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고령군 쌍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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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용리 미숭산(美崇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802년(애장왕 3)에 해인사와 함께 창건된 절로서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하였고, 고려 공민왕 때에 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원나라 세조가 이 절에 내린 방문(榜文)의 전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방문에 따르면 일본의 정벌을 위해서 경상도 땅에 왔던 원나라 군사들이 절을 짓밟고 시끄럽게 하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 만약 절을 짓밟거나 소란을 피우는 자는 법에 의해서 처벌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교종에 속하였으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진된 것을 사명(四溟)이 중건하였다. 그뒤 화재로 인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육당(六堂)과 요사채가 전소되었으나, 1764년(영조 40)에 현감 윤심협(尹心協)이 대웅전과 동·서 요사채, 만세루(萬歲樓) 등을 중건하였으며, 1930년경 중수하였고, 1996년 대적광전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과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칠성각·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과 좌우보처보살·목조지장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절의 문화재로는 석가여래사리탑이라고 전해지는 다층석탑 1기와 동종이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된 이 탑은 일명 수마노석탑(水瑪瑙石塔)이라고도 하며, 2단의 화강암지대석 위에 세워진 높이 2.4m의 방형탑이다.
동종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88호로 지정된 것으로서, 1753년(영조 29)의 제작연도와 ‘중종(中鍾)’이라는 명문, 그리고 육자진언(六字眞言)의 범어가 몸체에 새겨져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며 전체 높이는 50㎝이다. 현재 수마노석탑과 반룡사동종은 대가야유물전시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이 절의 뒷편에는 망향대·갑검릉(甲劍陵)·주마대(走馬臺)·연병장·장군수 등이 있는 미숭산성(美崇山城)이 있다.
〔사찰풍경〕
대구에서 26번 국도나 88고속도로를 따라 40여 분간 남쪽으로 내려오면 삼국에서 소외된 가야, 그 가야사회를 주도했던 대가야의 후손이 살고 있는 고령을 만나게 된다. 고령읍내에 들어서면 멀리 주산의 산등성이 위로 낙타등과 같이 솟아있는 지산리고분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곳을 지나 26번 국도를 따라 쌍림면 방향으로 3㎞정도 가다가, 미숭산 방향(오른쪽)으로 6㎞ 정도 올라가면 쌍림면 용리 미숭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반룡사를 찾을 수 있다. 이 사찰은 대가야의 후손들이 신령스러운 용의 기운이 서려 있는 곳에 세웠다고 해서 반룡사(盤龍寺)라 이름 지어진 절이다.
802년(신라 애장왕 3) 해인사와 함께 창건된 이 사찰은 고려 중기 보조국사가 중창하였고, 공민왕 때에 나옹선사가 중건했다. 조선초기에는 교종에 속한 사찰이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진된 것을 사명대사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이 절과 관련된 고승의 면면만 보더라도 과거 이 사찰이 얼마나 이름 나 있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 뒤 화재로 인해 대웅전을 비롯한 6당과 요사가 전소되었으나 영조 때에 현감 윤심협이 다시 중건, 1930년 이봉조가 다시 중수했고, 최근 법당건물이 새로 들어섰다.
반룡사는 고려후기에는 대사찰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고려 불교때에는 무인정권이 성립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된다. 특히 기존의 불교계에 대한 반성운동으로 고령지역에서 화엄신앙에 의한 신앙결사가 다양하게 전개된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보조(普照)국사 지눌(知訥)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원묘(圓妙)국사 요세(了世)의 백련결사(白蓮結社)라 할 수 있다. 흥왕사의 승려이자 이인로(李仁老)의 대숙(大叔)인 승통 요일(寥一)이 1197년(명종 27) 고령으로 오면서 반룡사에서 신앙결사를 개창하였는데, 요일이 반룡사의 신앙결사를 개창한 목적은 '불교를 공부하는 자들이 시류에 빠져 자포자기하는 것을 민망히 여겨 이를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 일종의 불교 개혁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고려와 원나라의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당시 원나라 세조가 사원의 침탈을 방지하라는 방문(榜文)을 영남지역의 중심사찰이었던 반룡사에 붙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내용을 보면 '원나라 세조 때의 방문이 있는데…(중략) 만일 절 안을 짓밟고 시끄럽게 굴어 불안하게 하면 소재 관청에서 잡아들여서 법에 의하여 처단할 것을 방을 붙여 보게 하라. 이 방을 반룡사에 붙여서 여러 사람에게 보여 알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고려후기 반룡사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외에 이인로, 박효수, 유방선 등 명현들이 시문을 남겼다.
인근의 동종(경북도 유형문화재 288호)이 또한 눈길을 끈다. 반룡사에서 제작된 이 동종은 전체 높이 50㎝ 정도 되는 종으로, 특히 몸통에는 70여 자의 한자(漢字)가 양각되어 있다. 이 명문을 통해 1753년(영조 29) 3월에 고령 반룡사에서 직접 제작된 무게 100근의 중종이라는 사실과, 이 종을 만드는 데 참여한 희선 등의 승려와 김만세와 같은 신도 등의 이름과 역할 등이 함께 밝혀지기도 했다.
〔전래설화〕
반룡사가 있는 미숭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미숭 장군은 조선이 건국되자 상원산(上元山)에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하여 후일을 도모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절벽에 몸을 던져 순절을 하였는데, 휘하 장군들도 잇따라 몸을 던졌다고 한다. 그후 세인들이 그의 충의를 추모하기 위해 상원산을 미숭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미숭산성에는 갑옷과 칼을 묻었다는 갑검릉(甲劒陵), 말을 달리던 주마대(走馬臺), 개성(開城)을 멀리 바라보았다는 망향대(望鄕臺), 병사들의 조련장인 연병장(練兵場), 순사암(殉死巖) 등 유서가 서린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대가야의 철기문화와 관련된 제철유적이 반룡사 인근 미숭산 일대를 중심으로 경남 합천군 야로면과 경북 고령군 쌍림면 용리 등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용리 지역의 제철유적은 반룡사의 서쪽 미숭산의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 지표조사를 통해 철광석을 녹이기 위한 제련로의 노벽(爐壁)편과 철생산 과정에서 생성되는 불순물인 슬러지(철재:鐵滓), 철의 원료가 되는 철광석 등이 채집됐다.
특히 노벽편 가운데는 국내 고대 철생산 유적의 송풍관과 달리, 일본의 전통 방법에 보이는 소형의 송풍구(送風口)를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철의 왕국 대가야의 각종 철제품들이 이 곳 반룡사가 있는 용리에서 만들어져, 가까이는 삼국 및 가야 여러 나라와, 멀리는 중국과 일본 등지에 수출되기도 했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교통안내
1) 대중교통편
고속버스나 시외버스를 이용해 고령까지 간 후 고령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하여 반룡사가 있는 용리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소요시간 30분 정도)
2) 승용차편
고령으로 가려면 88올림픽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88올림픽고속도로 고령나들목을 나가서 바로 만나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계속 직진하면 고속도로 밑을 지나 바로 반룡사 이정표가 나온다. 이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해 들어가면 반룡사에 닿는다.
* 88올림픽 고속도로 → 고령IC에서 나와 좌회전 → 안림삼거리에서 직진 → 쌍림주유소 앞 반룡사표지판을 보며 좌회전 → 월막리경로당에서 월막교를 건너 좌회전 → 용리방향 → 반룡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