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신혼 첫날밤이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호텔 대신 신혼집에서 첫날밤을 맞이했는데, 빡빡한 결혼식 일정을 겨우 마치고 신혼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 몸은 노곤했지만 묘하게 흥분됐다. 새 가구들은 반짝반짝 빛이 났고 뽀송뽀송한 이불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텔레비전과 오디오 세트, 전자레인지, 에스프레소 머신… 전자제품들은 모두 내가 원하는 위치에 딱 맞춰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내 남자. 드디어 이 남자가 완벽하게 나에게 속하게 됐고, 나 역시 한 남자의 완전한 여자가 되었다는 충만감. 아, 나는 이제 매일매일 이 남자의 품에서 잠들 수 있구나. 그날 우리의 섹스는 내 평생의 베스트 섹스로 손꼽힌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런 ‘핫(hot)한’ 섹스를 한 지가 언제였던가. 결혼 3년 차, 매일 쏟아지는 원고 더미에 마음은 항상 쫓기고, 남편에게 저녁밥을 차려주고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써야 할 기사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러다 보니 섹스는 당연히 의무방어전. 근래 들어 급하게 섹스를 하고 거실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밤이 늘어나고 있다. 아, 내가 이러려고 결혼을 한 건 아닌데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그 짜릿한 기쁨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 결혼했다고 왜 섹스까지 포기해야 해?” 내가 이런 속내를 친구들에게 털어놓자 그들은 나보다 일찍 결혼한 프로답게 한마디씩 자신만의 노하우를 늘어놓았는데…. 일과 육아 그리고 섹스, 핫 마마들은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으려는 욕구가 강했다. 하나를 줄여 하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일에 대한 열정이 성적인 열정으로 연결되는 전도체의 느낌도 있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일로 지친 심신을 달래는 피로 해소제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섹스는 워킹맘에게 여러모로 ‘굿 잡(good job)’인 것이다.

일도, 가정도, 섹스도 완벽해야 해!
결혼 5년 차의 홍보회사 팀장인 Y는 알아주는 워커홀릭이다. 잘나가는 기업 홍보 몇 건을 동시에 진행할 만큼 탁월한 능력을 자랑하면서도 홍보인은 클라이언트나 기자에게 호감 주는 외모를 갖춰야 한다며 결혼 후에도 다이어트와 자기 관리를 멈춘 적이 없다. 야근을 하고도 남편의 저녁상을 제 손으로 차리고, 2주에 한 번씩은 꼭 시댁 어른들을 챙기러 다닌다. 설마 아이 낳고도 저럴까 싶었는데 출산 후에는 내 아이를 최고로 키워야 한다면서 육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섹스는 일과 다름이 없다. “내 남편이 나와의 성관계에 불만족스러워한다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유난히 섹스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섹스를 한다.
남편에게 성적 긴장을 주기 위해서 샤워와 마사지는 기본, 남편이 좋아하는 애무도 생략해 본 적이 없단다. 혹여 남편이 나이 들어가면서 남자로서의 자신감이 떨어질까 봐 그녀는 “당신은 아직도 매력적이야. 당신과 함께 섹스하고 싶어” 같은 말을 수시로 던진다고 한다. “섹스도 일이랑 마찬가지야. 좋아하는 일을 하면 더 잘하게 되고, 잘하면 더 좋아하게 되잖아.”
그렇긴 하다. 첫 섹스는 얼마나 미숙하고 힘들었던가. 어느 순간 남자의 몸을 알게 되고 그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애무를 할 수 있고 약간의 노력으로 오르가슴에 올랐던 때의 그 성취감을 나도 기억한다.
사무실에서 몇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나 한 남자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로서 가사, 섹스, 육아 등의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내는 것은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녀는 탁월한 워커홀릭이었다.

일의 성취감은 굿 섹스를 위한 최고의 애무
광고기획사에 다니는 K의 경우, 박진감 넘치는 그녀의 일이 원만한 부부 생활의 노하우였다. 항상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프로젝트를 따내야 하는 그녀는 며칠 동안의 밤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묘하게 흥분이 된다고 한다. “기획서가 계약되는 순간 그동안 고생한 게 한순간에 잊혀질 만큼 짜릿하잖아. 아, 내가 아직 건재하구나, 내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 여자로서의 자신감이 붙으면서 흥분되고 그래.”
그런 날 집에 돌아오면 남편이 그렇게 섹시하고 멋져 보일 수 없단다. 같이 술 한잔을 마시며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느꼈던 어려움이나 힘들었던 점을 조곤조곤 털어놓다 보면 남편도 맞장구를 쳐주고, 그러다 보면 저절로 몸이 침실을 향하게 된다고.
프로젝트를 따냈다는 성취감과 가벼운 술 한잔, 며칠 동안의 밤샘으로 쌓인 몽롱함이 그녀에게는 최고의 최음제인 것. 그 모든 게 한순간에 뒤섞이면서 평소보다 훨씬 적극적이 된다. “약간 과격하고 충동적인 섹스가 더 흥분되잖아. 그럴 때면 내가 영화 속에 나오는 섹시한 커리어우먼이 된 것 같아. 그의 옷을 먼저 벗긴다거나 공격적인 애무를 한다거나 평소에는 상상도 못했던 것을 시도하기도 하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열정적인 섹스를 하게 되는 거야.”
결혼 초기에는 그녀가 새벽 늦게 들어올 때마다 싫어하던 남편도 요새는 은근히 그녀의 프로젝트가 잘되기를 바라는 눈치란다. 실제로 일에서 오는 성취감은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을 흥분시키며 삶의 만족도를 높인다.

섹스처럼 효과적인 테라피가 또 있을까
우리 중에서 가장 먼저 결혼한 학원 강사인 L은 벌써 두 아이의 엄마다. 직업이 직업인 만큼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퇴근 시간도 제일 늦다. 그럼에도 6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섹스만은 꼭 챙겨서 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섹스는 피로 해소제야. 집에 늦게 들어오면 몸은 피곤한데 잠은 잘 안 오고…, 그럴 때 섹스를 하면 피로가 풀리면서 숙면을 취할 수 있거든. 아침에 일어났을 때 훨씬 개운하기도 하고.”
그녀에게도 물론 위기는 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출산했는데, 그 뒤 1년간 아무리 섹스를 해도 별다른 느낌이 없고 육아에 시달리니 몸은 피곤하고 섹스하자고 하는 남편이 귀찮기까지 하더라는 것. 그렇게 섹스를 피하다 보니 남편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멀어졌고 급기야 우리가 정말 아이 때문에 사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뭔가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결혼 전 경력을 살려서 다시 학원에 나가기 시작했고, 몸의 피로가 다시 쌓이기 시작했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방망이 같던 어느 날 새벽, 선잠을 자다가 우연히 하게 된 섹스가 결혼 생활과 일에서 오는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었다. 스트레스와 피로, 오래된 애정 결핍을 한꺼번에 날리는 진정한 ‘테라피’였던 것.
“거창하게 하거나 오래 시간에 걸쳐 하진 않아. 대신 빼먹지 않고 하려고 하지.” 확실히 섹스는 운동 효과가 있다. 심장이 빨라지고 땀에 젖고 난 뒤의 은근한 쾌감을 나도 인정한다. 굳이 엔도르핀이나 아드레날린의 효과를 운운하지 않아도 섹스를 하고 난 뒤에는 하루의 스트레스가 풀리면서 얼마나 기분 좋게 잠드는가. 거기에 내 남편이 나와 살 부대끼면서 섹스하는 걸 좋아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오는 심적인 만족감이란.
심지어 그녀는 남편이 너무 피곤해해서 섹스를 할 수 없을 때는 자위행위로 ‘테라피’를 대신한다고 살짝 덧붙였다. 거의 매일 쉬지 않고 피로를 풀어서 그럴까. 간밤에도 늦게 퇴근했다는 그녀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연애 감정처럼 섹시한 건 없다
출판기획자인 J는 결혼 전부터 섹스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섹스할 때보다 내가 만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을 때 더 짜릿해.” 그래서 그녀는 섹스를 자주 시도하지 않는, 오래된 남자 친구와 별다른 걱정 없이 결혼했다.
문제는 결혼을 하고 난 뒤부터였다. 회사에 젊고 능력 있는 후배들이 들어오면서 욕심만큼 일이 잘 안 된다거나 슬럼프에 빠질 때가 많아졌고, 몸이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열정적인 위로가 간절해졌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가 샤워를 한다거나 남편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려고 하면 “오늘은 좀 피곤하네”라면서 돌아눕기 일쑤였다.
“관계 자체가 불만족스러운 건 아닌데, 나를 강하게 자극할 만한 무언가가 필요해. 다시 열정적이고 생기 있게 만드는 무엇.” 그녀가 그 방법으로 선택한 건 연애다. 그래서 그녀는 일하면서 알게 된 연하의 남자와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섹스를 한다거나 사랑에 빠진 건 아니다.
“가끔 만나서 술을 마시거나 전시회 같은 데를 다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이야기도 잘 통하고, 무엇보다 나를 많이 좋아하거든. 내 이야기를 눈을 반짝이며 잘 들어주고, ‘J씨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섹시해요’ 같은 말을 던지거든.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 남자와 자고 싶지는 않아. 그 남자도 내가 선을 넘지 않으리란 걸 알고. 하지만 뭐랄까? 마음으로 나누는 섹스라고 해야 하나? 그를 만날 때마다 정신적인 오르가슴을 느껴.”
그녀는 그를 만나기 시작한 이후로 기획하는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좋아했다. 아이디어도 샘솟고 작가들을 만날 때도 훨씬 적극적이고 활발해졌다는 것. 육체적인 오르가슴이나 정신적인 오르가슴이나 삶의 활력소가 되는 건 마찬가지인 듯하다.기획 강승민 | 포토그래퍼 여성중앙 | 여성중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