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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만에 면위산을 다시 오른다. 법경대사자등탑비(보물17호)가 있는 하곡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도로 건너편의 면위산 능선을 바라본다. 하늘빛은 흐려도 지난번과 달리 능선의 실루엣이 선명하다. 지도를 미처 준비하지 못해 인터넷에서 복사한 개념도 한 장을 달랑 들고 올라간 면위산. 시작부터 비 내리고 7부 능선부터는 한겨울 같은 눈길 위로 작정한 듯 안개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지나온 길도 가야 할 길도, 앞서 간 이의 발자국도 보이지 않았던 춘설 속의 무장한 안개, 무중력의 느낌 같은 기온. 봄을 잉태한 만삭의 겨울산이 내지르는 진통의 절정, 소리 없는 단말마에 서릿발 같은 소름이 끼쳤던 춘설산행은 아름다웠고 슬펐다. 떠나가는 계절과 다시 오는 계절의 교차점에서 자연의 산고는 매번 저리 처절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산을 오른 길도, 내려온 길도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최단코스(하곡~하천가든~제1옥녀봉~ 제2옥녀봉~고라실, 펜션마을~하곡)로 이동했다는 걸 안 것은 산을 내려와 저녁을 먹던 식당에서였다. 우리의 산행이야기를 들은 식당주인 이수합(하천가든민박)씨는 “면위산은 길이 희미하고 골이 깊어 등산객을 구하러 올라간 구조대도 길을 잃는 산”이란다. 귀가한 이튿날 1/25,000 지도를 구해 등산로를 살펴본 후 윤태동·이종려씨에게 재산행 의사를 묻자 모두 흔쾌히 동의한다. 산처럼 든든한 친구들이다. 나흘 후 다시 면위산으로 향한다.
- ▲ 주능선에 오르면 주변 산들과 어우러진 충주호와 남한강의 물빛이 조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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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로 바람이 차다. 하곡리에 도착해 하천가든 앞을 지나는데 주인 내외가 2층 테라스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 인사를 건네니 들어와 커피 한 잔 하고 가라고 부른다. 산행 직전의 커피 한 잔을 어찌 사양할까. 감사의 인사와 함께 하산길에 픽업을 부탁하고 하천가든 뒤편 사과과수원을 지나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산행과 달리 하천가든 왼쪽 길로 방향을 잡는다. 산으로 향하는 마을길을 포장하기 위한 공사가 벌어져 있다. 마을 끝집인 것처럼 보이는 집 한 채를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벌을 키우는 집 한 채가 또 있다. 남의 집 안마당을 지나는 미안함에 스티로폼과 폐비닐들이 마구 나뒹구는 어수선한 마당을 속으로도 탓하지 못하며 조용히 지나간다.
길은 계류를 건너 골짜기 오른편으로 이어진다. 효부 김씨 묘를 지나자 갈림길이다. 지도와 능선을 번갈아 살펴보다가 효부묘 오른쪽 길로 접어든 지 10분 만에 길이 보이지 않아 왼쪽 사면을 거슬러 잠시 트래버스를 하는데 생강나무 노란 꽃망울이 헤실거리며 웃는다. 20여 분 후 주능선으로 오른다. 충주호리조트와 옥녀봉으로 갈라지는 아늑한 안부에 소나무와 굴참나무 사이로 충주호가 보인다.
- ▲ 하천대교에서 바라본 면위산. 오른쪽 뾰족 봉우리가 제1옥녀봉, 그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제2옥녀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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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옥녀봉을 올려다보며 걷는 암릉길에 속속 장관들이 펼쳐진다. 굴참나무 숲길의 낙엽 밟는 소리도 멋진데 조망이 좋은 곳마다 의젓한 노송들이 발돋움을 하고 충주호를 내려다보고 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암릉과 해빙으로 술빵처럼 부푼 흙길, 그 위로 수북이 쌓인 굴참나무 낙엽이 산객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1옥녀봉까지의 능선길 20여 분은 등 뒤로 따라붙는 충주호를 조망하느라 걸음이 한정 없이 지체되는데 돌아보니 천등, 인등, 지등의 삼등산이 보인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상도 하지. 산은 어쩌자고 그 이름만 생각해도 이렇게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인지. 산길은 더 없이 깨끗하고 굴참나무 숲은 겨우내 적적했던지 놀다 가라고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제1옥녀봉 수직절벽 아래 있다는 상탕으로 가는 길을 지나쳐 걷는다.
- ▲ 충주호를 조망하며 날카로운 암릉지대를 오르는 묘미가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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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봉과 한국코타(충주호리조트), 하곡마을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 안부를 지난다. 베일이 걷힌 1옥녀봉(695봉)은 지난번 춘설과 안개 속의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안개로 인한 신비감은 사라졌으나 충주호와 충주호리조트의 멋진 외관과 하천대교, 굽이쳐 흐르는 남한강 풍경이 거침없이 펼쳐진다. 1옥녀봉을 지난 능선에는 닷새 전의 춘설이 점점이 남아 있다. 제2옥녀봉이 어서 오라 손짓하는 굴참나무 숲길의 호젓함에 취해 모두들 몰입하며 걷는다. 10여 분 능선을 올라 제2옥녀봉에 닿는다.
2옥녀봉(709봉)의 돌무더기 앞에 ‘부산(婦山)’ 표지석이 있다. 충주시에서 세운 표지석에는 해발 780m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이 표지석의 위치와 높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국토지리정보원 발행 지도에 따르면 부산 표지석이 있는 이 봉은 709m봉이다. 윤의 권유로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든다. 이번엔 제대로 걸렸다. 그동안 윤이 리드하던 산행을 이제는 내가 앞장서라는 얘기다.
대열의 선두에 서니 발걸음에 힘이 가해진다. 두 사람이 뒤에서 웃는다. 동쪽 능선의 길이 점점 험해지고 풍경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그 아름다운 굴참나무 능선길 한 옆으로 현 위치 02번을 알리는 노란색 입간판이 쓰러져 뒹굴고 있다. 지난번 굴참나무 숲을 뒤덮고 있던 흰 안개는 얼마나 황홀했던가. 한순간 바람이 차가워지면서 사사샥-하는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에 눈부신 상고대가 형성되는 찰나를 목격하면서 우리는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두려움을 동반한 극한의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던, 오래 잊지 못할 경이로운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