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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호]악기장 (樂器匠) | 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27.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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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42호
명 칭 악기장 (樂器匠)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71.02.24
소재지 전국



※ 본문설명

악기장이란 전통음악에 쓰이는 악기를 만드는 기능 또는 그러한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고구려의 벽화 속에는 이미 관악기와 현악기, 타악기가 모두 출현하고 있어 악기를 만드는 장인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에 악기조성청이라는 독립된 기관을 설치하여 국가에서 필요한 악기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현재 우리나라 국악기는 약 60∼70종으로 가야금과 거문고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 다음으로 아쟁·대쟁·호금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와공후·수공후·당비파·향비파·양금·금과술 등이 제작되고 있으나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현악기는 울림통을 오동나무로 하고 밑판을 밤나무와 소나무 등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장식품의 조각은 대추나무나 흑단, 향나무 등을 많이 이용한다. 오동나무는 음향이 잘 진동하며, 말라도 틈이 생기지 않고, 좀이 먹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악기장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악기를 만드는 공예기술로 문화재 보전차원에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1995년 3월 16일 북 만드는 공예기술인 북메우기 종목이 악기장에 통합되었다. 악기장 기능보유자로 이영수, 고흥곤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보충설명

우리나라 전통악기를 제작할 수 있는 장인으로서, 이들의 악기제작에 소용되는 필수적 중요재료로는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 토(土), 혁(革), 목(木)의 여덟 가지가 있다. 이를 팔음(八音)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되어 전래하는 우리의 고유악기와 중국 또는 서역지방(西域地方) 여러 나라에서 수입하여 온 외래악기 가운데 현재까지 전승되는 악기는 약 60∼70종이다. 그 가운데서도 악기장으로 지정된 거문고의 김광주(金廣胄)가 그 기능이 탁월하였으나 작고하였으며, 현재 보유자는 이영수이다.

거문고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413∼492)대의 재상(宰相) 왕산악(王山岳)이 지은 것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발현악기(撥絃樂器)이고, 해금은 당대(唐代) 요하(遼河) 상류 호적(胡狄)들 중의 해부족(奚部族)에 속하는 유목민들 사이에서 생겨난 이래 송원대를 거치며 성행했던 알현(軋絃)찰주악기(擦奏樂器)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에 들어와서 우리 음악에 맞도록 개조되어 전한다.

거문고는 앞판으로 오동(梧桐) 소나무(松)의 칠목(漆木)을 쓰는데 석상자고동(石上自枯桐)을 으뜸으로 친다. 뒷판은 밤나무를 쓰며 용구(龍口)에는 규리(葵梨)산유자(山柚子)검은 매화(오매 烏梅) 등의 나무를 쓰기도 하고 때로 박달나무나 벗나무를 대용한다.

봉미(鳳尾)의 재료는 용구의 재료와 같은 것을 쓰며 환괘는 현침(絃枕)이라고도 하며 괘와 더불어 역시 용구봉미와 같은 재료를 쓰나 괘에 있어서는 황양목(黃楊木)을 가장 으뜸으로 꼽는다. 안족(雁足)과 진괘도 마찬가지 재료이며 좌단(坐團)은 갖가지 색의 목재(木材), 뼈(骨), 옥(玉) 등을 섞어 여러 무늬를 놓아 아름답게 꾸민다. 술대받이는 대모(玳瑁)를 최상으로 치고 이밖에 사슴가죽, 멧돼지가죽, 쇠가죽 등의 가죽으로 대용하기도 한다.

운족(雲足)은 재료가 용구봉미와 같고 변(邊)은 좌리(가梨)나 벚나무를 쓰며 술대는 산죽(山竹)이, 현(絃)은 생사(生絲)가 재료이고, 염미(染尾)는 진사(眞絲)를 쓴다. 해금(奚琴)의 재료는 줏대 즉 입죽(立竹)으로 쌍골죽(雙骨竹)을 쓰며 주철(柱鐵)은 철편(鐵片)을, 주아(周兒)는 조율의 구실을 하는 것으로 화리(華梨)가 최상이며 원산(遠山)은 일종의 한라(限裸)로서 박을 쓴다. 감자비는 은(銀)으로 만들고 활대는 푸른 껍질을 벗긴 개나리 가지를 써서 만들기도 하나 해죽(海竹)오죽(烏竹)을 대용하는 수도 있고 그 두 마구리는 은(銀)백동(白銅)두석(豆錫)동(銅) 등으로 쓴다. 궁현(弓絃)은 흰 말총이며 활대의 손잡이 가죽은 소가죽이다. 낙영(落纓)은 산성(散聲)과 채승(彩繩)에 얼러 늘어뜨려서 왼손의 농현(弄絃)하는 번잡함을 가리기도 하고 중앙의 밋밋한 부분을 장식하는 구실도 하는 일종의 댕기이다. 사슴가죽을 쓰기도 하고 전(氈)이나 비단에 수을 놓아 쓰기도 한다.

거문고나 해금은 위의 재료들을 써서 악기의 어느 구석 할 것 없이 모든 정성과 솜씨를 쏟아, 보기에도 아름답고 소리도 아름답게 해야 한다. 따라서 장식기능뿐만 아니라 음악과 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곁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 악기장의 어려움이 있다고 하겠다.

 

 

 

저파룡의 배에서는 ‘동 동 동’ 소리가 났다. 상제 전욱은 저파룡의 뱃 가죽 울리는 소리를 좋아하여 저파룡을 하늘나라의 악사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저파룡이 배를 두드리는 일은 재주가 필요한게 아니었는데도 그의 명성은 순식간에 세상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파룡의 가죽이 음악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자 저파룡의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기 시작했다. 맑게 울리는 북소리는 이상하게 힘이 있어 전쟁 때나 제사 때, 또 그냥 놀 때에도 이 북은 없어서는 안되는 물건이 되었다.

- [중국신화전설] (민음사, 1998) 중에서

악기장이란

악기장이란 전통 음악에 쓰이는 악기를 만드는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에는 궁중에 ‘악기조성청’이라는 독립적인 기관 안에 ‘풍물장’을 두어 궁중 악기를 제작하였다. 해방 이후 서양 음악이 발전하면서 국악이 설 자리를 잃고 그에 따라 국악기도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국가에서는 전통악기를 만드는 공예 기술 중 현악기는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으로, 북을 제작하는 기술은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3호 북메우기로 별도 지정하였다가, 1995년 3월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으로 통합되었다.

재래식 가죽북을 제작하는 기술자를 고장(鼓匠)이라 일컬어

북은 타악기로 통에 가죽을 덮어씌워 공명을 이용하여 소리내는 일종의 피명악기(皮鳴樂器)이다. 북은 한자로 고(鼓)라 하며 금속제의 쇠북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혁고(革鼓)에 한하며, 재래식 가죽북을 제작하는 기술자를 고장(鼓匠)이라 일컫는다. 한국의 상고시대에 있어서도 부여에서 천신께 제사하고 가무로서 즐기던 행사를 영고(迎鼓)라 하여 고대에 두레의 발전과 농악기로써의 북은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음이 추정된다. 조선시대 정악에 쓰인 북은 좌고(座鼓), 용고(龍鼓), 교방고(敎坊鼓), 절고(節鼓), 진고(晉鼓), 건고 (建鼓), 삭고(朔鼓), 응고(應鼓), 뇌고(雷鼓), 영고(靈鼓), 노고(路鼓), 장고(杖鼓) 등 14종에 달하고 민속악에서는 법고(法鼓), 소리북, 매구북, 소고(小鼓), 장구 등이 쓰였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북은 장구, 소리북, 고장북, 줄북, 소고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북들을 만드는 기술은 그에 필요한 가죽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에 집약되며, 그 다음에 북통을 만들고 현가(懸架)시설을 제작하는 문제 등이 부수된다. 일반적인 북은 쇠가죽을 사용하며 장구에는 개가죽을 사용한다. 특히, 큰북에 있어서는 4~5년생 한우의 황소 가죽을 제일로 친다. 쇠가죽도 그 부위에 따라 용도를 달리하는데 엉덩이 가죽은 음질이 딱딱한 좌고(座鼓)에 알맞고 목가죽은 저음이라서 소리북에 이용되고, 겨드랑이와 배가죽은 비교적 연하고 높은 소리가 난다. 그밖에 마피(馬皮)는 과거 정악(正樂)의 여러 북에 쓰였다고 하나 근래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3대에 이어 북을 만들다

윤덕진 선생은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향교리 출신으로 할아버지 윤억판, 아버지 윤랑구에 이어 3대째 북을 만드는 장인이다. 하동은 본래 경상남도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지리산 남쪽과 남해를 사이에 두고 섬진강이 흐르는 중요 교통요지로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지형이다. 하동에서 일찍부터 북이 만들어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지리산에 좋은 목재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주로 옛날에는 통북을 많이 만들었는데, 통북이란 북테가 조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나무통을 이용하여 만드는 방법이다. 이 통나무 북의 재료로 쓰이는 피나무, 물푸레나무, 춘향목(소나무) 등이 지리산에서 많이 나온다. 또 한가지 이유로는 하동의 장에 황소가 많이 나오는데 전국에서도 하동지방의 소가죽이 북 만드는 재료로서 가장 질이 좋기 때문에 예로부터 윤씨 집안은 이곳에서 터를 잡고 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경상도 지방보다는 전라도 지방이 소리북이나 농악이 성하였으므로 북의 소비성을 따라서 윤덕진 선생이 7세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순천시 동해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윤덕진 선생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도와 북을 만드는 중에 ‘여순사건’이 일어나 불행히도 아버지가 유탄에 맞아 돌아가시게 되자 생계가 어렵게 되었다. 이후 윤덕진 선생은 북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1950년 경찰에 투신하였으나 1954년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였다가 팔 부상을 입고 퇴직하였다. 이후 다시 북 만드는 일을 계속하였다. 1961년 35세 되던 해에는 전국적으로 경제가 침체되고 일반인들의 북에 대한 관심도가 없어 사업이 잘 안되므로 서울로 옮길 것을 결심하고 영등포 신길동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곳에서 2년동안 북을 만들다가 다시 이문동에서 5년동안 거주하다 1981년에 구리시 교문동으로 이사를 하여 조그마한 공방을 두고 북을 제작하였다.

 

1989년 경기 무형문화재 제6호로 인정되었고, 1991년에는 남양주 화도읍 창현리로 옮겨 ‘한국 전통북전수소’를 개설하였다. 65세 되던 1991년 5월 중요무형문화재 제63호 북메우기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북메우기 기능은 1995년 3월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으로 통합되었다.) 1994년 다시 구리시로 공방을 옮겨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 기능보유자가 된 이후 전통적인 방식으로 각종 북을 제작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2002년 뇌출혈로 별세하였다. 윤종국, 윤신 두 아들이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전수교육조교로 인정되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주요작품

줄북, 윤덕진, 31X45X45cm

줄북(Drum)
줄북은 몸통 부분에 줄을 매서 만들며, 줄이 늘어나 소리가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쐐기를 조이기 때문에 쐐기북이라고도 부른다. 북은 오동나무나 버드나무로 통을 만들고, 줄은 마른 가죽을 물에 하루 정도 담근 후 썰어서 만든다. 이때 궁판에 1치나 1치 5푼 정도의 넓이로 구멍을 뚫어 물기가 있는 상태로 양쪽 궁판을 서로 엇갈리게 당기면서 줄북을 메워 나간다. 줄을 당길 때 궁판의 가죽을 직접 뚫어 당기면 찢어지므로 테 가장자리에 굵은 철사를 넣고 끝을 한 겹 접으면 줄을 아무리 당겨도 찢어지지 않는다. 아울러 줄북에 철못을 쓰면 소리가 변질되므로 사용하면 안된다.

 

고장북, 윤덕진, 30X40X40cm

고장북(Drum)
고장북은 판소리의 반주에 사용하므로 소리북이라고도 한다. 북은 통과 가죽으로 구성된다. 통은 굵은 소나무를 통째로 사용해서 안쪽을 파내야 하는데 요즘은 굵은 소나무가 적어 일정한 두께의 쪽을 여러 쪽 붙여서 만든다. 가죽은 질과 두께, 부위에 따라 소리가 좌우되며 2-3년 된 쇠가죽을 무두질하는게 핵심적인 기술이며, 윤덕진 장인의 솜씨가 여기서 드러난다. 무두질은 몇 단계를 거치는데 우선 표면의 털을 제거하기 위해 석회물에 담그며, 기름기를 제거하고자 닭똥이나 된장물에 담그는 작업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다시 이것을 대패질하여 알맞은 두께로 만드는 복잡한 작업을 거쳐 완성된다.

 

장구, 윤덕진, 63X49X49cm

장구(Hourglass Drum)
장구는 양쪽 머리가 크고 중간 허리가 잘록한 형태를 하고 있어 세요고(細腰鼓)라고도 부른다. 장구는 오동나무나 버드나무 통의 양쪽 궁판에 개가죽과 노루가죽을 각각 씌워 만든다. 왼쪽은 손이나 궁굴채로 쳐 궁판이라 하고 오른쪽은 열채로 채판이라 부른다. 장구는 춤이나 소리의 반주악기로 쓰이는데, 리듬의 구실을 도맡아 아악을 비롯하여 속악, 극악, 농악, 민요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인다. 장구의 양편을 동시에 치는 것을 쌍(雙)이라 하고, 열채로 채편만 치는 것을 편(鞭), 왼손이나 궁굴채로 북편만 치는 것을 고(鼓), 그리고 열채로 잠시 치고 굴리는 소리를 내는 것을 요(搖)라고 한다.
윤덕진 선생이 사용하던 작업도구

 

 

북통의 재료와 도구
북통은 피나무가 연하고 가벼우며 대못을 잘 받기 때문에 가장 좋다. 15~20년생에서 베어낸 생나무는 서늘한 그늘에서 2~3년간 말려서 쓴다. 북통의 나무를 켜거나 다듬을 때에는 소목용 도구가 공통된다.

 

가죽의 재료와 도구
북 양쪽에 덮어 씌우는 가죽은 4~5년생의 황소가죽이 좋고, 장구는 개가죽을 사용한다. 쇠가죽을 북통에 씌우는 공정은 복잡하며, 다양하고 독특한 도구가 많이 필요하다. 우선 쇠가죽의 핏물을 빨고 백회 세 바가지와 닭똥 두 바가지를 섞은 다음 오줌 두 바가지를 다시 혼합한 후, 이것을 소가죽 위에 부으면 기름을 제거하고 털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이 작업이 끝나면 넓은 가죽을 이불 개듯이 접어서 나무 목욕통과 비슷한 ‘회통’에 넣고 적당한 돌로 누른다. 회통에 물을 가득 부어 3일 가량 담가 놓으면, 가죽이 불어나고 지방이나 털 그밖에 각종 이물질까지 제거된다.


다음으로 넓은 소가죽을 걷어 장대 위에 걸쳐 놓고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장두칼’로 문지르면 가죽 표면의 털이 제거되고 하얀 바탕으로 변한다. 또 가죽의 털을 제거할 대에 사용하는 ‘보디’는 북 메우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공구이다. 털을 밴 가죽을 냇가의 깨끗한 물에 3일간 담가두면 내부에 있던 석회질이나 닭똥 찌거기까지 다 빠져 깨끗하게 된다. 깨끗한 가죽을 V자형 다리를 세우고 비스듬하게 판을 단 ‘받침대’에 걸쳐 놓고 말린다. 다 건조하면 가죽을 펴면서 궁판의 가죽을 씌우거나 늘릴 때에는 ‘작기’를 사용한다. 생소가죽을 말리기 위해서는 사방 2m 정도의 넓은 ‘쟁판’이 필요한데, 여기에는 녹슬지 않는 25개 내지 30개의 ‘걸고리’가 필요하다.

약력

1926. 3월
출생
1989
경기 무형문화재 제6호 고장(鼓匠) 기능보유자 인정
1991. 5월
중요무형문화재 제63호 북메우기 기능 보유자 인정
1992
경기도 박물관 전통북 25종 복원 특별전
1995. 3월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으로 통합
1999
한양대학교 박물관 기획전시
2001
봉암사 대법고 설치
1991~2001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작품전 출품
2002 1월
별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1929.12.25 ~ | 보유자 인정: 1991년 5월 1일

 

 

소리가 곱지도 추하지도 않다면 금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그 덧없는 떨림을 엮어내는 틀이다. 그래서 금은 사람의 몸과 같고 소리는 마음과 같은데, 소리를 빚어낼 때 몸과 마음은 같다. 몸이 아니면 소리를 끌어낼 수 없고 마음이 아니면 소리와 함께 떨릴 수가 없는데, 몸과 마음은 함께 떨리는 것이다.


- 김훈, [현의 노래] 중

삶을 울리는 현의 노래 – 악기장

악기장(樂器匠)은 악기를 만드는 전문적 기술을 지닌 사람이다. 악기란 소리를 내어 높고 낮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 등으로 구별된다. 악기장의 맥은 인류가 악기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할 때부터 형성되었고, 그 기술은 국가의 주요 기술로 전승되어 왔지만 아쉽게도 악기장의 존재와 기능 전수에 관한 역사 기록은 많지 않다. 일반적으로 미미한 장인에 대한 기록 중에서 악기장에 대한 내용은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고구려 거문고의 탄생을 가능케 한 왕산악(王山岳)과 가야금의 역사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가야의 가실왕(嘉實王)기록, 대금의 연원과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에서 악기 제작과 관련된 내용을 일부 살펴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세가지 일화 모두 악기의 탄생과 전승 경로를 살피는데 도움을 줄 뿐 정작 악기를 만든 제작 주체와 방법 등은 현대적 개념의 악기장과 차이가 있다. 또한 고려시대 이전의 악기장 관련 기록은 거의 밝혀진 것이 없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면 [경국대전]의 공전(工典), 공장조(工匠條) 등에 다른 장인과 구분되는 풍물장(風物匠), 고장(鼓匠), 쟁장(錚匠) 등의 명칭이 표기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아래 국가의 예악(禮樂)이 중시되었다. 국가의 제례를 비롯한 각종 의례에 격에 맞는 주악(奏樂)의 예가 정립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가는 악기도감, 악기감조색, 악기수개청, 악기조성청 등의 특별부서를 두어 악기와 의례에 소용되는 의물 제작을 관장하였다. 이상의 악기 제작 기관 중 악기도감은 세종 이전에 두 번 설치되었던 적이 있으며 세종6(1462)년에도 생, 우, 지, 화, 금, 슬, 대쟁, 아쟁, 가야금, 거문고, 당비파, 향비파 등을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밖에 임진왜란 후인 인조2년(1624)과 병자호란 후인 1646년에 설치된 악기도감에서 종묘제례악 연주에 필요한 악기를 제작한 일이 있다. 악기도감은 이후 악기감조색, 악기수개청 등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인조 이후로는 악기조성청이라는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조선시대 국가의 악기 제작 기술은 국가 음악기구였던 장악원(掌樂院)을 통해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19세기 말 세습제가 단절되고 조선왕조의 멸망으로 전통적인 장인의 조직이 와해되면서 장악원 소속의 풍물장과 황엽장, 군기시 소속의 고장 등은 명칭조차 낯선 것이 되고 말았다. 아울러 악기 조성의 일을 국가에서 주도하거나, 장악원이 자체적으로 수요를 해결하던 조선시대와 달리 오늘날에는 국가가 악기제작에 직접 관여하고 있지 않고 가야금, 거문고 등의 악기 제작과 북 메우기 등의 기능이 중요무형문화재를 통해 전수되고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악지]에 나온 거문고에 관한 이야기

 

처음 진나라 사람이 칠현금이란 악기를 보냈는데
고구려 사람은 비록 그것이 악기라는 것은 알았으나
그것의 소리와 연주법을 몰라
나라에서는 이것에 능한 사람을 구하여 후하게 상을 준다고 하였다
그때, 제 2상 왕산악이 그 본래의 모양은 그대로 두고
법제를 대폭 고쳐 악기를 만들고
겸하여 100여곡을 지어서 이를 연주하니
이때 검은 학이 내려와 춤을 추었으므로
드디어 악기의 이름을 현학금이라 하였고
후에 현금이라 불렀다.

가야금에 관한 이야기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이를 만들었는데 왕은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각 다른데 그 성음이 어찌 같을 수 있는가' 하고 악사 '성열현 우륵'에게 명하여 열두 곡을 짓게 하였다. 후에 우륵은, 그 나라(가야)에 난리가 일어나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 가니 왕은 그를 받아들여 그 나라에 살게 하고 곧, 대나마인 주지(법지), 계고, 대사인 만덕 을 파견하여 그 업을 전수하게 하니 이들 세 명은 그의 열 한곡을 전수받고 말하기를, '이는 번거롭기 또한, 조잡하고 음란하여 정(正)하지 못하다'며 이를 다섯 곡으로 줄였다. 처음엔 우륵이 이 곡을 듣고 노하였으나 마침내 그 다섯 곡을 다 듣고 난 후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즐거우면서도 어지럽지 아니하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바른 음악이라 할 수 있다' 고 하였다. 그 곡을 임금 앞에서 연주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신하가 임금께 '가야국은 망한 나라이니 그 음악을 취할 바 아닙니다'라고 말하자 왕은 '가야왕은 음란하여 스스로 망한 것이지 음악이 어찌 죄가 된단 말인가'라고 했다.

가얏고와 현학(玄鶴) 길을 나서다 - 악기장 이영수 선생

악기장 이영수 선생은 1929년 12월 25일에 전라남도 정읍군 응동면 산성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 경기도 소래읍 미산리로 옮겨와서 소래초등학교를 다니면서 해방을 맞았다. 한국전쟁 이후 군대를 다녀온 후 외가의 소개로 조선시대의 마지막 악공이며 한중일 동양 3국의 악기를 제작한 경험을 보유한 김붕기 선생을 알게 되어 1954년 2월경부터 제자로 들어가 악기 제작 일을 시작한다. 김붕기 선생의 가야금제작소에서 타고난 손재주로 스승의 인정을 받으며 악기제작 기능을 전수받게 된다. 김붕기 선생의 문하에서 제작기능을 배우다가 1962년 1월 독립하여 그 해에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전속 악공으로 일하면서 따로 공장을 차려 관현악단에 있는 단원들의 악기를 제작, 수리하였다. 이 일을 1972년까지 계속하다가 퇴직하고 1972년 4월부터는 남산에 잇는 국립국악고등학교의 전속 악기 수리공과 악기제작공으로 들어가 공장을 열어 악기제작을 하였다. 그러나 1982년에 당국의 강제철거 요구로 국악학교를 그만두고 나와 한남동의 가정으로 철수하여 지금까지 악기 제작을 계속 하고 있다. 1979년에 전승공예대전에 향비파를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1984년에는 거문고로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주요작품

가야금, 이영수, 145X22cm

거문고, 이영수, 161X23cm

 

수공후, 이영수, 54X20X124cm

향비파/당비파, 이영수, 33x102cm

가야금의 구조와 제작과정

가야금의 구조
가야금은 악기의 몸통과 12현, 줄을 지탱해 주는 안족(雁足)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가야금 연주 때 오른손이 놓이는 부분에 좌단(坐團), 현침(絃枕), 돌괘 등이 부가되어 있고, 왼손 아래쪽으로 몸통에 줄을 걸기 위한 부들(染尾, 명주실이나 무명실을 꼬아 현악기의 현을 잇는 데 쓰는 줄), 봉미(鳳尾, 산조가야금), 양이두(羊耳頭, 풍류가야금) 등이 더 있다. 이 밖에도 시라기고토나 [악학궤범]의 가야금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끈이 있다. 또 악기에 부착된 것은 아니지만 부들 밑 부분에 헝겊을 깔아 농현을 할 때 부들과 실꾸리가 공명통에 부딪치는 소리를 방지하기도 한다.
 
산조가야금 제작과정
가야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공명통 윗판 재료인 오동나무 구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악기감으로 선택된 오동 원목은 일련의 건조과정을 거쳐 자연 건조된 오동나무 중 적당한 것을 골라 울림통을 만든다. 울림통을 완성하면 뒷판을 붙이기 위해 쫄대를 붙이고 버팀목을 댄 후 윗판과 밑판을 붙여 끈으로 묶은 다음 접착을 시킨다. 윗판과 밑판 붙이기가 완성되면 위산은 인두질을 한다. 인두질은 나무의 결이 자연스럽게 살아나고 병충해를 방지할 수 있으며 습기로 인한 부식 등을 막을 수 있게 한다. 인두질한 울림통에 변을 붙인다. 변은 화류(樺榴)나무, 벚나무, 장미나무 등 단단한 나무를 쓴다. 변은 먼저 목을 붙이고 나머지 머리, 몸통 순서로 붙인다. 울림통이 완성되면 장식을 하는데, 용두의 장식 재료는 소뼈와 변을 붙일 때 사용한 나무를 쓴다. 용두를 장식하는 것은 가야금 소리를 내는 것과 큰 상관이 없지만 손이 많이 가는 공정이다. 그러나 악기장들은 이 부분을 악기의 얼굴이라고 생각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악기장에 따라 장식하는 방법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장인’의 증표 구실을 하기도 한다.

 

(1) 몸통 깎기

(2) 안족 깎기

 

(3) 줄 끼우기

(4) 줄 조이기

 

 

이후 줄꼬기를 하는데 가야금 줄은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생사(生明紬)를 삶아 가닥수를 헤아려 꼰 것이다. 생사의 질이 얼마나 좋은가, 어떻게 줄을 꼬았느냐 하는 점이 가야금 소리를 결정하는 요인이므로 매우 중요한 공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금 줄은 ‘세줄꼬이’와 ‘외줄꼬이’ 방법으로 꼰다. 먼저 현의 굵기에 맞게 합사된 세줄을 꼬고, 세 줄을 한 줄로 꼰 다음, 다시 그 한 줄을 양쪽에서 단단하고 촘촘하게 꼬면 줄이 완성된다. 줄은 음 높이에 따라 굵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여 합사하고 줄꼬기가 완성되면 가마솥에 넣고 쪄서 건조시킨다. 완성된 울림통에 줄을 걸기 위해서는 현침에 줄을 고정하는 돌괘, 줄을 매는 부들, 줄을 거는 안족, 안족을 연결하는 끈, 장식용 매듭 등이 필요하다. 울림통에 줄을 걸어 완성하면 좋은 소리가 나는지 확인하며 음을 맞춘다.

약력
1929년
전북 정읍 출생
1954년
김붕기 선생의 가야금제작소에서 악기 제작
1962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악공
1972년
국악예술고등학교 전임악기장
1973년
일본 동경대 현악기 일체와 와공후, 수공후 납품
1977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악기 제작
1979년
전통공예대전 입선(향비파)
1981년
대전 연정국악원 창설 시 국악기 제작
1984년
전통공예대전 장려상(거문고)
1984년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창설 시 국악기 제작
1989년
경북대 편종, 평경, 거문고, 가야금 제작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보유자 인정
1991년
한양대 박물관 국악기 제작
1992년
전승공예대전 심사위원
1994년
영국 대영박물관 거문고 제작
1997년
전승공예대전 심사위원
2003년
진주 국악관현악단 25현 제작
2006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특별전시 [가얏고와 玄鶴, 길을 나서다 - 이영수 악기전]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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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