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무주군 설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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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덕유산(德裕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무주구천동계곡의 끝자락인 해발 약 900m 지점에 위치한 백련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이다. 창건과 관련하여 신라 신문왕(재위기간 681-692) 때 백련선사(白蓮禪師)가 은거하던 곳에 백련이 솟아나왔다 하여 절을 짓고 백련암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830년(흥덕왕 5년)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설립했다는 설도 있는데, 모두 기록상으로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구천동(九千洞)이라는 이름을 통해 백련사가 있는 이 지역이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구천동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백제의 관문인 나제통문(羅濟通門)이 있던 곳으로, 구천동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1552년 덕유산을 기행했던 임훈(林薰, 1500-1584)의 「덕유산향적봉기(德裕山香積峯記)」에 기록되어 있다.
즉 옛날에 이 골짜기에서 9천명의 성불공자(成佛功者)가 살았으므로, ‘구천인(九千人)의 둔지(屯地)’라는 뜻에서 구천둔(九千屯)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구천둔이라는 지명이 구천동으로 바뀌어 불려지게 되었고, 수행을 위한 은둔지로 적합하여 신라시대 이래 근대까지 수많은 선사들과 수도승들의 수도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주구천동 계곡에 있었던 사찰들에 대한 고려 및 조선 초기의 기록은 찾을 수 없고 조선중기 이후의 기록만이 전하고 있다. 임훈(林薰)이 1552년 덕유산을 기행하며 기록한 「덕유산향적봉기(德裕山香積峯記)」에는 향적봉을 향해 길을 떠나며 들른 삼수암(三水庵)과 향적봉의 탁곡암(卓谷庵)ㆍ향적암(香積庵)ㆍ북암(北庵) 등 수많은 암자에 대해 적고 있다.
1672년에 덕유산을 기행한 윤증(尹拯)의 「유여산행기(遊廬山行記)」에는 구천동 암자들에 대한 감상이 서술되어 있는데, 여산(廬山)은 덕유산의 별칭으로 정토신앙의 성행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이 기행에서는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소암(小庵), 덤불에 묻혀 있는 남암(南庵), 스님은 없고 불상만 있는 북암(北庵), 북암에서 20리 계곡에 있으며 백여 명의 스님이 불경을 읽고 있는 백련사(白蓮社), 80세의 계수(戒殊) 스님이 후학을 지도하던 계수굴(戒殊窟) 등이 등장하고 있다.
이외에도 1760년에 간행된 『여지도서(餘地圖書)』와 『가람고(伽藍考)』에는 ‘무주부 남쪽 70리의 덕유산에 구천사(九千寺)가 있다’ 하였고, 1799년에 간행된 『범우고(梵宇攷)』에는 무주조에 ‘구천동사(九千洞寺)’라는 표현과 함께, 금산조에는 ‘여악(廬岳)이라 불리던 덕유산 구천동에 백련사(白蓮社)가 있는데, 만력 연간(1573-1619)에 지변(智辨)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무주군의 옛읍지인 『적성지(赤城誌)』 사찰조에는 ‘구천동사는 백련암이라고도 하는데, 횡천의 덕유산 자락에 있으며 무주부로부터 동쪽 70리 떨어진 곳에 있다. 옛날에는 대찰이었으나 지금은 작은 암자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인 1672년부터 백련사는 백련사(白蓮社)ㆍ구천사(九千寺)ㆍ구천동사(九千洞寺)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후기에 사세가 기울자 백련암(白蓮庵)이라는 암자로 쇄락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구천동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17세기 무렵 백여 명의 스님이 결사, 극락정토의 왕생을 발원하여 수행하는 도량으로 거듭난 것이라 여겨진다.
이후 구천동사를 중심사찰로 하여 북암ㆍ남암ㆍ향적암ㆍ계수굴ㆍ백운암 등 많은 암자들이 폐허와 복구를 거듭하였으며, 조선중기 이후부터는 당대 유명한 고승들이 즐겨 주석하며 수행하였다. 이곳 덕유산에서 출가하여 여러 납자들을 이끈 고승으로는 청허유정(淸虛休靜)의 스승 부용영관(芙蓉靈觀)을 비롯하여 부휴선수(浮休善修)ㆍ정관일선(靜觀一禪)ㆍ벽암각성(碧巖覺性)ㆍ임성충언(任性忠彦) 등이 있으며, 그 가운데 정관일선과 임성충언은 백련사에서 입적하여 그를 추모하는 부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또한 백암성총(栢庵性聰)은, ‘옛날 중국의 혜원(惠遠)이 여악(廬岳)에 들어갔듯이 지금 덕유산 칠봉의 인공(印公)이 여산 백련사에 들어가노라’는 시를 남기기도 하여 백련사가 여러 선사들의 수행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809년에는 호의시오(縞衣始悟)가 무주구천동에서 주석하였고, 1813년에 무경자수(無竟子秀)이 덕유산의 진허경정(震虛敬淨)에게 법을 물었다. 1820년에는 용암혜언(龍巖慧彦)이 백련사에서 화엄회를 개설한 후 1822년 구천동에 들어가 수행하였으며 1824년에는 구천동에서 결사하기도 하였다. 근대에 들어와 1900년 당시 무주부사인 이하섭(李夏燮)에 의해 가람이 중수되면서 그 맥을 이었는데, 일제시대에 구천동 일대가 일본 북해도제국대학의 대학림(大學林)이 되면서 사찰의 전통가옥이 일본식 건물로 바뀌었다가, 6.25 때 건물 모두가 불에 타는 참화를 겪게 되었다.
이후 10여 년간 폐사가 되다시피했다가 1961년에 5칸 규모의 인법당 설립을 시작으로, 구천동을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행정당국의 정책과 함께 백련사의 복원불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주민들은 덕유산 구천동의 중심사찰이었던 백련사를 회상하며 가람의 복원을 위해 발원하였는데, 1967년에는 무주읍내에 개인 소유로 있던 무주부 관아동헌인 문향헌(文香軒)을 이건하여 요사로 사용하면서 가람복원에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근대 백련사 복원의 중창주라 할 수 있는 당시의 주지 최현수(崔賢首) 스님은 본격적인 복원불사에 앞장서서, 1973년 일주문 건립을 시작으로 1974년에 대웅전을 신축하여 삼존불과 후불탱을 봉안하였으며, 1977년에 원통전, 1986년에 명부전을 건립하여 백련사를 구천동의 대찰로 복원해 내었다. 이후 주지 평상(平常) 스님은 현수스님의 불사를 이어받아 범종각ㆍ백련회관을 조성하였으며, 국립공원사찰답게 정갈한 가람으로 정비하였다. 1998년에는 세계적인 신문재벌 로드미어의 부도를 이곳에 조성하여 백련사가 자리한 구천동이 명당임을 보여주었으며, 이후 계현스님은 삼성각 건립 및 요사의 증축 등을 통해 자연과 호흡하는 대가람의 불사를 이어가고 있다.
백련사 계단(戒壇)은 향적봉 쪽으로 오르는 뒷산에 있는 계단으로서 전라북도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연석 기단 위에 높이 약 2m, 둘레 약 4m의 우람한 석종형 탑신을 올려놓고 있는데, 그 전면에 높이 30㎝, 지름 100㎝ 크기의 원형 대좌 1기가 놓여 있다. 고려시대에 구천동사(九千洞寺)를 창건한 대원대도대사(大院大都大師)의 부도라고 전하지만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다.
선흔의 부도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제 제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둥근 대석 위에 석종형 탑신을 올려 놓았는데, 대석에는 복련을 새겨놓았고, 탑신의 상륜부는 보륜을 조각한 뒤 그 위에 유두형 보주를 조각했다.
보륜을 중심으로 한 탑신의 윗면과 보주 위에는 화려한 복련과 앙련을 새겨 장식했다. 전에 이 부도를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로 알고 있었으나, 다른 인물인 매월당 설흔 스님의 부도인 것이 확실하다.
천왕문 앞 왼쪽에는 1608년에 세운 일선(一善)의 부도가 있는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선은 유정·언기·태능과 함께 휴정의 4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 이곳 백련사에서 입적하였다.
구천동의 지명유래
전라북도 무주군의 덕유산 계곡을 일컫는 무주구천동은 지금이야 관광객이 끊어지지 않는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깊은 산골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첩첩 산중이었다. 이 ‘구천동’이라는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 명종 때 광주목사를 지낸 임갈천이 쓴 「덕유산 향적봉기」에 의하면 성불공자 9천명이 이 골짜기에서 수도를 했으므로 ‘9천명이 은둔한 곳’이라 하여 이곳을 구천둔(九千屯)이라 하였고, 그들의 아침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은 쌀뜨물로 인해 개울물이 온통 부옇게 흐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이웃고을 금산에 살던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수도를 하기 위해 3년을 약속하고 구천둔에 입산하였다.
그런데 약속한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여인은 남편을 찾아 나섰는데, 2년 동안 찾아 헤매었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되돌아갔다고 할 정도로 산과 계곡이 깊다. 이때부터 구천둔이라는 지명이 구천동으로 바뀌어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로서 암행어사 박문수의 설화에 의하면, 이곳에 구씨와 천씨의 성을 가진 집안의 집단주거지인데, 두 성씨를 따서 구천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혹자는 이곳에 기암괴석들 9천 개가 널려 있는 곳이라서 구천동이 되었다는 설도 함께 전하고 있어, 그만큼 이곳 구천동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는 많기도 하다. 숙종 때 소론의 거두였던 윤명제와 같은 이는 구천동을 비롯하여 14개의 사찰을 품고 있는 덕유산을 ‘불교의 소국(小國)’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교통안내
(1)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버스를 이용할 경우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무주까지 약 2시간40분 소요되며, 기차는 서울역에서 영동역까지 새마을호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대전에서는 동부터미널에서 금산을 경유하는 버스, 또는 옥천ㆍ영동을 경유하는 버스를 타면 1시간30분-1시간40분 정도 소요된다.
이외 전주시외버스터미널이나 장계ㆍ안성 등지에서도 교통편을 찾을 수 있으며, 기차를 이용할 경우 영동역에서 무주까지 30분 정도 걸린다. 또 무주읍내에서는 구천동까지 버스가 07:10∼21:45분까지 하루 38회 운행되며, 무주와 구천동을 잇는 무주리조트 셔틀버스를 수시 운행 중이다.
셔틀버스의 무주 탑승장소는 관문주유소 한풍루 입구이며, 구천동 탑승장소는 덕유산관리공단 주차장 내에 있다. 그러나 여름과 겨울에는 구천동을 오가는 직행버스가 상시 운영되어 서울ㆍ부산ㆍ대전 등지에서도 쉽게 덕유산 구천동지구를 찾을 수 있다.
(2)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백련사를 찾는 길은 대전ㆍ통영간 고속도로를 타고 무주IC에서 좌회전하여 30번 국도를 따라 진안ㆍ무주리조트로 진입하는 길이 빠르고 찾기도 쉽다.
표지판을 따라 구천동 방면으로 들어와 적상면 소재지에서 좌회전한 뒤 사산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하면 치목터널과 구천동터널을 지나 무주구천동을 찾을 수 있다. 이곳에서 무주리조트 방면으로 들어오면 리조트 삼거리를 지나 덕유산 국립공원 무주구천동지구를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이곳 매표소를 지나 백련사 입구까지 올라가면 된다.
승용차는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따라 사찰까지 진입할 수 있으며 백련사 주차장은 자가용 5대 정도 주차가 가능하다. 무주 IC에서 이곳까지는 40㎞ 정도의 거리로 40-50분이면 덕유산 정상의 백련사에 도착할 수 있다. 무주구천동지구 주차장에 주차한 후 걸어서 올라갈 경우 50분 정도가 소요된다.
백련사로 오르는 길은 계곡을 따라 사계절 비경을 자랑하는 구천동 골짜기를 거슬러 높이 올라가게 되며, 무주의 청정공기와 함께 덕유산의 비경을 맛볼 수 있는 등산코스로 널리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