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강진군 도암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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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문화재청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萬德山)에 있는 절.
〔연 혁〕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백련사에 대한 사적은 1432년(세종 13) 윤회(尹淮)가 저술한 ≪팔도지리지 八道地理志≫와 정약용(丁若鏞)의 ≪만덕사지 萬德寺誌≫ 등에 나타나 있다.
만덕산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하였다.
백련사 창건에 관한 기록은 대웅보전에 걸려있는 중수기 현판을 내용을 참고할만하다. 여기에 적힌 내용을 보면, 통일신라시대 문성왕(재위 839~856) 때 무염(無染, 801~888) 스님이 절을 개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현판은 18세기에 쓰였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다. 창건 이후의 역사도 그다지 자세하진 않다.
고려시대에 들어 1211년(희종 7)에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하면서 백련사의 사세는 크게 확장되었다. 요세스님은 천태종계(天台宗系)의 승려로서 고승 지눌(知訥)과 깊은 친분 속에서 지눌과 함께 송광사에 머물다가, 1208년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었고, 그때 월출산 약사난야(藥師蘭若)에 머물렀는데 이 지방의 독실한 불교신자인 최표(崔彪) 형제와 이인천(李仁闡) 등의 간절한 요청으로 백련사에 주석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제자 원영(元營)과 지담(之湛), 법안(法安) 등에게 건물 80여 칸을 짓게 하여 1216년(고종 3)에 낙성법회를 열었다. 그 뒤 1221년 요세스님은 남원 태수 복장한(卜章漢)의 청에 따라 관내에 제2의 백련사를 설치하고 몇 년을 그곳에서 머물렀으나 1223년에는 최표의 간청으로 다시 백련사에 돌아와 도량을 크게 넓혔다. 요세스님 주도로 추진된 중창불사는 백련사가 가장 번성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역사(役事)는 1211년부터 1232년(고종 19)까지 21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목백(牧伯)이 지극한 정성으로 재물을 보시(布施)하였다고 한다. 절이 완공되자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맺었다.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이다.
백련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또 다른 자료는 인근 사당리 요지에서 발견된 명문자기 편을 들 수 있다. 현재 만경루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강진만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강진만 건너에 보이는 곳이 바로 고려청자의 생산지로 유명한 강진 사당리이다. 백련결사 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13세기 후반에 사당리의 사기장(砂器匠)들도 결사에 참여하여 그릇을 시주했는지, 아니면 어떤 사람이 백련사에 시주할 그릇을 사당리에서 주문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그릇 바닥 안에 ‘만덕(万德)’이란 글씨가 상감된 13세기 후반의 청자조각이 사당리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뒤 이 절에서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8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고려 말에는 강진지방이 세 차례의 왜구침입을 받았을 때 이 절도 함께 폐허화되었다.
이후 조선 초 1407년(태종7)에 실시한 2차 사찰정리 때 조계종 자복사(資福寺) 24개 사찰에 선발되어 그 명맥은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1426년(세종 8)에 천태종의 영수인 도대선사(都大禪師) 행호(行乎)가 주석하면서 백련사는 다시 한번 크게 중창되었다. 이 때 도대 스님은 임금의 장수와 국가의 복락을 서원(誓願)하면서 제자 신담(信湛) 등으로 하여금 여러 단월에게 시주를 권유하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에 심취하였던 세종의 형 효령대군(孝寧大君)에게 편지를 보내 대공덕주가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이때 효령대군은 기꺼이 힘을 보태 주었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앞 다투어 적극적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당시 시행된 중창불사는 1430년에 시작하여 1436년에 준공되었는데, 이로써 옛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다. 당시 사찰을 유람하던 효령대군은 백련사에 8년 동안 머물렀고 밭 54두 2승락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몇 차례의 중수가 이어졌다. 1650년(효종 1)에서 1659(효종 10) 사이에는 현오(玄悟) 스님이 서원(西院)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1681년(숙종 7)에는 탄기(坦寄) 스님이 백련사의 사적이 오래되어 없어져 버릴 것을 염려하여 조종저(趙宗著)에게 글을 청해 ‘백련사사적비’를 세웠다. 그러다가 1760년(영조 36)에는 큰불이 일어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는 참변을 당했다. 여러 스님이 중건을 위해 각자 분담하여 시주를 모아 이듬해 불사를 시작해 1762년 대법당 중건을 마무리 하였다. 이때 불사 정황을 기록한 「백련사대법당중수기」가 대웅보전 안에 걸려 있다. 이후 19세기의 연혁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단지 지금은 없지만 원래 만경루 앞에 해탈문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1836년(헌종 2)에 지은 「해탈문중수기」가 현재 대웅전 안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조계종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하여 종세(宗勢)를 키우고 있을 때, 이 절은 천태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結社道場)을 개설하여 침체한 불교중흥을 꾀한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절 주위에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을 행호토성(行乎土城)이라고 한다. 현재의 절 또한 그때 쌓은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당우 및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시왕전(十王殿)·나한전(羅漢殿)·만경루(萬景樓)·칠성각·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써 각 추녀마다 네 개의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두 개의 주두(柱頭)는 용두(龍頭)로 장식한 다포집 건물이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만경루는 규모가 큰 누각으로 강진만 일대의 바다를 환히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복형(鼓腹形)의 옥신(屋身)에는 두 줄의 주렴문이 조각되어 있고,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하며, 상륜부에는 노반(露盤)·복발(覆鉢)·보주(寶珠)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절 주위에는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의 동백림과 정약용이 신유사옥 때 강진으로 귀양와서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하고 차를 끊여 마시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백련사를 가리켜 ‘남쪽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여 동백 또한 곁들여서 수목이 싱싱하게 푸른 모습이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한만큼 주위의 경관 또한 아름답다.
〔가람배치〕
백련사는 만덕산 자락 경사가 급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사역은 석축을 계단식으로 쌓아 터를 만들고 건물을 배치하였다. 제일 하단에는 주출입구인 누각 만경루가 있다. 누각 아래층은 개방된 공간으로 이곳을 통해 대웅보전 앞마당으로 드나들도록 계획되었지만 지금은 누각 오른쪽에 따로 계단을 쌓았기 때문에 지금은 주로 이 계단을 사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누각 아래를 통해 올라 마주치는 대웅보전은 계단을 지나 만나는 분위기보다 색다르다. 만경루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강진만의 빼어난 절경이 눈에 들어온다.
만경루 밑으로 올라가면 좁은 대웅보전 앞마당이 있다. 주불전인 대웅전 좌우로 주요 전각이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삼성각, 대웅전 왼쪽에는 명부전이 자리 잡았다. 명부전에서 산 쪽으로 약간 올라간 지대에 응진전이 외따로 있다. 요사채는 대웅전 앞마당에서 좌우로 치우친 곳에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2층 건물인 육화당이 있고, 그 뒤로 ㄱ자형 요사 1동이 있다. 대웅전 좌측에는 일자형 요사 1동이 자리 잡았다. 만경루와 대웅보전은 중심축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나 좌우 요사는 마당에서 뚝 떨어져 있어 중정중심의 배치는 아니다. 만경루와 대웅보전 사이 마당이 좁아 약간 답답하긴 하지만 좌우 요사가 간격이 넓어 지나친 폐쇄감은 느끼지 못한다. 명부전 서쪽으로는 응진당 앞에 부도 1기가 있고, 그 아래 넓은 공간에 사적비(유형문화재 제137호)가 있다. 만경루 옆에는 새로 지은 종각이 있다. 또한 가람배치로 볼 때 현재는 만경루가 가장 앞에 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예전에는 그 앞에 해탈문이 있었다고 한다.
백련사에는 응진전 앞에 1기, 만경루 좌측 선방 앞에 1기, 입구 축대 위에 1기 그리고 절 서쪽의 동백 숲에 4기 등 전부 7기의 부도가 있다. 만경루 옆에는 예전 스님들이 사용하였던 맷돌이 남아있다. 이 밖에 절 앞에는 비자나무와 후박나무가 있고, 푸조나무와 함께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51호) 등이 있어 사계절 모두 경관은 장관을 이룬다.
〔사찰풍경〕
고려시대에 중앙 소수의 귀족과 왕족들이 독점한 불교를 지방과 대중들도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불교계 제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한 신앙결사가 바로 백련결사운동입니다. 백련결사운동을 태동시킨 도량이 바로 백련사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백련사를 장엄하고 있는 동백꽃에 현혹되어 역대 선지식들이 결사한 불교사회개혁운동의 체취를 느끼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백련사는 신라 문성왕 때 무염국사가 창건하였는데, 당시 사찰 이름은 만덕사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고려 원묘국사가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는 불교적 대안을 마련하고, 대중적 기반의 침체된 불교 중흥을 위해 만덕사에 보현도량을 열어 수행교화체계를 세우고, 백련결사운동을 전개하면서 백련사로 사명을 바뀌었습니다. 백련결사운동은 보조지눌의 수선사 결사와 더불어 고려후기 새로운 불교운동의 두 축이었습니다.
백련도량의 수행체계는 당시 교학만을 강조하는 화엄종과 선 수행만을 주장하는 선종과 통합하여 누구든지 쉽게 부처님 가까이에 있게 하였습니다. 새로운 교화체계는 대중들도 쉽게 불법에 귀의하여 자기가 지은 죄를 참회하고 정토에 태어날 것을 발원하는 수행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백련결사를 주창한 요세스님은 지혜력(知解力)을 갖춘 근기를 가진 자만이 수행의 대상으로 삼았던 당시 지식불교를 비판하고 비록 막중한 죄를 지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탈할 수 없는 범부일지라도 부처님전에 나아가 참회하고 수행하면 해탈할 수 있다고 설하였습니다.
백련결사운동의 중심사찰인 백련사는 8명의 국사를 배출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8명의 대사를 나왔습니다. 백련사 동백림에는 선지식들의 깨달음 설법이 부도라는 형체로 우리들에게 무언의 법문을 하고 계시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백련사 주변을 둘러싼 동백림은 예로부터 이름이 높았다. 고려시대부터 백련사는 동백림으로 유명하였으며, 현재까지 아름드리 숲을 이루고 있어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이 동백림의 수려함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남아 있다. <백련사사적비>에서는 백련사의 경관을 언급하면서 만경루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의 경치가 빼어나고 겨울과 봄 사이 주변의 동백 숲에서 피어나는 빨간 동백꽃이 볼만하다고 하였다. 또한 조선 전기의 문인 성임(成任)과 임억령(林億齡)은 이러한 빼어난 승경을 직접 보지 못해 한스럽다는 시를 지어 동백림의 아름다운 모습을 읊었다. 이렇게 옛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백련사의 동백은 지금도 수많은 탐방객을 부르고 있다. 동백림 부근에는 작설차(雀舌茶) 나무가 야생하고 있는데, 예전에도 이곳 작설차가 유명했던 듯 전차(煎茶)로 만들어 나라에 진상했다 한다.
교통안내
1) 대중교통
서울, 부산, 광주, 목포에서 우선 강진까지 오면 된다. 서울 ⇔ 강진은 1일 10회 운행하는데 1시간 간격으로 출발하며 약 5시간 20분이 걸린다. 부산 ⇔ 강진은 1일 18회,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5시간이 걸린다. 광주 ⇔ 강진 사이는 1일 32회,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1시간 40분이 소요된다. 목포 ⇔ 강진사이는 1일 20회,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50분이 걸린다. 모두 강진에서 내려 군내버스를 이용, 백련사에 갈 수 있다. 강진읍 정류장에서 정다산유적지를 지나 도암면을 왕복하는 군내버스 이용는 1일 11회 운행하며 20분이 걸린다. 출발지 기준으로 첫차는 6:40에 출발하며, 막차 19:20에 출발한다.
2) 승용차
각 지역에서 우선 강진까지 이른다. 강진에서 해남, 완도 방면 18번 국도를 따라 약 2km 지나면 강진군 학명리 추도삼거리에 이른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도암 방면 1번 도로를 타고 7km를 더 가면 만나는 다산초당을 지나 조금 더 가면 백련사에 다다른다.
주변관광지
다산초당, 다산유물전시관
입 장 료
주차시설
도움전화
백련사 061-432-0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