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불화,탱화

삼화사 三和寺

문성식 2015. 6. 8. 16:49
소재지 : 동해시 
원문참조 및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전통사찰종합정보
삼화사 홈페이지 
사진출처 :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두타산(頭陀山)에 있는 절.

 

〔창 건〕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옛날에는 삼공사(三公寺) 또는 흑련대(黑蓮臺)라고도 하였다.

석식영암(釋息影庵)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말에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삼화사 자리에서 모의(謀議)를 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1393년(태조 2) 조선의 태조가 칙령을 내려 이 절의 이름을 문안(文案)에 기록하고 후사(後嗣)에 전하게 하면서, 신인(神人)이 절터를 알려준 것이니 신기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 옛날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 영험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三和寺:삼국이 화합하여 통일이 되었다는 뜻)로 고쳤다고 한다.

 

한편, 읍지(邑誌)에 의하면, 옛 사적(史蹟)에 이르기를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오대산을 돌면서 성적(聖蹟)을 두루 거쳐 돌아다니다가 두타산에 와서 흑련대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삼화사라고 하였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1년(642)의 일로 적혀 있다.

또, 고적(古蹟)에 의하면,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중(仲)·계(季) 삼형제가 처음 서역에서 동해로 돌배〔石舟〕를 타고 유력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 와서 맏형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청련(靑蓮)을 손에 가지고 청련대(靑蓮臺)에, 막내는 금련(金蓮)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각각 머물렀다고 하며, 이곳이 지금의 삼화사·지상사·영은사라고 전한다.

또, 약사삼불은 용을 타고 왔는데 그 용이 변하여 바위로 되었으며, 바위 뒤쪽에는 약사삼불이 앉았던 자리가 완연한 형태로 남아 있다고 하며, 약사삼불의 손은 외적(外賊)이 잘라 땅 속에 묻었다고도 한다.

 

삼화사의 기원에 관해서는 조선시대에 기록된 자료들을 통해 창건에 관한 여러 설이 전하고 있는데, 이들 자료에 따르면 신라시대에 흑련대(黑蓮臺)ㆍ삼공사(三公寺) 등의 이름으로 세워진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삼화사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먼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범우고(梵宇攷)』에 나타난 식영암(息影庵) 스님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말에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지금의 삼화사 자리에 모여 무엇인가 모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떠난 후 마을사람들은 그곳을 삼공(三公)이라 불렀으며, 얼마 뒤에 사굴산문(?堀山門)의 개산조인 범일(梵日) 국사가 이곳에 들러 절을 창건하고 삼공사(三公寺)라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가 칙령을 내려 이 절의 문안(文案)에 기록하고 후사(後嗣)에 전하게 하면서 신인이 절터를 알려준 것이니 신기한 일이라 여기면서, 그 옛날 신성한 왕이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의 영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해 절 이름을 삼화사로 고쳤다고 한다.

 

한편 1847년(헌종 13)에 최시영(崔始榮)이 쓴 『두타산삼화사고금사적(頭陀山三和寺古今事蹟)』에서는 고적과 읍지 등의 내용을 인용하여 삼화사의 연혁을 적고 있다. 이 사적에 따르면, 자장조사(慈藏祖師)가 당에서 돌아와 오대산을 두루 돌면서 성적(聖蹟)을 다니다가 두타산에 흑련대(黑蓮臺)를 창건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삼화사이며, 신라 제24대 선덕여왕 11년(643)의 일이라 적고 있다. 이 사적기에서는 고적의 내용을 인용하여,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ㆍ중(仲)ㆍ계(季) 삼형제가 서역에서 돌배를 타고 두루 돌아다니다가 동해에 이르러 그들이 타고온 배를 용으로 변화시켜 두타산에 이른 뒤 맏형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청련(靑蓮)을 가지고 청련대(靑蓮臺)에, 막내는 금련(金蓮)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머물렀는데, 이들이 각기 지금의 삼화사ㆍ지상사(池上寺)ㆍ영은사(靈隱寺)라 전한다고 하였다. 또한 이 기록에는 고려말에 시어사(侍御史)를 지낸 이승휴(李承休)가 절 가까이에 객안당(客安堂)을 짓고 『제왕운기(帝王韻紀)』을 저술하였으며, 이곳에서 10여 년간 삼화사에 있는 불경을 독파하다가 객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하고 간장암(看藏庵)이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이처럼 삼화사는 범일국사 창건설과 자장율사 창건설이 전하고 있는데, 현재 사찰에서는 자장스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1898년에 쓴 『삼화사중건기(三和寺重建記)』에 의하면, 1747년(영조 23) 홍수와 산사태로 인해 절이 무너지게 되어 옛터에서 조금 위쪽으로 옮겨서 새로 지었고, 1820년 화재가 나서 1824년(순조 24)에 중건하였다. 1829년(순조 29)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정원용(鄭元容)ㆍ이기연(李紀淵)ㆍ이광도(李廣度)ㆍ윤청(尹晴) 등이 협력하여 중건하였고, 1869년(고종 6) 화운(華雲)ㆍ덕추(德秋) 스님이 단청을 하였다. 1873년(고종 10)에 선당(禪堂)을 세웠으며, 1896년에는 학송(鶴松)ㆍ창명(彰明)ㆍ의경(誼鏡) 스님 등이 승당(僧堂)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나라의 주권을 잃게 된 데 분노한 삼척지방의 의병들이 봉기하여 삼화사를 거점으로 삼게 있자, 1907년 왜병들이 대웅전ㆍ선당 등 200여 칸에 달했던 사찰건물을 모두 불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듬해인 1908년에 승려와 마을민들이 합심하여 다시 대웅전ㆍ칠성당ㆍ요사채 등을 새롭게 세웠다. 현재의 삼화사는 1977년 쌍용양회 동해공장의 채광석권에 속하게 되어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는데, 1908년에 중건된 건물들을 모두 그대로 옮겨왔을 뿐만 아니라 옛 전성기 때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계속 불사(佛事)를 해나가고 있다.

 

아래 삼화사 홈페이지 자료  향토지에는 삼화사가 언제나 내고장의 자랑스러운 절로 소개되고 있다. 반대로 허목이 남긴 〈두타산기〉는 삼화사지에 전재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삼화사가 동해시의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친화적인 사찰임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고적(古蹟)에 이르기를 “자장조사가 처음 당나라를 다녀온 후 본국의 오대산에 돌아와 성인의 자취를 두루 유력하다가 두타산에 이르러 흑련대(지금의 삼화사)를 창건했다. 이때가 신라 27대 선덕여왕 11년이고, 당나라 연호로는 정관 16년(642)이었다. 절은 관음, 지장, 미타, 나한, 보질도 각 24방이었다. 뒷날 10리 서쪽 중대로 12방을 지어서 옮겼다. 그러나 회양의 재난으로 옛날 삼화사의 연대는 알 수 없게 되었고, 이를 기록한 문헌도 다 증빙할길이 없게 되었다.”

 

여기서 ‘고적(古蹟)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자료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앞서 살펴본 기록 외에 다른 자료가 더 있다는 것인지 전해 오는 말이 그렇다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삼화사고금사적》이《삼국유사》에 나오는 자장조사의 전기를 인용하여 창건의 내력을 밝히려 하고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자장율사가 이 절의 역사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은 버릴 수 없다. 아무리 사찰의 역사를 고승에게 가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삼화사의 경우는 자장의 관여를 추정할 수 있는 정황적 증거가 도처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장이 삼화사 창건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우선 삼화사의 지리적 위치와 관계가 있다. 자장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전기에 따르면 말년을 강릉(지금의 평창, 신라 때에는 평창, 강릉, 삼척지역이 다 강릉 관할이었다) 수다사에서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문수대성이 나타나 “대송정에서 만나자”고 했다가 다시 “태백산 갈반지(葛蟠池,淨巖寺)에서 만나자” 는 약속을 한다. 자장은 문수를 만나기 위해 갈반지에 석남원을 짓고 기다렸으나 문수가 거지 행색을 하고 나타나자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문수는 “아상(我相)이 있는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느냐”면서 사라졌고, 자장은 문수를 쫓아가다가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장이 문수대성을 만나기 위해 몇 군데를 헤맨다는 사실이다. 이때 자장이 삼화사에서도 초막을 짓고 기다렸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암사사적편(淨巖寺事蹟篇)〉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자장은 귀국 후 황룡사와 월정사에 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이어 대화사(大和寺)와 사자산에 사리를 봉안했다. “이후 법사는 재차 대화사에 머물고 있는데 홀연히 범승이 나타나 ‘그대를 태백산에서 다시 보리라’ 하고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의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는 자장이 수다사에 있다가 태백산 갈반지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정암사사적편〉은 대화사에 있다가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를 보다 신빙성 있는 자료로 본다면 정암사쪽의 기록은 무엇인가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기록, 특히 고승의 기록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그래서 향인(鄕人)의 기록도 때로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대화사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그냥 착오로만 단정할 일은 아니다. 《삼국유사》가 빠뜨린 기록을 사찰의 사적기가 적어 놓을 수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대화사’가 과연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자료상 자장이 관여한 절로는 울산에 있는 ‘태화사(太和寺)’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절은 자장이 중국의 태화사를 모방해 지은 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장이 강릉의 수다사를 떠나 문수대성을 기다렸다는 절로서는 거리가 너무 멀어 오히려 태백산에서 가까운 삼화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추론은 《삼화사고금사적》에 나오는 〈자장조사전기〉를 보면 하나의 윤곽이 떠오른다.

 

(자장은) 문수를 친견하기 위해 삼척주의 두타산에 찾아가서 삼화사지에 이르러 초암을 짓고 3일간 머물렀다. 이때 산음이 침침해서 열리지 않으므로 그 형세를 살피지 못하고 떠나갔다가 후에 다시 와서 팔척방을 창건하여 7일 동안 머물렀다. ……뒤에 큰 소나무 밑에 (지금의 학소대 아래) 한 거사가 홀연히 나타나 말하기를 “예전에 했던 약속을 그대는 기억하는가?” 하고는 사라졌다. 스님은 그가 범승의 화현임을 알고 즉시 태백산으로 돌아가 기다렸다.

 

자료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지만 《삼화사고금사적》은 〈정암사사적편〉과 거의 비슷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정암사쪽의 기록은 자장이 머문 곳을 ‘대화사’로적고 있는 반면 삼화사쪽의 기록은 ‘삼화사’로 적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삼화사쪽의 기록이 훨씬 구체적이다. 이들 자료의 상관성과 동이(同異)관계는 자장이 삼화사 창건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추적하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즉, 자장은 태백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타산 삼화사에 머물렀는데, 〈정암사사적〉을 기록하는 사람이 이를 대화사로 기록했을 가능성이다. 삼화사 창건에 자장이 관여했다는 기록이 사중(寺中)에 남아 있는 한 이 기록은 그렇게 해석될 만한 충분한 개연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사실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장이 삼화사 창건에 관여한 시기에 관해서는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현재 정암사를 비롯한 월정사, 삼화사등 자장이 관여한 사찰의 창건연대는 한결같이 선덕여왕 11년(642)으로 기록되고 있다. 여기에는 분명히 기록자들의 착오가 보인다. 선덕여왕 11년은 자장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한해전이다. 자장은 선덕여왕 12년(정관17, 643)에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대국통으로 임명되어 선덕여왕 14년(645) 황룡사 구층탑을 완성한다. 진덕여왕 4년(650)에는 당나라 연호를 사용토록 건의하고 한해 전에는 중국식 제도에 따라 관복을 입도록 건의한다.

 

자장의 전기는 그 뒤 나이가 더 든 말년에 강릉 수다사에 머물다가 문수대성을 친견하기 위해 태백산 등을 유력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선덕여왕 11년, 즉 한 해 동안 삼화사를 비롯한 영동지방 사찰들을 창건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삼화사고금사적》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장의 귀국이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정관 17년이고, 또 경주에서 대국통으로 활약한 사실이 마지막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진덕여왕 4년(650)이라면 그 이전에 삼화사 창건에 관여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자장이 삼화사 창건에 관여했다면 그 시기는 《삼국유사》에 기록이 남아 있는 650년 이후라야 가능하다. 이는 앞으로도 더 상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삼화사의 창건과 관련해서 이밖에도 또 하나 검토해 볼 자료가 있다. 이는 자장이나 범일과 같은 인물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삼화사가 처음 터를 잡던 때의 설화에서 연유한다.

 

우선 《강원도지》에 실린 설화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두타산에는 3선(禪)이 들어와 산의 네 곳을 연꽃으로 표시했다. 즉, 동쪽을 청련대라 했으며 서쪽을 백련대라 했다. 그리고 북쪽은 흑련대라 했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옛날 서역에서 약사여래 삼형제가 와서 머물렀는데 큰형(伯)은 삼화사에 있었으며 가운데(仲)는 지장사에 머물렀다. 그리고 막내(季)는 궁방에 있었다.

 

이때가 범일국사가 굴산사로 오기 22년 전인 신라 흥덕왕4년(829)이라는 것이 《강원도지》의 기록이다. 《삼화사고금사적》은 이 설화를 좀더 구체화시켜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삼화사고금사적》의 기록이다.

 

고적에 말하기를 약사삼불은 본래 서역으로부터 동해를 지나 일편(一片) 석주(石舟)에 실려 와서 본국에 이르렀는데 가장 큰 부처님은 손에 검은 연꽃을 지녔고, 두 번째는 푸른 연꽃을 지녔고, 세 번째는 금색 연꽃을 지녔다. 하나는 흑련대(삼화사)에 있고, 하나는 청련대(지상촌)에 있으며, 하나는 금련대(영은사)에 있었다. 혹은 이르기를 세 부처님이 탔던 용신이 변하여 암석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앞에서 살펴본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즉 승람은 “신라말에 세 사람의 선인이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여기에 모여 회생하였다”고 쓰고 있는데 《강원도지》는 이를 보다 신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삼화사고금사적》은 보다 구체적으로 삼선(三禪)과 삼불(三佛)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들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은 “삼(三)자”가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도지에는 삼선이라든가 삼불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승람에서는 삼신인(三神人)이 머물렀다 해서 삼공암(三公庵)이라 했다로 적고 있다. 이러한 일치는 우연이기보다는 하나의 설화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이지만 나중에 사찰명이 삼화사로 바뀌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삼화사가 삼공암이란 이름 대신 삼화사로 개명되어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고려초의 일로, 그 사연은 앞에서 인용한 그대로 “신성왕(神聖王, 고려태조)이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그 영험이 현저하였으므로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삼화사 사명(寺名)의 유래를 밝히는 단서가 된다.

 

지금까지의 검토에 의하면 삼화사 창건연대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이 창건했다는 7세기설이고, 또 한가지는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개창했다는 9세기설이다. 마지막으로는 흥덕왕 때 창건됐다는 설이있다. 이중 세 번째 설은 신화적 요소가 많은 데다가 창건관계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또 이 관련설화는 범일창건설의 전사적(前史的) 성격이 강하므로 범일창건설과 같은 범주에 넣어도 무리가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삼화사의 창건은 자장에 의해서냐 범일에 의해서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중 하나만 취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두 자료 사이에는 모두 그럴듯한 이유나 근거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자료를 취하고 어떤 자료를 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인가. 두 가지 자료를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다. 즉 삼화사 창건에 최초로 관계가 있는 인물로는 가장 연대가 앞서는 자장을 택하고, 그로부터 2세기 뒤에 사굴산문이 명주를 중심으로 번창하는 과정에서 범일의 중창, 또는 삼화사의 사굴산문 편입으로 보는것이다. 여기서 자장을 취하는 또하나의 이유는 사전(寺傳)자료에 대한 신빙성이다.

 

삼화사가 17세기경 무려 다섯 차례나 사사를 정리하면서 자장을 창건주로 확정한 것은 무엇인가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범일이나 자장이 모두 당대에 존경받는 고승이었으므로 삼화사가 범일의 창건을 굳이 자장으로 바꿀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더욱이 사전자료들이 그때로서는 ‘고적’이나 ‘고로(古老)들의 구전설화’를 취재해서 집필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자장창건, 범일중창의 사사기록에 대한 신빙성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초창의 연대를 선덕여왕 11년(642)으로 기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앞에서도 검토했듯이 이때는 자장이 귀국하기 전이다. 자장이 영동지방 사찰창건에 관계한다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최종기록인 진덕여왕 4년(650) 이후라야 한다.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서 국가적 존경과 귀의를 받던 자장이 영동지방으로 옮겨온 것은 그의 인생이 황혼기로 접어든 650년 이후의 말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건시기의 상한선을 아무리 올려 잡는다 해도 삼화사 창건은 650년 이전이 될 수는 없다.

 

이상의 고찰을 종합해 볼때 삼화사가 동해지방의 유수한 사찰로 기초를 닦은 것은 신라 진덕여왕 4년(650) 이후 자장율사에 의한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삼화사가 처음부터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직 절 이름조차 제대로 없는 작은 토굴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삼화사가 역사의 전면에 얼굴을 드러내게 된 것을 사굴산문으로 편입되는 문성왕 13년(851)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삼화사는 ‘삼공암(三公庵)’이라는 최초의 사명을 갖게 된다. 이때부터 삼화사는 명주 사굴산문의 수사찰로 사세를 거듭 확장해 나가게 되었다. 이상 삼화사 홈페이지 자료

 

〔중 창〕

이 절은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1747년(영조 23) 홍수와 사태로 인하여 무너지자 옛터에서 조금 위로 옮겨 지었고, 1820년(순조 20) 화재가 나서 1824년에 중건하였으며, 1829년 다시 불타자 정원용(鄭元容)·이기연(李紀淵)·이광도(李廣度)·윤청(尹晴) 등이 서로 협력하여 중건하였다.

 

1869년(고종 6) 화운(華雲) 덕추(德秋)가 단청을 하였고, 1873년(고종 10) 선당(禪堂)을 세웠으며, 1896년 학송(鶴松)·창명(彰明) 등이 승당(僧堂)을 지었다.

 

이처럼 수차례의 화재와 중건을 거쳐오다가 1907년에는 의병(義兵)이 숙박하였다는 이유로 왜병(倭兵)들이 방화하여 대웅전·선당 등 200여 칸이 소실되었다. 그 이듬해 이 중 일부를 건축하였으며, 1979년 8월에 무릉계반(武陵溪盤) 위쪽으로 절을 옮겨 중건하였다.

 

〔당우와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약사전(藥師殿)·요사채·삼성각·육화료(六和寮)·큰방·천왕문·일주문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삼층석탑 1기를 비롯하여 운암당상준대사부도(雲巖堂尙俊大師浮屠)와 원곡당대선사부도(元谷堂大禪師浮屠) 및 비(碑)가 있다.

이 가운데 대웅전 안에 안치된 철불은 창건설화와 관련된 약사삼불 가운데 맏형의 불상이라고 전해지며, 삼층석탑은 높이 4.95m로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한편 삼성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철불(鐵佛) 한 구가 있었는데, 1997년 이 철불 뒷면에서 조성 당시에 새겨진 명문(銘文) 150여 자가 발견되었다. 명문의 판독 결과 이 철불이 9세기 중엽에 조성된 노사나불(盧舍那佛)임이 밝혀졌다.

명문 가운데는 이두(吏讀)가 포함되어 있으며, 불상 조성에 관계되었던 결언(決言) 등의 승려와 시주자들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등, 당시의 사회·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1998년 12월 보물 제1277호로 지정되었으며, 절에서는 대적광전을 지어서 이 철불을 봉안하고 있다.

 

특히, 고려 말의 이승휴(李承休)는 이 절 가까이에 객안당(客安堂)을 짓고 이곳에서 ≪제왕운기 帝王韻紀≫를 저술하였으며, 10여 년 동안 불경을 독파하다가 객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하고 간장암(看藏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의 주변에는 대승암(大乘庵)·성도암(成道庵)·은선암(隱仙庵)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설이 깃들어 있는 명승지인 두타산성(頭陀山城)·오십정(五十井)·용추폭포·학소대(鶴沼臺) 등이 유명하다.

 

〔가람배치〕

삼화사는 1977년에 절을 현재의 터로 이전하면서 새롭게 정비되었다. 현재의 가람은 무릉계곡을 바라보고 정남향하여 자리하고 있는데, 크게 적광전(寂光殿)을 중심으로 여러 전각들이 위치하고 있는 영역과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한 영역, 그리고 비로전 영역으로 구분된다. 우선 천왕문(天王門)을 통해 경내에 들어서면 앞마당의 중심에 삼층석탑이 서있고, 그 좌우로 공수실(供需室)과 육화료(六和寮)가 서로 마주보고 위치해 있으며, 천왕문 좌우로 무향각(無香閣)과 범종각(梵鍾閣)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삼화사의 중심법당인 적광전은 천왕문ㆍ삼층석탑과 이어지는 축선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높게 2단으로 쌓아 올린 석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적광전의 왼편에는 극락전(極樂殿)과 칠성당(七星堂)이 적광전을 바라보며 동향해 있고, 오른편에는 약사전(藥師殿)이 서향한 채 적광전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사이에 지장보살상이 서 있다. 이밖에 비로전은 적광전과 칠성당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간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한편 천왕문 밖으로 계곡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일주문과 동해불교대학 건물이 있고, 천왕문 위쪽으로는 두타선원(頭陀禪院)이 자리하고 있으며, 부도전(浮屠田)은 동해불교대학 뒤편 숲 속에 자리하고 있다.

 

〔설화〕

신라 서라벌에 진골 출신의 아름다운 세 처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집안어른들끼리 왕래가 잦고 가깝게 지내는 사이었으므로 절친하게 지냈다. 혼기를 맞은 그녀들이 신랑감을 고를 무렵, 신라와 백제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청년장수 김재량은 전쟁에 나가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 왕궁에서는 김재량을 위해 축하연을 열었는데, 공교롭게도 세 처녀가 모두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김재량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세 처녀를 본 그 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고, 처녀들 또한 김재량을 사모하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이윽고 그녀들은 각자의 시녀를 통해 연정을 전하기에 이르렀고, 김재량은 뛸 듯이 기뻐하며 하나도 아닌 세 처녀를 번갈아가며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소문은 널리 퍼지게 되어 세 처녀는 좋은 친구 사이에서 서로 질투하고 적대시하는 사이로 변했다. 그러던 중 신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하게 되어 다시 전쟁터로 나가서 많은 공을 세우고 돌아오던 김재량이, 그만 고구려군 첩자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김재량을 너무도 사랑했던 세 처녀는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어 모두 산으로 들어가 두타고행을 하여 마침내 여신이 되어, 산이름도 두타산이라 칭하게 되었다.

 

나림여신ㆍ혈례여신ㆍ골화여신이 된 그들은 신력을 갖추고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는지 김재량의 죽음을 서로의 잘못으로 미루며 저주했고, 그곳 주민들이 산에 치성을 드리지 않으면 노여워하며 재앙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대산에 성지를 개산하고 동해안으로 내려오던 자장율사(慈裝律師)가 두타산의 산세에 감격하여 그곳으로 향했다. 이때 자장율사를 본 나림여신은 자신의 도를 시험하는 한편 스님이 산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여 스님을 유혹했다.


 

“스님,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이 산의 산세가 하도 좋아 절을 창건할 인연으로 찾으러 왔소.”
“참으로 거룩하십니다. 저도 따라가고 싶사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산길이 험하고 힘들 것이니 훗날 절이 세워지거든 오시지요.”


여인의 동행을 거절한 자장스님은 초가을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산길을 삼경이 가깝도록 걸었다. 문득 인기척이 나는 듯싶어 뒤를 돌아본 스님은, 먼발치에 여인이 뒤따르고 있는 것을 보고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은 모르는 척 걸음을 재촉한 뒤 골화전에 이르러 외딴 주막집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하룻밤 유숙하기로 했다. 어느새 따라 들어온 여인은 스님이 계신 방에 주안상을 들고 들어왔다.


 

“목이 컬컬하실 텐데 우선 한 잔 드시지요.”


잠시 대답이 없던 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여인이여, 당신은 지금 신력을 얻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유혹하는구려. 자신의 몸뚱이가 더러운 물건을 싸가지고 다니는 것인 줄 모른다면 이는 전도된 인생이오. 그 정도의 신력을 얻었으면 좀더 공부하여 열반의 세계에 안주토록 하시오.”
나림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스님! 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앞으로 깊은 불법을 일러주십시오.”
“나림 여신이여! 참으로 장한 발심입니다.”
“어떻게 제 이름을…?”
“내가 잠시 선정에 들어 관(觀)하여 보았다오.”


나림은 감동하여 그 시각부터 스님에게 귀의하고, 곧 처소로 돌아와 혈례와 골화 여신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함께 귀의할 것을 권했으나 두 여신은 비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까짓 스님 하나 유혹 못하고 오히려 매수당하다니 우리 여신들의 체통이 말이 아니로군. 우리 둘이 함께 가서 혼을 내주고 이곳에 절을 짓지 못하게 하자. 만약 절을 세우면 주민들이 우리에게 공양을 올리지 않을 테니까.”
“그 참 좋은 생각이구나.”


혈례와 골화는 즉시 호랑이로 변신하여 자장스님 앞에 나타나 길을 막았다.


 

“이런 무례한 노릇이 있나. 아무리 축생이기로서니 스님의 길을 막다니, 어서 썩 물러가거라!”
“어흐흥!”


호랑이들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 기세를 보이자 스님은 금강삼매에 들어 몸을 금강석같이 굳혔다. 한 마리는 발톱으로 스님을 내리쳤고 또 한 마리는 스님의 옆구리를 물었으나, 사납게 달려든 호랑이는 발톱과 이빨만 다치고 말았다. 호랑이는 더욱 화가 나서 맹렬히 달려들다가 결국은 꼬리를 사리면서 도망치고 말았다. 이때 스님이 주문을 외우니 큰 칼을 든 금강역사가 나타나 도망치는 호랑이를 한 손으로 잡아왔다.


 

“자 이제 너희들의 본색을 드러내거라.”


어쩔 수 없이 본 모습으로 돌아간 여신들은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들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잘못을 알았으면 두 번 다시 그런 죄를 범하지 말도록 하시오. 미움과 시기, 질투는 모두 욕심에서 비롯되니 오늘부터 욕망의 불을 끄는 공부를 하여 이미 얻은 신력으로 중생을 이익하게 하시오.”


이때 언제 왔는지 나림여신이 와 있었다.


 

“스님, 스님의 원력으로 우리 모두 발심하게 되었음을 깊이 감사드리며 제가 앞장서서 금당 자리를 안내하고 스님을 도와 사찰 창건에 동참하겠습니다.”


자장율사는 나림여신이 인도한 장소에서 불사를 시작하니 세 여신은 장사로 변하여 무거운 짐을 나르고 마을주민들이 힘을 모아 절은 쉽게 세워졌다. 그 후 세 여신이 화합 발심하여 창건한 절이라 하여 이 절을 삼화사(三和寺)라 명했고 마을이름도 삼화동이라 불리고 있다.

 

 노사나철불에 얽힌 설화 삼화사에는 신라 때부터 모시고 있는 철불이 1좌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부처님은 약사삼형제불로 서역에서 석주(石舟)를 타고 동해로 와 두타산에 앉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서역도래설은 동해안 일대의 사찰에서 몇 군데 더 나타난다.

 

이를테면 금강산 건봉사에는 53불이 들어왔는데 서역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 경주의 기림사는 천축의 광유화상이 불상과 제자를 데리고 와서 절을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이는 동해안지방 사찰들의 불연(佛緣)이 멀리 인도에 닿아 있음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방편설화라 할 것이다. 삼화사 철불의 도래설도 이런 맥락 가운데 하나로 보이지만 이로 인해 지방주민들의 종교적 신심 또한 매우 두터웠던 점은 이 도래설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추측케한다.

 

다음은 <삼화사고금사적>에 기록된 철불의 유래와 그 뒤에 생긴 설화를 정리한 것이다.
옛날 아직 두타산이 절터를 열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삼척의 정라진 포구에 석주가 한 척 정박했다. 돛대도 없고 삿대도 없는 배였지만 스스로 미끄러지듯 뱃길을 따라 바다를 가르고 포구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정박했다. 배가 멈추자 선복에서는 잘생긴 육척장신의 대장부 세 사람이 내렸다. 세 사람의 얼굴은 모두 금빛으로 빛났으며 몸에는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이들은 각각 손에 연꽃을 한 송이씩 들고 있었는데 큰형으로 보이는 부처님은 손에 검은 연꽃을, 둘째는 푸른 연꽃을, 셋째는 금색 연꽃을 들고 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서역에서 온 약사불 삼형제였다.

 

약사불 삼형제는 곧장 서쪽으로 우뚝 솟은 두타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큰형으로 보이는 약사불이 걸음을 멈췄다. 좌우로 산세를 둘러보니 검음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서 도를 닦고 중생을 제도할 만한 길지(吉地)였다. 형이 동생들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 터를 잡겠다. 이곳은 천하의 명산이니 둘러보면 너희들이 머물 곳도 있을 것이다. 각각 터를 잡은 후 다시 만나자.”

 

이렇게 하여 큰형은 삼화촌에 자리를 잡았다. 둘째가 터를 잡은 곳은 야트막한 구릉이 있는 지상촌이고, 셋째는 그 보다 조금 떨어진 궁방촌에 자리를 잡았다. 삼형제가 자리를 잡자 곧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삼형제는 모두 변설이 뛰어나고 인품이 훌륭해 곧 이들을 교화해 제자로 만들었다. 제자들은 각각 자기들이 스승으로 모시는 약사불을 위해 절을 지었는데 큰형의 절은 흑련대, 둘째는 청련대, 첫째는 금련대라 했다.

 

삼형제는 때가 되면 흩어져 사는 형제를 찾아가 서로 위로하고 공부한 바를 토론하기로 했다. 두 아우가 형이 있는 곳으로 무리를 거느리고 찾아오면 형은 예를 다해 이들을 맞이하고 고준한 담론을 나누었다. 따라온 무리들은 이들의 담론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졌다. 또 얼마가 지나면 이번에는 둘째의 집으로 방문하고, 다음은 셋째의 집을 하는 식으로 돌아가며 방문했는데 그 우애가 지극했다. 이렇게 교화활동을 펴던 약사삼불은 사람들의 인심이 순화되고 불심이 깊어지자 이제 다른 곳으로 떠날 때임을 알았다. 어느 날 형은 동생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이제 이곳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정화되어 부모에 경순하고 형제끼리는 우애하며 이웃간에는 화목하니 더 이상 교화할 일이 없다. 그러나 아직 다른 곳에 있는 중생들은 마음이 거칠어 우리의 교화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 이제 곧 다른 곳으로 떠나자. 그러나 우리가 떠난 뒤 세월이 한참 더 지나면 인심이 다시 황폐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떠나기는 하되 등신불(等身佛)을 남기고 가자. 그리하면 사람들이 그 등신불을 보고 언제나 우리의 가르침을 기억할 것이다. 등신불은 세세토록 변하지 않도록 철불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

 

형의 말을 들은 동생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약사삼형제는 어느 날 철불로 등신을 남기고 두타산을 떠났다. 약사삼형제가 갑자기 사라지자 이들을 따르며 가르침을 받던 사람들은 각각 스승이 있던 곳에 절을 지었다. 큰형이 있던 삼화촌 흑련대에는 삼화사를 짓고, 둘째가 머물던 지상촌 청련대에는 지상사를 지었다. 그리고 셋째가 머물던 궁방촌 금련대에는 영은사를 지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철불에 공양을 하면서 세세생생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부모에 효순하며 형제끼리는 우애하며 이웃과는 화목하게 살았다.

 

그로부터 강산이 수없이 변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약사불이 머물며 가르친 인륜과 도덕을 조금도 잊지 않았다. 오히려 철불을 친견할 때마다 불심은 더욱 깊어지고 마음은 더욱 맑아졌다. 사람들은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절로 찾아와 부처님을 친견하고 이런저런 속내를 털어놓았다. 약사불은 등신불이지만 살아 있는 생불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믿음은 약사불과 사람들 사이를 보이지 않는 끈끈한 하나의 끈으로 묶어 놓았다. 그러다 보니 철불에 얽힌 수많은 영험설화가 생겨났다. 다음은 그 가운데 몇 가지다.

 

삼화사 아랫마을에 사는 한 농부의 아내가 어느 날 부처님을 찾아왔다. 온 마을에 전염병에 창궐해 남편이며 자식이 다 죽게 생겼으니 빨리 낫게 해 달라고 빌러 온 것이었다. 그녀는 지극한 정성으로 공양을 올리고 남편과 식구들의 쾌유를 기원했다. 그러나 전염병은 좀처럼 퇴치되지 않았다. 평소에 약사불을 집안의 어른처럼 공경하고 지내 온 아낙은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이 어찌 내 정성을 몰라주나 싶었다.

 

그녀는 생각 끝에 부처님이 평소에 잡숴 보지 못했을 것을 가지고 가서 공양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부처님이 평소 쌀밥이며 과일은 많이 드셨겠지만 고기는 한 번도 못 드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명태 한 마리를 사서 절로 가지고 갔다. 아낙은 스님 몰래 법당으로 들어가서 소원을 빌고 명태를 부처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나왔다. 그런데 아낙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깜짝 놀랄 일이 있었다. 남편이며 자식들이 벌떡 일어난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다른 집 부인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금방 온 마을에 전염병이 물러갔다.

 

그런 일이 있은 지 한참이 지났다. 이웃 마을에 사는 어떤 새댁은 시집을 와서 아이를 갖지 못해 애를 태웠다. 그녀는 이웃 마을 어떤 아주머니가 삼화사 약사불에게 기도를 해서 영험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절로 찾아가 기도를 했다. 그러나 좀처럼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댁이 아주머니를 찾아가 “어떻게 기도를 해서 소원성취를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웃으며 새댁에게 슬그머니 이런 귀띔을 해주었다.

 

“부처님도 색다른 음식을 좋아한단 말일세. 그러니 명태를 한 마리 가지고 가서 공양을 올리게. 만약 그래도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삼화사 부처님이 고기만 받아 자시고 소원을 들어주지 않더라고 소문을 내 버려. 그러면 부처님이 난처해서라도 어떻게 해줄 게 아닌가.”

새댁은 아주머니의 말대로 명태를 실타래에 꿰어서 부처님 목에 걸어 놓고 소원을 빌었다.

 

“부처님, 만약 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삼화사 부처님이 고기를 자셨다고 소원을 내겠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할 겁니다.”

 

이렇게 불공을 하고 나자 새댁은 정말로 임심을 해서 옥동자를 낳았다. 이 소문이 퍼지자 그때부터 소원이 많은 사람들은 스님 몰래 법당에 들어가 명태를 올려놓고 기도를 했다.

그러면 열의 아홉은 소원이 성취되었다.

 

삼화사 철불의 영험담은 이밖에도 많다. 조선 순조 때의 일이다. 어느 해 산불이 일어나 절이 몽땅 불에 타는 재앙을 입었다. 법당은 다 타고 철불만 동그라니 남아 있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불손한 생각으로 철불을 훔쳐서 달아났다. 철불을 지고 몇 발자국 움직이자 어디서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대성발악을 했다. 도둑은 혼비백산해 철불울 내려놓고 도망을 쳤다. 그후 또 다른 어떤 도둑이 철불을 훔치러 왔다. 그는 철불이 워낙 무거워 전체를 가지고 갈 수 없자 무도하게 한 쪽 팔을 잘라 도망을 가다가 신장(神將)으로부터 죄를 받아 입으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었다. 뒤늦게 불상이 없어진 것을 안 삼화사 스님들이 부처님의 없어진 팔을 찾아 이리저리 산속을 헤매다가 이를 발견하고 다시 모셔와 법당을 새로 짓고 봉안해 놓았다. 이 얘기는 <진주지>에도 실려 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해 장마가 들어 산사태가 일어나 중대사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로 인해 약사전이 무너지고 약사불도 매몰되고 말았다. 삼화사 약사불은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자 중대사로 옮겨 지으면서 이곳에서 모셔 두었는데 중대사가 무너지면서 매몰된 것이었다. 그 뒤 이 약사불은 중대사터에서 밭을 일구던 어떤 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삼화사로 옮겨졌다. 삼화사에 철불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나자 어느 날 한 골동품장사가 찾아와 철불을 팔라고 했다. 당시 삼화사 주지는 성암 화상이었고 신도회장은 김대승 씨였다. 김대승 씨는 부처님을 골동품으로 매매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골동품상은 스님 몰래 철불을 훔쳐 가마니에 싸서 묵호로 가지고 나갔다. 그 골동품상은 운임이 모자라 철불을 역에 맡기고 돈을 구하러 영주로 갔다.

 

이때 신이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묵호에 주재하고 있던 어떤 기자의 꿈에 가마니에 싸인 철불이 보였다. 그는 꿈속의 일이 신기해 역으로 나갔더니 과연 가마니가 보였다. 기자가 역무원에게 물으니 화물을 맡긴 사람이 운임을 구하러 갔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경찰에 연락을 해서 철불을 지키고 있던 고물상의 아내를 취조하게 했더니 훔친 것으로 판명되었다. 철불을 훔친 골동품상은 영주에서 돈을 마련해 돌아왔다가 아내와 함께 철창으로 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철불은 다시 삼화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삼화사 철불은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견디며 지금도 그 옛날 훤한 장부의 모습으로 두타산에 처음 올 때의 모습 그대로 사람들의 귀의와 존경을 받으며 법당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그러니 이를 어찌 부처님의 영험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치〕 

삼화사는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176번지 두타산(頭陀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찾아 가는 길〕 

(1) 대중교통
동해시외버스터미널에서 무릉계곡방면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삼화사에 닿는다. 버스는 20분 간격으로 운행되며,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동해시외버스터미널에서 무릉계곡방면 좌석버스를 이용할 경우 3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데 소요시간은 30분 정도이다. 

 

(2) 승용차
삼척에서 출발할 경우, 동해방면으로 7번국도를 타고 6km 정도 가다가 42번국도로 접어드는 길로 좌회전한다. 직진해서 가다보면 해성주유소가 나오고, 무릉계곡을 지나 표지판을 따라가면 삼화사에 닿는다. 동해시에서는 효가4거리에서 무릉계곡 방향으로 우회전한 뒤 4.4km 정도 가다보면 삼화동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5.3km 정도 가면 무릉계곡이 나오고, 이곳에서 표지판을 따라가면 삼화사에 닿는다.
 

〔각종 요금 안내〕

무릉계곡 : 어른 1,500원(단체:1,200원), 학생ㆍ군인 1,000원(단체:800원), 어린이 600원(단체:500원)
야영료 : 소형 4,000원, 중형 6,000원, 대형 8,000원
주차료 : 소형 2,000원, 대형 5,000원

 

〔도움전화〕종무소 : 033-534-8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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