범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하였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범 주교에 이어 자수하였다.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 샤스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 성 정 야고보 샤스탕(Chastan, Jacques Honore) 신부(1803∼1839)
한국 이름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이다. 1827년 1월 파리외방전교회 사제가 된 정 신부는 1836년 12월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함께 각 지방에 퍼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거행하였다.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5세,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 성 김 헨리코 도리(Dorie, Pierre Henri) 신부(1839∼1866)
프랑스 뤼송 교구 출신인 김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4년에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5월 조선에 입국하여 용인 손골에 부임하였다. 순교하는 날까지 운명을 함께한 서 루도비꼬 신부와 가깝게 지냈으며, 한국말은 서툴렀지만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여 교우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손골에서 지내는 동안 교우들이 자신을 ‘김 신부’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기뻐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에 김씨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과연 김 신부는 자신의 소원대로 입국한 지 10개월 만인 1866년 2월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동료 사제들과 함께 27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성 백 유스토 브르트니에르(Simon-Marie-Antoine Ranfer de Bretenieres) 신부(1838∼1866)
1866년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인 백 신부는 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64년에 사제가 되었다. 수품 직후 동료인 김 헨리코, 민 루가, 서 루도비코 신부와 함께 고국을 떠나 이듬해인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백 신부는 정의배 회장의 집에 머물며 한국말을 배워,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정 회장이 체포된 다음 날인 1866년 2월 26일 장 주교의 하인이었던 이선이의 고발로 체포되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3월 7일 새남터에서 28세의 나이로 장 주교와 함께 처형되었다.

◆ 성 서 루도비코 볼리외(Beaulieu, Bernard Louis) 신부(1840∼1866)
‘볼리외’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서 루도비코 신부의 한국명은 서몰례(徐沒禮)이다. 서 신부는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에서 태어나 1864년에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에 백, 김, 민 신부와 함께 충청도 내포 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는 고해성사를 줄 만큼 한국말을 배운 뒤 공주 지방의 전교를 맡았지만, 임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겨를도 없이 박해를 맞았다. 서 신부는 장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의 교우 집에 숨어 있었지만 1866년 2월 27일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을 잘 참아 내었고 여러 질문에도 한국말이 서투르다는 핑계를 대며 대답을 회피하였다. 마침내 그 해 3월 7일에 동료 신부들과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되니 그의 나이 26세였다.

◆ 성 현석문 가롤로(1797∼1846)
현석문은 서울 중인 계급의 독실한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가족이 모두 순교자가 되었다. 1839년에 회장으로 임명된 현석문은 박해가 끝난 뒤 순교자들의 기록을 정리한 《기해일기》를 펴내었고, 포졸들에게 쫓기면서도 이름을 바꾸어 가며 각지에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가 격려하였다. 한편 중국 교회에 밀사를 보내고, 1845년에는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뒤 김 신부의 집에 남아 있던 여교우들을 새로 마련한 집에 피신시키고 자신도 그 집에 숨어 있다가 7월 11일에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된 뒤에도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지내다가 마침내 9월 19일 50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성 우세영 알렉시오(1845∼1866)
‘세필’로도 불렸던 우세영은 황해도 서흥 향교 마을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우연히 알게 된 김 요한이라는 회장의 권면으로 관직의 뜻을 버리고 서울로 내려가, 정의배에게 교리를 배우고 장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 뒤 부모의 반대를 인내와 열정으로 참아 내어 가족들을 입교시키고 신앙생활을 위해 평안도 논재로 이사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2월 16일 이웃 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평양 감영에서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곧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서울로 내려가 스승 정의배를 만나러 갔다가, 이미 체포된 정의배의 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같은 해 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스승 정의배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정의배 마르코(1795∼1866)
서울 창동에서 태어난 정의배는 유학을 공부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양 선교사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고 감동하여 곧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1845년 제3대 조선교구장 고 주교가 입국한 뒤 서울 지역의 회장이 되어 20여 년 동안 헌신적으로 일하였고, 1854년에는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2월 25일에 체포되었고, 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그리고 우세영과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7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 성 장 시므온 베르뇌, 성 나 베드로 모방, 성 정 야고버 샤스탕, 성 김 헨리코 도리, 성 백 유스토 브르트니에르, 성 서 루도비코 볼리외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현석문 가롤로, 성 우세영 알렉시오, 성 정의배 마르코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평신도 지도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순교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1752∼1801년) <하느님의 종 125위>
1752년 중국 강남성 소주에서 태어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는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 에 성직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신앙심이 깊은데다가 조선 사람과 닮은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성무 집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야고보 신부는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 조선에 입국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아주 비밀리에, 그러나 열심히 성무를 집행하였다.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었으며,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교리서도 집필하였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야고보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하였다가, ‘나의 양떼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겠고,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하였다. 그들은 야고보 신부에게 군문효수형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신부는 형장으로 정해진 한강 근처의 새남터로 끌려가게 되었다.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 참수 치명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 프티니콜라 (Petitnicolas, Michel Alexander)신부 (1828∼1866)
프티니콜라 신부는 1828년 프랑스 코앵슈에서 출생하였고, 1852년에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사제가 되어 1853년 인도로 파견되었으나 풍토에 적응을 못하고 홍콩으로 갔으며 이후 조선으로 부임 명령을 받았다. 1856년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중국에서 해로로 조선에 입국하여, 한때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에 있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요셉신학교에서 원장으로 일하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체포되었다.
그는 한국어를 잘하였고 의술에도 능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어로 교리를 전하고, 또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 또한 3만 이상의 라틴어와 10만에 가까운 조선어를 담아 《나한사전(羅漢辭典)》을 지었는데, 그 중 한 부는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고 나머지는 병인박해 때 소실되었다. 1866년 3월 11일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 푸르티에 신부(Pourthi, Jean Antoine) (1830∼1866)
푸르티에(한국명 : 신요안) 순교자는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교구의 `발랑스 앙 알리브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하여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선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상해를 거쳐 해로로 한국에 잠입, 충청도 베론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 요셉과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 찾아가는 길

간략설명 최초의 선교사가 목을 떨군 곳
지번주소 서울시 용산구 이촌 2동 199-1 
도로주소 서울시 용산구 이촌로 80-8
전화번호 (02)716-1791
팩스번호 (02)716-1794
홈페이지 http://www.saenamteo.or.kr
전자메일 saenamteo@saenamteo.or.kr
성당 앞마당의 성모자상.서울 용산구 이촌동 199의 1번지. 1호선 전철을 타고 용산역을 지나다 보면 말끔하게 단장된 커다란 한옥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2백주년 기념의 해인 1984년 공사를 시작해 3년 만에 완공한 이 집이 순교 성지 새남터 기념 성당이다.
 
이제는 교우들뿐만 아니라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이곳이 순교 터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높다란 아파트 숲을 배경으로 산뜻한 풍모의 건물이 자리 잡은 이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내렸는지를 안다면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었다. 이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곳은 1456년(세조 2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死六臣)이 충절의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4세기를 건너뛴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외국인 사제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린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 있다.
 
새남터를 순교의 성혈로 물들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부터이다. 목자 없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북경 교구는 교회 창립(1784년) 11년 뒤인 1795년에 주 신부를 조선 땅에 파견한다. 이 땅에서 맞이한 첫 사제인 주 신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 최인길의 집에 여장을 푼 이래 6개월 만에 한 배교자의 밀고에 의해 쫓기는 몸이 된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여교우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지만 그의 영입에 주역을 담당했던 윤유일, 지황은 각각 36세, 29세의 나이에 곤장을 받아 치명하고 거처를 제공했던 최인길 역시 장살(杖殺)로 순교한다.
 
성당 마당 지하에 건립된 새남터 기념관 내부 모습.박해의 와중에서도 6천여 명의 신자가 새로 탄생하는 등 조선 교회의 교세는 크게 신장됐다. 하지만 주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지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명도회 회장인 정약종을 비롯해 선구적인 이 땅의 지식인들은 칼 앞에서도 주 신부의 소재를 대지 않았고 그 때문에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주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려고 북행길을 나섰다. 하지만 자기 양 떼들과 생사를 함께 하고자 하는 각오로 도중에 발길을 돌려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칼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한다. 그의 시체는 닷새 동안 형리들이 지켰다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주 신부를 잃은 지 30년 만인 1831년에 조선 교구가 설정돼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을 얻은 데 이어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다. 그 후 1년 만에 조선 교회는 신자가 9천 명으로 늘어났고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 보내는 한편 정하상 등 네 명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1839년 기해박해는 이들 세 명의 외국인 사제를 38년 전 주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교우들은 포졸들의 엄중한 감시를 뚫고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노고산에 매장했다가 4년 후 삼성산에 안장했다.
 
성당 제대와 한국 순교 성인들을 새긴 벽화 모습.그로부터 7년 뒤인 병오년(1846년)에는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 동안의 순교를 "기해 일기"로 남긴 현석문이 이곳에서 참수된다.
 
그리고 다시 20년 후, 전국적으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간 병인박해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사제들과 우세영, 정의배 두 평신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린다.
 
이렇듯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새남터는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됐고, 1956년에는 여기에 '가톨릭 순교 성지'라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1981년에는 한강 본당에서 새남터 본당이 분리 · 독립했고 1987년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현재의 기념성당을 건립해 봉헌했다. 2006년 9월 3일에는 성당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새남터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축복식을 거행하고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7일)]
 
 
새남터, 당고개와 용산의 사적지
 
한국의 순교 성지나 사적지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어느 한 곳만을 따로 떼어 내 설명하기란 어렵다. 서울의 경우만 해도 순교터인 새남터, 서소문, 절두산, 그리고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노고산, 삼성산, 왜고개, 용산 신학교, 명동 대성당 등이 순교자들의 유해 이장과 관련하여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지금의 용산 일대는 새남터를 비롯하여 가장 많은 성지와 사적지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성심여고 내의 옛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 성당 외부 모습.조선 후기까지 수목이 울창했던 이곳은 '용산 8경'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그러나 대대적인 박해 선풍이 일게 되면서 용산 일대는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고,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는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요람지인 신학교가 자리잡게 되었다.
 
함벽정(涵碧亭, 현 원효로 성심여고 위치) 터에 마련된 예수 성심 신학교와 예수 성심 성당(일명 원효로 성당)은 현재 사적 제 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1866년의 한불조약(韓佛條約)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자, 교구장 블랑 주교는 용산 일대의 부지를 매입한 뒤 여주군 강천면의 오지 부엉골에 있던 소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중 신학교 건물은 1892년에 벽돌조 2층으로 건립되었고,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되었다. 또 1890년에는 용산의 삼호정(三湖亭) 언덕에 공소가 설립되었고, 그 인근에 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됨으로써 사적지로서의 의미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삼호정 공소는 1942년 1월 용산 본당으로 승격되어 오늘까지 그 복음의 끈이 이어져 오고 있다.
 
새남터 형장의 본래 위치는 서부 이촌동 아파트 인근으로, 한자로는 사남기(沙南基) 또는 노량사장(鷺梁沙場)으로 표기되어 왔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이미 1890년부터 이곳의 순교터를 매입하고자 하였으나 경부선 공사로 인해 실패하였고, 195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래의 순교 터보다 북쪽으로 500보 남짓 되는 곳(현 용산구 이촌 2동)에 현양비를 세울 수 있었다. 현재 한식의 새남터 성당이 들어서 있는 곳이 바로 이 자리다. 이 새남터의 북쪽 공터는 일찍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되어 왔고, 조선 후기까지 숲이 울창하였다. 따라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는 중죄인인 경우에는 서소문 밖 대신 이곳을 형장으로 사용하였다. 1468년 모반죄로 처형된 남이(南怡) 장군의 형 집행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새남터 성당 마당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새남터가 천주교 순교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군문효수형을 당한 때부터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맞이해 들인 최초의 성직자 주문모 신부. 그러므로 그의 최후를 지켜본 신자들은 훗날 그의 성덕을 기리면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사형 집행을 준비하는 동안 맑고 청명하던 하늘에 갑자기 두터운 구름이 덮이고, 형장 위에 무서운 선풍이 일어났다. 맹렬한 바람과 거듭 울리는 천둥 소리, 억수같이 퍼붓는 흙비, 캄캄한 하늘을 갈라놓은 번개, 이 모든 것이 피비린내 나는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의 가슴을 놀래고 서늘하게 하였다. 이윽고 거룩한 순교자의 영혼이 하느님께로 날라 가자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가 가라앉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났다. 순교자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시신은 다섯 날 다섯 밤 동안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매일 밤 찬란한 빛이 시신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황사영의 '백서', 81행; 신미년(1811년)에 조선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
 
망나니들의 칼춤과 북소리가 함께 어우러진 형장의 모습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재현되었다. 프랑스 선교사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Maubant, 羅)과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이곳에서 순교한 것이다. 이들은 주문모 신부와 마찬가지로 군문효수를 당해 그 머리가 장대에 매달리게 되었고, 그 시신은 3일 동안 백사장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그러나 20일 후 용감한 신자들의 노력으로 시신이 수습되어 노고산(老姑山, 마포구 노고산동의 서강대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그런 뒤에도 새남터의 북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1846년에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같은 해 성 현석문(가롤로)이 다시 망나니의 칼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병인박해 때는 베르뇌 주교를 비롯하여 모두 6명의 프랑스 선교사들과 우세영(알렉시오), 정의배(마르코) 성인 등이 이곳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 중에서 정의배의 시신은 가족들이 수습하였고, 나머지 시신은 신자들이 거두어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인 당고개 성지 모습.한편 기해박해가 거의 끝나 가던 12월 27일(음력)과 28일에는 당고개(堂峴, 원효로 2가의 문배산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망나니들의 칼날이 10명의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본래 이곳은 형지가 아니었지만, 상인들이 닥쳐 올 설날 대목장이 방해받지 않도록 처형 장소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주도록 요청한 때문이었다. 이곳 순교자 10명 중에서 갓난 아이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던 이성례(마리아)를 제외한 9명은 훗날 성인품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하였고, 이제 당고개는 의미 깊은 순교 성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근래에 도시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이 성지를 훼손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니, 그들에게 어떻게 역사의 의미를 깨우쳐 줄 수 있을 것인가?
 
순교 성지 새남터와 당고개는 이렇게 창조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북소리가 이곳을 찾아 순례하는 신앙인들의 마음 안에서 울리고 있다. 아쉬운 점은 이곳에서 처음 순교한 주문모 신부가 초기의 순교자들과 함께 훗날의 시복 시성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신앙 후손들의 순례가 계속되고 그분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계속 이어지는 한 시성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3월호]

모바일용 요약 설명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던 곳으로,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프랑스인 사제와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1846년 병오박해 때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 동안의 순교를 “기해 일기”로 남긴 현석문이 이곳에서 참수되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사제들과 우세영, 정의배 두 평신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렸습니다.

이렇듯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새남터는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됐고, 1956년에는 여기에 ‘가톨릭 순교 성지’라는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1981년에는 한강 본당에서 새남터 본당이 분리 · 독립했고 1987년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한옥 양식으로 현재의 기념성당을 건립해 봉헌했습니다. 2006년 9월 3일에는 성당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새남터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축복식을 거행하고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사시간
미사구분 요일 시간 기타사항
주일미사 06:00  
09:00  어린이미사
10:30  교중미사
18:00  
평일미사 06:00  
15:00  순례미사
15:00  순례미사
19:00  
15:00  순례미사
19:00  
10:00  
15:00  순례미사
10:00  
15:00  순례미사
15:00  순례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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