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문성식 2015. 6. 12. 16:53
서울대교구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테마 분류 :: 성지 지역 분류 :: 서울대교구 > 종로/중구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를 모신 사제 성소의 요람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있는 성신교정은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신학연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수많은 성직자들을 배출한 예비 사제들의 사제 성소 요람이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가 제대에 모셔져 있고, 또한 1984년 5월 3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했던 곳이기도 하다.
1855년 충북 배론의 교우촌에서 성 요셉 신학교로 출발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은 이후 한국 근대사와 역사를 같이하며 박해와 일제 강점, 전쟁의 소용돌이 등 격변의 세월을 거쳐 왔다.

경기도 여주의 부엉골에서 설립되었던 예수 성심 신학교는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42년 폐교되었다가, 1945년 2월 경성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로 개칭하고 설립 인가를 받아 예과 4년과 고등과 2년의 중등 교육과정, 본과 4년과 연구과 2년의 고등 교육과정을 설정하고 해방 후 혜화동에서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1947년에는 성신대학(聖神大學)으로, 1959년 2월에는 교명을 가톨릭대학으로 변경하여 인가를 받았고, 신학부와 의학부의 편제를 두게 되었다. 1992년 7월에는 교명을 ‘가톨릭대학’에서 ‘가톨릭대학교’로 개칭하고 동시에 신학부를 신학대학으로, 의학부를 의과대학으로 재편하고, 1995년도부터 가톨릭대학교와 성심여자대학교 측이 통합하여 가톨릭대학교는 명실상부한 가톨릭계 종합대학교로 부상하게 되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성신교정에 신학대학이 있으며, 서초구 반포동 성의교정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이, 경기도 부천시 성심교정에 인문·사회·자연·공학·예능 계열의 학과가 배치되어 있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은 순교한 지 40일 만에 미리내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후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이 추진되자, 1901년 5월 21일에는 무덤을 발굴하여 그 유해를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고, 10월 17일 이를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6·25 전쟁이 끝난 뒤인 1960년 7월 5일에 그 유해가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 성신교정 성당으로 옮겨지면서 하악골만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일찍이 마카오 신학교 시절에 온갖 난관을 인내와 용기로서 극복하고 마침내 1845년 8월 17일 한국 교회 최초의 한국인 사제로 서품됨으로써,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모든 신학생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성신교정 성당은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셔 놓은 거룩한 곳이며, 또한 1984년 5월 3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해 미사를 봉헌했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 한국 가톨릭 신학교의 발전

한국 가톨릭 신학교의 발전은 두 가지 관점으로 그 기원을 추적해 볼 수 있다. 먼저 한국에서 최초의 가톨릭 신학 교육을 언제 시도했느냐 하는 관점과 또 하나는 언제 가톨릭 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쳤느냐 하는 관점이다.

최초의 신학 교육
한국 천주교회의 설립 이후, 우선 국내에서 최초의 가톨릭 신학 교육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기원은 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한 3명의 프랑스 성직자와 신학생으로 선발된 정하상(丁夏祥, 1795~1839, 바오로), 이재의(李在誼, 1808~1868, 토마스)와 그들의 동료 2명에게까지 소급될 수 있다. 또한 한국 교회 설립 이후 한국인으로서 국외에서 최초의 가톨릭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은 1836년 마카오에서 수업을 받았던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최양업(崔良業, 鼎九, 1821~1861,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과출,1821~1837,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고, 이중에서 김대건과 최양업은 신품성사를 받고 귀국하여 사제로 활동하였다.
1850년 무렵부터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Ferr´eol,高, 1808~1853, 요셉) 주교의 지시로 처음에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가 용인 손골과 진천 배티에서, 후에 최양업 신부가 배티 등에서 몇몇의 신학생들에게 라틴어와 한문을 가르쳤던 일, 1854년 메스트르(Maistre, 李, 1808~1857, 요셉) 신부가 배티 신학교의 신학생 3명을 모두 말레이반도의 페낭(Penang, 彼南) 신학교로 유학을 보낸 일 등도 모두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려는 신학 교육의 일환이었다.

최초의 신학교
한편 2005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설립 150주년 기념 화보집으로 제작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855~2005》에 의하면, 1855년 충청도 제천에 세워진 배론(舟論)의 성 요셉신학당에 현재의 가톨릭대학교의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근대적 서구 문물과 함께 도입된 서구식 신학 교육의 출발점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1885년 10월 28일 강원도 원주 부엉골(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설립된 예수 성심 신학교에 그 기원을 둘 수 있다.
부엉골 신학교는 교명, 교수진, 학생, 설립 이념 등을 감안할 때 현재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직접적인 전신이 되고 있다. 1886년 한불 조약 체결 이후이 신학교는 1887년 3월 서울 용산(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 1)으로 이전하였다. 중등과 3년, 철학과 2년, 신학과 3년 과정으로 철학, 신학뿐만 아니라 라틴어, 한문, 역사, 지리, 천문 등을 가르쳤으며,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1855~1893, 아나톨)신부가 초대 교장직을 맡았었다.

지방 신학대학의 설립
1911년 4월 대구대목구의 설정과 함께 1914년 10월 대구에도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27년 베네딕도 수도회에 의해 함경도 덕원에 대신학교가 설립되어 덕원, 서울, 대구에서 각각 한국의 북부, 중부, 남부의 대신학교 교육을 나누어 담당하게 되었다.1929년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를 대신학교로 개칭하고 전문부 3년과 대학부 4년을 두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1942년 서울의 예수 성심 신학교는 폐교되었다가, 1945년 2월 경성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로 개칭하고 설립 인가를 받아 예과 4년과 고등과 2년의 중등 교육과정, 본과 4년과 연구과 2년의 고등 교육과정을 설정하였다. 이러한 교육과정을 갖추고 해방 후 혜화동에서 정식으로 개교하여 남한 출신의 신학생들과 덕원 신학교에서 피난 온 신학생들과 해외 유학에서 돌아온 신학생들을 받아들여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종합대학교로의 발전
1947년 성신대학으로, 1959년 2월에는 교명을 가톨릭대학으로 변경하여 인가를 받았고, 신학부와 의학부의 편제를 두게 되었다. 1972년부터 성직 희망자가 아니더라도 가톨릭 신학을 전공할 수 있도록 수도자와 평신도에게 입학이 허가되었고, 여학생에게도 입학이 허가되는 남녀 공학으로 학제를 개편하였다.
1992년 7월에는 교명을 가톨릭대학에서 가톨릭대학교로 개칭하고 동시에 신학부를 신학대학으로, 의학부를 의과대학으로 재편하고, 1986년부터 제기되어온 성심여자대학교와의 통합을 통한 종합대학교로 전환하는 데 노력하여, 1993년 12월 양측이 통합에 정식으로 합의함으로써 1995년도부터 가톨릭대학교는 명실상부한 가톨릭계 종합대학교로 부상하게 되었다.

◆ 초기의 사제들

한국인 사제 양성은 1831년 9월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1835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선교사 모방(베드로) 신부는 이듬해 초부터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인재를 탐문, 신학생으로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선발, 그해 12월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1837년 입국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라우렌시오) 주교 역시 정하상(바오로), 이문우(요한) 등 4명의 신학생을 선발해 직접 신학교육을 시켰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4년 중국 장춘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함께 받고, 중국 상해에서 1845년 8월17일과 1849년 4월15일에 각각 사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도 채 못되어 순교하였고, 최양업 신부는 1849년 말 귀국, 1861년 6월15일 선종할 때까지 10년 6개월간 전국을 누비며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다.
조선교회는 박해 와중에도 한국인 사제 양성을 위해 1855년 충북 제천 배론에 '성 요셉신학교'를 세워 신학생들을 교육했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학교를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조선교회는 1882년부터 말레이 반도 페낭 신학교로 신학생을 선발해 유학을 보내 사제 양성에 힘썼다.
한국인 세 번째 사제는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지 50년 만에 탄생했다. 그 첫 결실이 1896년 4월 26일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에서 뮈텔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은 강도영(마르코), 정규하(아우구스티노), 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사제품을 받았지만 나이순에 따라 강도영(1863~1928) 신부가 세 번째, 정규하(1863~1943) 신부가 네 번째, 강성삼(1866~1903) 신부가 다섯 번째 사제로 각각 기록된다.
사제교육을 위한 이들의 여정은 험난했다. 서울을 출발, 인천 부산을 거쳐 일본 나가사끼 홍콩, 또다시 싱가포르를 지나서야 최종 목적지인 말레이 반도 페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페낭까지 무려 50여일이 걸린 유학길이었다.
페낭 유학 생활은 강성삼이 1882년에, 정규하가 1883년 그리고 강도영은 제일 늦은 1883년에 시작하였다. 이들을 비롯한 페낭의 조선 유학생들은 언어와 풍습, 기후와 음식이 다른 땅에서 풍토병에 시달리는 등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명예를 위하여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분투해" 2~3개월 만에 라틴어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 이들 조선 유학생들이 다른 풍토와 기후 그리고 음식 등의 차이로 건강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국내에 신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신학생들을 귀국시켰다.
블랑 주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 1885년 10월, 7명의 신학생으로 문을 열었다. 블랑 주교는 이듬해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자마자 서울 인근에 신학교 부지를 물색, 1887년 3월에 용산신학교 터(현 성심여고 자리)를 매입, 부엉골 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귀국한 페낭 유학생들은 용산신학교에서 수학, 마침내 1896년 4월26일 강도영, 정규하, 강성삼 세 부제가 사제품을 받았다. 한국 땅에서 거행된 최초의 사제 서품식이었다. 한국인 세 번째 사제인 강도영 신부와 네 번째 정규하 신부, 다섯 번째 강성삼 신부는 각각 경기도 안성 미리내 본당과 강원도 횡성 풍수원 본당, 경남 밀양(당시 명례) 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사목활동을 하였다.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에서 34년간 사목하면서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 묘소를 단장하고 그 옆에 기념 경당을 건립했으며, 애국계몽운동 일환으로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양잠과 농업기술을 가르쳐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정규하 신부는 본당 부임과 함께 '투전'에 빠져 있는 신자들을 바로잡는 일에 힘썼으며, 지금의 풍수원 성당을 건립하였다. 또 1920년부터 매년 6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성체거동' 행사를 거행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울러 성당 사랑방에 '삼위학당'을 세워 한글과 한문, 수학, 역사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삼위학당은 오늘날 광동초등학교로 발전하였다.
강성삼 신부는 밀양 본당에서 진양, 양산, 언양 등 14개 공소와 500여 명의 교우를 대상으로 사목하던 중 6년 만에 37세로 요절하였다. 페낭 신학생 시절 얻은 풍토병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당시 사제가 되기 위해 걸어야했던 험난한 길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그와 함께 페낭 유학길에 올랐던 21명의 신학생 가운데 7명이 병사한 사실 역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한편 조선교회는 이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통해 1897년 여섯 번째 이내수(아우구스티노), 일곱 번째 한기근(바오로), 여덟 번째 김성학(알렉스) 신부를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1900년까지 12명의 사제를 배출하였다.

■ 순교자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1846)
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1836년 나 베드로(모방) 신부는 그를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그는 6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1845년 8월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서울과 용인 지방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846년 음력 4월 주교의 명에 따라,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김 신부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서울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취조 중 김 신부의 넓은 식견과 당당한 태도에 대관들은 그를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고 생각하였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의 처형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신학생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교우들이 사제 성소 증가에 힘껏 노력하도록 은총 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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