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글,시,모음

시인 김영랑 시 모음

문성식 2010. 9. 29. 14:55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오매 단풍 들것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강 물                                                    


잠 자리 서뤄서 일어났소

꿈이 고웁지 못해 눈을 떳소


벼개에 차단히 눈물은 젖었는듸

흐르다못해 한방울 애끈히 고이었소


꿈에 본 강물이 몹시 보고 싶었소

무럭무럭 김 오르며 내리는 강물


언덕을 혼자서 지니노라니

물오리 갈매기도 끼륵끼륵


강물은 철 철 흘러가면서

아심찬이 그꿈도 떠실고 갔소


꿈이 아닌 생시 가진 설움도

작고 강물은 떠실고 갔소.

 

 

 


5월 아침                                                


비 개인 5월 아침

혼란스런 꾀꼬리 소리

찬엄(燦嚴)한 햇살 퍼져 오릅내다


이슬비 새벽을 적시울 즈음

두견의 가슴 찢는 소리 피어린 흐느낌

한 그릇 옛날 향훈(香薰)이 어찌

이 맘 홍근 안 젖었으리오마는

이 아침 새 빛에 하늘대는 어린 속잎들

저리 부드러웁고

발목은 포실거리어

접힌 마음 구긴 생각 이제 다 어루만져졌나보오


꾀꼬리는 다시 창공을 흔드오

자랑찬 새 하늘을 사치스레 만드오

사향(麝香) 냄새도 잊어버렸대서야

불혹이 자랑이 아니 되오

아침 꾀꼬리에 안 불리는 혼이야

새벽 두견이 못 잡는 마음이야

한낮이 정밀하단들 또 무얼하오


저 꾀꼬리 무던히 소년인가 보오

새벽 두견이야 오-랜 중년이고

내사 불혹을 자랑턴 사람.

 

 

 


언덕에 바로 누워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이였데 감기였데.
 

 


 

지반추억(地畔追億)                                  


깊은 겨울 햇빛이 따사한 날

큰 못가의 하마 잊었던 두던길을 사뿐

거닐어가다 무심코 주저앉다

구을다 남어 한 곳에 쏘복히 쌓인 낙엽

그 위에 주저앉다

살르 빠시식 어쩌면 내가 이리 짖궂은고

내 몸 푸를 내가 느끼거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앉어지다?

못물은 치위에도 달른다 얼지도 않는 날세

낙엽이 수없이 묻힌 검은 뻘 흙이랑 더러

들어나는 물부피도 많이 줄었다

흐르질 않더라도 가는 물결이 금 지거늘

이 못물 왜 이럴고 이게 바로 그 죽음의 물일가

그저 고요하다 뻘흙속엔 지렁이 하나도

꿈틀거리지않어? 뽀글하지도 않어 그저

고요하다 그 물 위에 떨어지는 마른 잎

하나도 없어?

햇빛이 따사롭기야 나는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꼈는데.

여나문해? 그때는 봄날이러라 바로 이 못가이러라

그이와 단 둘이 흰 모시 진설 두르고 푸르른

이끼도 행여 밟을세라 돌 위에 앉고

부풀은 봄물결 위에 떠노는 백조를 희롱하여

아즉 청춘을 서로 좋아하였었거니

아! 나는 이지음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끼는데.

 

 

 


발 짓                                                    


건아한 낮의 소란소리 풍겼는듸 금시 퇴락하는 양

묵은 벽지의 내음 그윽하고

저쯤에사 걸려 있을 희멀끔한 달

한자락 펴진 구름도 못 말어놓은 바람이어니

포근히 옮겨 딛는 밤의 검은 발짓만 고되인

넋을 짓밟누나

아! 몇날을 더 몇날을

뛰어본다리 날아본다리

허잔한 풍경을 안고 고요히 선다.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발표 당시의 제목은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오월(五月)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千) 이랑 만(萬)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빛 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독(毒)을 차고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춘향(春香)                                              
 

큰 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朴彭年)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魂)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獄死)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南原)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두견(杜鵑)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작은 새,

너는 너른 세상에 설움을 피로 새기러 오고,

네 눈물은 수천(數千) 세월을 끊임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南)쪽 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

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젓한 이 새벽을

송기한 네 울음 천(千) 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이고,

하늘가 어린 별들 버르르 떨리겠구나.

 

몇 해라 이 삼경(三更)에 빙빙 도는 눈물을

씻지는 못하고 고인 그대로 흘리웠느니,

서럽고 외롭고 여윈 이 몸은

퍼붓는 네 술잔에 그만 지늘꼈느니,

무섬증 드는 이 새벽까지 울리는 저승의 노래.

저기 성(城) 밑을 돌아나가는 죽음의 자랑 찬 소리여,

달빛 오히려 마음 어둘 저 흰 등 흐느껴 가신다.

오래 시들어 파리한 마음마저 가고지워라.

 

비탄의 넋이 붉은 마음만 낱낱 시들피느니

짙은 붐 옥 속 춘향이 아니 죽었을라듸야

옛날 왕궁(王宮)을 나신 나이 어린 임금이

산골에 홀로 우시다 너를 따라 가시었느니

고금도(古今島) 마주 보이는 남쪽 바닷가 한 많은 귀향길

천리 망아지 얼렁 소리 쇤 듯 멈추고

선비 여윈 얼굴 푸른 물에 띄웠을 제

네 한된 울음 죽음을 호려 불렀으리라.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린 것을

이른 봄 수풀이 초록빛 들어 풀 내음새 그윽하고

가는 댓잎에 초승달 매달려 애틋한 밝은 어둠을

너 몹시 안타까워 포실거리며 훗훗 목메었느니

아니 울고는 하마 지고 없으리, 오! 불행의 넋이여,

우거진 진달래 와직 지우는 이 삼경의 네 울음

희미한 줄 산(山)이 살풋 물러서고

조그만 시골이 흥청 깨어진다.

 


 

 

북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마저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長短)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닥타 - 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 같이 익어 가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물소리                                                   


바람따라 가지오고 멀어지는 물소리

아주 바람같이 쉬는 적도 있었으면

흐름도 가득 찰랑 흐르다가

더러는 그림같이 머물렀다 흘러보지

밤도 산골 쓸쓸하이

이 한밤 쉬어가지

어느 뉘 꿈에 든 셈 소리 없든 못할소냐  

새벽 잠결에 언뜻 들리어

내 무건 머리 선뜻 씻기우느니

황금소반에 구슬이 굴렀다

오 그립고 향미론 소리야

물아 거기 좀 멈췄으라

나는 그윽히 저 창공의 銀河萬年을 헤아려보노니  

 

 

 


수풀 아래 작은 샘                                    

 

수풀 아래 작은 샘

언제나 흰구름 떠가는 높은 하늘만 내어다보는

수풀 속의 작은 샘

넓은 하늘의 수만 별을 그대로 총총 가슴에 박은 작은 샘

두레박을 쏟아져 동이 가를 깨지는 찬란한 떼별의 흩는 소리

얼켜져 잠긴 구름 손결이

온 별나라 휘흔들어버리어도 맑은 샘

해도 저물녁 그대 종종걸음 훤듯 다녀갈 뿐 샘은 외로워도

그밤 또 그대 날과 샘과 셋이 도른도른

무슨 그리 향그런 이야기 날을 세웠나

샘은 애끈한 젊은 꿈 이제도 그저 지녔으리

이밤 내 혼자 나려가볼꺼나 나려가볼꺼나

 

 

 


사랑은 하늘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맹세는 가볍기 흰구름쪽

그 구름 사라진다 서럽지는 않으나

그 하늘 큰 조화 못 믿지는 않으나 

 

 


숲향기                                                   

 

숲향기 숨길을 가로막았소
발끝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따라 들길을 걸어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세워버렸소


 

 


거문고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번 바뀌었는데

내 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놓고 울들 못한다

 


 

 

미움이란 말                                            


미움이란 말 속에

보기 싫은 아픔 미움이란 말 속에

하잔한 뉘침

그러나 그 말씀 씹히고 씹힐 때

한 꺼풀 넘치어 흐르는 눈물 

 

 

 

 

 

 

김영랑 金永郞 (1903. 1. 16 - 1950)                                                             


본명은 윤식(允植)이다. 전라남도 강진(康津)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3·1운동 때에는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입학하여 중학부와 영문과를 거치는 동안 C.G.로세티, J.키츠 등의 시를 탐독하여 서정의 세계를 넓혔다.

 

1930년 박용철(朴龍喆)·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참가하여 동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除夜)〉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서정시를 계속 발표.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永郞詩集)》을 간행하였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金起林)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저항 자세를 보여주었고, 8·15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시의 세계와는 달리 행동파적 일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6·25전쟁 때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은신하다가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 

 

[작품 및 경향]

 

1930년 3월 박용철(朴龍喆), 정지용(鄭芝溶), 이하윤(異河潤) 등과 창간한 동인지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四行小曲)> 7수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시작활동 시작.

초기 -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 회의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도 비애의식(悲哀意識)은 영탄이나 감상(感傷)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 정감의 시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1940년 전후 - <거문고>, <독을 차고>, <망각>, <묘비명> 등 일련의 시작품에서는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 의식이 나타남. 이러한 죽음의식은 초기시에서와 같이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일제 치하의 민족관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해방 후- <바다로 가자>, <천리(千里)를 올라온다> 등은 일제 치하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강한 의욕으로 충만되어 있다.

시집으로는 <영랑시집>과 자선시집 <영랑시선> 이 있다. 
 


[김영랑論]

 

*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준 김영랑

 

김영랑(1903-1950)의 본명은 김윤식으로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강진 보통 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휘문 의숙을 다니다가 3.1운동으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이 일로 휘문 의숙을 중퇴한 김영랑은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다시 학업을 중단하고 강진의 자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강진에서 무료한 생활을 하고 있던 영랑에게 송정리의 벗 박용철이 찾아와 시 전문지를 같이 내자고 제안했다. 박용철은 오랜 숙의 끝에 사재를 털어 [시문학] 창간호를 1930년에 발간하게 된다.

 

1930년은 김영랑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 해 3월에 간행된 [시문학] 창간호에 13편의 시를 한꺼번에 발표하며 시단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나온 [시문학] 2호에 9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20편이 넘는 작품을 1930년 두 달 동안에 한꺼번에 발표했던 것이다.

 

김영랑의 시는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카프를 중심으로 쓰여진 경향시는 생경한 사상성과 경직된 목적 의식을 주로 드러냈기 때문에 당시의 시단은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주는 김영랑의 시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이로써 시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변화하였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방법적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경향시 위주였던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시에 대한 인식 변화시켜 김영랑의 시에는 '내 마음'이라는 어휘가 유달리 많이 보이는데 그가 이 말을 많이 사용한 것은 내면의 순결성을 표현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직접 제시하지 않고 대부분 자연의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하였다.

 

그의 초기 시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은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것들이다.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에 제시된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은빛의 강물, [제야]에 제시된 맑은 샘물과 밤의 심상, [가늘한 내음]에 제시된 보랏빛 노을의 고요한 아름다움, [내 마음 아실 이]에 나오는 향맑은 옥돌의 심상 등은 모두 마음의 순결성을 나타내는 예들이다. 이렇게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김영랑 서정시의 출발은 바로 이 순결성에 있었다. 이 순결성이 그의 시를 아름다운 해조와 서정주의의 극치로 몰아간 것이다. 그 순결한 마음은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대응되므로 분명히 파악되지는 않는다. 순결성은 꽃가지의 은은한 그늘이나 봄날의 미미한 아지랑이처럼 모호한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영랑은 자연의 맑고 깨끗한 정경을 통해 마음의 순결성을 보여 주었는데, 자연의 정결한 모습에 집중하게 되면 자연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황홀감을 갖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본래 자연을 통한 순결성의 추구는 현실 세계의 추악함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이때에 자연은 현실과 대립적 위상에 놓이게 된다. 현실은 고통과 비애가 교차되는 장소로 인식되는 반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은 이 모든 현실적인 것을 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의 많은 시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연의 어느 한 순간이 가져다주는 극치의 아름다움은 그의 정신을 몽롱케 할 정도로 황홀감을 안겨 준다. 저녁놀이 물드는 보랏빛 하늘, 밤 깊이 흐르는 물소리와 찬란한 별떨기, 은색으로 황홀히 빛나는 달빛, 맑은 가을날의 고요한 정경, 이 모든 것이 자연미의 한 정점을 보인 것이어서 시인은 그 황홀감에 가슴 설레며 몸둘 바 몰라 한다.

 

그런데 이 황홀한 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모란이 한번 흐드러지게 피어 그 찬란한 빛을 불태웠다가 천지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쉽게 소멸하는지 모른다. 자연의 순결성도 현실 세계의 혼탁함 때문에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지 않으며, 자연의 황홀한 아름다움 또한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면 영랑의 자연 인식은 비극적인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그 비극성이 그의 심혼을 긴장시키고 그의 서정시를 가능케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모란이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마음에 비탄과 상실의 감정이 남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해 놓았다. '뚝뚝'이라는 시어를 통해 모란이 무정히 사라져 버리는 정경을 소리로 나타내는가 하면, '떨어져 누운 꽃잎마져 시들어버리고'라는 시행을 통해 처절한 상실의 순간과 상실 뒤에 오는 형언할 수 없는 비탄의 정서를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삼백예순 날을 계속 울고 지낸다는 과정적 표현을 배치하여 그리움의 정도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한편으로 영랑의 자연에 대한 인식이 시인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적 장단과 호응을 이루며 하나의 정경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오롯한 미의 원광을 두르게 된다. 가령 영랑의 [오월] 같은 시는 봄 들판의 약동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인데 시각적 이미지를 적절히 구사하여 심미감을 높이고 운율의 변화를 통하여 흥겨운 율동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서정적 표현의 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우리 시의 역사에서 귀중히 간직하고 전수해야 할 표현 상의 백미(白眉)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판단한다.

 

* 맑고 깨끗한 자연의 정경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세계 표현

 

김영랑의 시에서 인생과 사회에 대한 발언이 중심을 이룬 작품은 아주 적다. 현실에 대한 반응을 보인 예로는 [거문고]라든가, [독을 차고], [우감(偶感)], [춘향] 등의 작품을 들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점 때문에 현실주의적 시각을 가진 사람은 김영랑의 시가 우리에게 어떤 효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앞에서 말한 [오월]처럼 자연의 정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일관한 작품은 그런 지적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만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는 관련이 없는 듯한 자연에 대한 상상도 우리의 감정을 풍요롭게 하며, 새로운 비유와 표현의 구사도 언어사용의 폭을 넓힘으로써 실제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자연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와 절묘한 기법으로 표현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김영랑의 시는 그 나름의 충분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글 이숭원 : 서울대 국문과졸, 현 서울여대 교수)

출처 :어둠속에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님

'아름다운 글,시,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 이상 시 모음  (0) 2010.10.04
시인 유치환 시 모음  (0) 2010.09.29
시인 정지용 시 모음  (0) 2010.09.29
시인 한용운 시 모음  (0) 2010.09.29
시인 김소월 시 모음  (0) 2010.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