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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호] 조각장 (彫刻匠) | 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27.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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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35호
명 칭 조각장 (彫刻匠)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70.07.22
소재지 서울전역



※ 본문설명

조각장은 금속에 조각을 하는 기능이나 기능을 가진 사람으로, 조이장이라고도 한다. 금속조각은 금속제 그릇이나 물건의 표면에 무늬를 새겨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출토된 유물에 의하면 금속조각은 청동기시대에 처음 발견되었고, 삼국시대에는 여러 가지 조각기법이 사용되었으며, 고려시대에 매우 발전되었다. 그 후 조선시대에는 경공장(京工匠)의 금속공예 분야가 세분화되어 조각장이 따로 설정되어 있었다.

금속조각 기법으로는 평각(平刻)·투각·고각·육각·상감입사(象嵌入絲) 등이 있다. 평각이란 일명 음각이라고도 하는데 평면에 여러 가지 문양을 쪼아서 나타낸다. 투각은 바탕면의 문양에 따라 필요없는 부분을 정으로 쪼거나 오려서 빼낸다. 고각은 바탕면에 무늬를 도드라지게 튀어나오도록 한다. 육각은 가장 어려운 기법으로 기물의 외면과 내면에 정으로 두들기거나 오그려서 무늬를 나타낸다. 상감입사는 바탕에 홈을 파고 그 자리에 금·은·오동선 등을 넣은 후 빠지지 않게 다진다. 재료는 금·은·철·석·연·아연 등으로 다양하나 주로 은을 사용한다. 무늬는 산수·화조(花鳥)·구름과 용·덩굴무늬 등이 일반적이고, 조선말 이후에는 아름답거나 좋은 뜻을 지닌 문양이 주류를 이룬다.

조각장은 전통공예기술로 개화의 추진과정에서 기술과 전통이 크게 위축되고, 그 맥이 끊길 위험에 처해 문화재 보전차원에서 전통을 계승하고 보호하기 위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기능보유자 김철주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보충설명


『대전회통』에 따르면 근세 조선왕조에 경공장(京工匠) 가운데 공조(工曹)에 매였던 장인(匠人)의 수는 55종(種)에 255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금속공예(金屬工藝) 관계가 12종(種) 80명으로 약 30%를 차지, 그 비중이 컸다.

특히 개화기 이후에는 서울 종로 광교천변에 은방 도가(銀房都家)가 군집해 있어서 금은세공(金銀細工)의 중심이 되었다. 은방도가는 대공방(大工房)과 세공방(細工房)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전자는 주전자, 담배합, 신선로 등 큰 것을, 후자는 비녀, 가락지, 괴불, 방울, 노리개 등 자잘한 것들을 만들었다. 대공방과 세공방에서 만들어졌던 은제품에 무늬나 글씨를 조각하는 것이 조각장 또는 조이장이들의 일이었다.

구한말 은방도가의 솜씨를 이어 오늘에 이른 사람이 고 김정섭이다. 그는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거쳐 이른바 이왕가 미술품제작소에서 조각을 익혔으며 기(技)의 연마를 위해 다른 한편으로 이행원(李行源)과 김규진(金圭鎭)에게 서화(書畵)를 사사(師事)했고 직업학교 교사로 또는 고문으로 후진양성에도 열의를 다한 당대의 일인자이다.

백금(白金), 금(金), 은(銀), 철(鐵), 석(錫), 연(鉛), 아연(亞鉛), 알루미늄 등의 금속을 한 가지나 또는 합금한 것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진 물건의 금속면에 조각을 하는 데는, 강쇠로 만들어진 5cm 안팎의 자그마한 정을 쓴다. 조이질에는 정을 꼬늘 줄 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에는 촛정, 공군정, 다질정, 평다질정, 비늘정, 누깔정, 움푹정, 운풍정, 갈기정이 있고 이밖에 광을 낼 때 쓰는 광치기와 콤퍼스의 구실을 하는 거름쇠와 소도리, 조이틀 등이 갖추어져야 하며 같은 종류의 정도 용도와 대소에 따라 크기가 제각각이므로 도구만도 수 백 점에 이른다.

조이질할 것을 조이틀에 고정시켜 소도리로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쥐고 왼손 끝으로 정을 잡고 가볍게 쳐야 하며 정 끝은 언제나 안으로 향해 움직여야 한다.

조이질을 하는 무늬에는 수복문(壽福紋), 초롱문(草籠紋), 편복문(편복紋), 당초문(唐草紋), 난간문(欄杆紋), 사군자문(四君子紋), 십장생문(十長生紋), 산수문(山水紋), 화조문(花鳥紋) 등이다.

조각의 종류는 다음과 같이 나뉘어진다. 촛정을 쓰는 선각(線刻), 다질정을 엇비슷이 눕혀서 조이질하는 화각(花刻), 조이질한 금속편(金屬片)을 붕사땜하여 입체적인 효과를 내는 고각(高刻), 실톱, 다질정, 촛정을 섞어 써서 구멍을 뚫는 투각(透刻), 조이질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감탕질을 해가며 제몸에서 문양이 두드러지게 하는 육각 (肉刻)이 있다. 이때에는 다질정을 많이 쓴다. 조이질이 끝나고 광을 낼 때는 광쇠로 득득 긁어 빛을 내고, 어둡게 할 때는 모래맞치를 해야 한다.

1933. 8. 25 ~ | 보유자 인정: 1989년 12월 1일

 

 

“우리의 전통 금속공예가 외국 조형품에 밀려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장인의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전통의 맥을 지켜 나가는 정신입니다 (…) 웬만한 상감 조각 하나 만드는 데 6개월에서 일년이 걸려요. 모든 과정을 손으로 새겨 넣거나 깎아내는 작업은 마치 고승이 암자에서 홀로 도를 닦는 인고의 과정이나 다름없어요.


- <세계일보> 2007.01.17 중요무형문화재 김철주 조각장 인터뷰 중

금속에 생명을 불어넣는 조이질

금속공예품을 다루는 장인인 조각장(彫刻匠)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를 파서 형태를 완성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형태를 지닌 물건의 표면을 두드리거나 깎아 무늬를 새겨서 표면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다. 사실상 조각장이 하는 역할에 더 적합한 말은 조각이 아니라 금, 은, 동 따위의 금속제품에 어떤 무늬를 새기는 것(쇠붙이로 된 물건에 무늬를 쪼아 새기는 일)을 의미하는 ‘조이(雕螭: 본래 한자말이 아니라 한자 취음)’이다. 조각장(彫刻匠)이란 명칭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조이장(彫伊匠, 雕螭匠)이라고 했다. 조각이 된 금속공예품은 청동기시대 유물에서도 나타나고 삼국시대에는 무기류, 칠지도(七支刀), 마구, 화살통, 철제은입사장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포류수금문정병]처럼 선상감 제품이, 조선말에는 경회루 같은 풍경을 새긴 화각기법을 많이 볼 수 있다.

 

전통수공예는 조선조 이래 중앙의 경공장과 지방의 외공장(조선시대 지방관청에 소속되어 물품 제작을 담당한 지방기술자)에서 관수용품으로 맡아 제작하였는데 조선 후기 이후부터는 관청수공업체제의 붕과와 더불어 금, 은의 수급에 정부의 엄격한 통제가 가해지면서 공예적인 측면이 현저하게 쇠퇴하는 것이 이 무렵의 수공예 전반에 걸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조선왕조가 붕괴됨에 따라 기술자들은 자연히 광교천변으로 모여 들어 은방도가(銀房都家)를 열어 그 명맥을 유지했고 뒤이어 이왕직미술품제작소가 은방도가를 계승,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울 광교천변에 군집해 있던 금은방도가에는 입사장, 조각장 등의 금은세공인이 종사하였는데, 금속공예품을 만드는 도가(都家)는 주전자, 담배합, 신선로, 화병 등을 만드는 대공방(大工房)과 비녀, 가락지, 방울, 노리개 등의 패물과 수저를 만드는 세공방(細工房)으로 나뉘어 있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대공방과 세공방의 기본 체제는 같으나 다루는 재료나 품목이 전보다 다양해졌고 기물의 작고 큰 것에 의한 분류라기보다는 신변장신구, 혹은 일상생활용품에 따른 용도별 구분으로 세공과 대공의 영역이 나뉘어진다. 이렇게 대공방과 세공방에서 만들어진 금속제품에 대공, 세공별로 무늬나 글씨를 새기는 것이 ‘조이장이’의 일이었는데 옛날에는 은세공이 주였지만 개화의 추진과정에서 조각기술의 전통은 크게 위축되었다.

조각의 기법과 문양

조각장, 조이장의 ‘조이’란 옛 문헌에는 타출(打出), 누화(鏤花) 등으로 표기되었다. 우리의 전통적 금속표면 장식기법으로 금속제품에 무늬나 글씨를 새기는 것이 조각장의 일이다. 조각은 음각과 양각으로 크게 구분하지만, 둘 다를 포함한다. 다시 풀이하면, 파새김은 조각(engraving)이고, 돋을새김은 금속판을 두드려 입체감을 나타내는데 서양의 체이싱(chasing), 레푸제(repousse)이며 일본식 조금(彫金)이다. 조이에는 조각과 상감기법이 있다. 조각기법은 선각(線刻), 화각(花刻), 고가(高刻), 투각(透刻), 육각(肉刻)으로, 상감기법은 선상감(線象嵌), 면상감(面象嵌), 절상감(切象嵌), 눈금상감(포목상감, 布目象嵌), 고육상감(高肉象嵌), 소상감(銷象嵌) 등의 기법으로 나뉜다.

 

조각의 문양은 다른 전통공예품처럼 수복강녕, 부귀다남을 염원하는 내용들인데, 직선으로 연결한 기하학적인 뇌문(雷紋), 회문(回紋), 아자문(亞字紋)과 태극문, 팔괘문, 물가풍경인 포류수금문(蒲柳水禽紋), 구름문과 용문, 봉황문, 박쥐문, 새우문, 나비문, 연화문, 당초문, 모란문, 만자문, 범자문, 귀면문, 쌍희자문, 수복문, 십장생문 등이 주로 표현된다.

혼을 두드려 예술을 새기다 - 조각장 김철주 선생

김철주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조각장 초대 기능보유자인 김정섭 선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부친 김정섭 선생이 경영하고 있던 삼광상회에서 일을 도와가면서 금속조각을 차츰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일제 강점기 말기로 금, 은, 동 등을 강제로 공출해 가서 일반인은 자유로이 사용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판매도 할 수가 없어서 가내수공업으로 주문에 의하여 제작할 때였다. 해방 이후에는 와룡동(지금의 창경궁 앞)에 공방을 차리고 각종 기물과 패물 등을 제작하며 조각 일을 시작하였다. 1947년 백하금속조각사(白下金屬彫刻社)라는 공방을 열고 기술을 연마하였다. 그 후 효자동 근처에 백하금속조각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1963년에는 보석상을 경영하다 1967년부터는 가내공업으로 장위동과 종암동 등에서 금은세공과 아울러 조각을 계속하였다.

 

전수교육활동도 꾸준히 하였는데 공방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 외에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의 전신인 서라벌예술대학 공예과에서 조각기법 실기 기술을 강의하였으며 이후 국민대학교 공예과 및 홍익대학교 공예과 등지에서도 금속 조각기법을 강의하였다. 평생 동안 주로 제작한 형태는 조각과 오동, 금, 은입상감이 들어있는 화병, 향로, 함, 호리병, 쟁반, 잔대, 액자들이다. 화각, 상감(오동, 금, 은입상감)은 자주 쓰는 기법이다. 알루미늄에 전기착색(애노다이징)으로 조각을 처음 새긴 사람은 부친인 고 김정섭 선생인데 실험정신이 많았던 선생은 값비싼 은을 대신할 소재를 찾다가 라디오 부속판을 보고 힌트를 얻어 금속판에 조각을 시작했다. 현재 금속 공예가들이 애노다이징을 쓰기 시작한 것보다 십여 년 앞서서다. 김철주 선생도 그 뒤에 알루미늄판에 <반야심경> 등을 액자, 병풍 등으로 많이 조각하였다.

 

선생의 작품은 전통적 형태에 전통의 문양을 재창조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품형태는 이 시대의 형태라기보다 전통적 용도의 형태에 전통 무늬가 덮여있다. 지금도 사리함 같은 것은 매일 목욕재개를 하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면서 작업을 한다. 그래선지 선생의 작품은 강렬하거나 격렬하지 않다. 어느 자리에서도 정중동이다. 부친의 타계 이후 뒤를 이어 1989년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5호 조각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현재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 내에 위치한 공방에서 작품 활동과 함께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선생은 작품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물음에 “작품에는 몸이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하곤 한다.

주요작품

은제 오동입 봉황 상감 화병, 6×23cm

순은제 화병을 제작하여 밑그림을 그리고 바닥면에 홈을 파고 그 위에 금과 은을 넣은 후 상감을 하여 만든 작품

작업도구와 제작과정

조이질에는 주로 망치와 정이 사용된다. 망치는 조각이나 상감할 때 정을 치는 것으로서 크기가 보통 형태의 망치보다 작은 소도리라고 하는 것을 사용한다. 망치 앞의 형태는 정을 때리기 좋게 평평하고 뒤는 납작해지면서 끝이 좁아지는 형태이다. 정의 종류는 같은 종류의 정이라도 용도에 따라 크기가 제각각이다. 정을 크게 분류하면, 금속을 파는 조각정인 절각용 정과 모양이 있는 정으로 무늬를 찍는 압각용 정 등으로 분류된다.

 

김철주 선생은 금속면을 깎거나 파내는 조각정과 다른 금속을 감입할 때 쓰는 상감정을 주로 사용한다. 이외에 금속을 조각할 바탕재료는 주로 은이나 동 같이 무른 금속이 많이 사용되고 상감재료로는 바탕재료보다 잘 늘어나는 금, 은이나 동을 사용하며 문양에 따라 선이나 판재가 선택된다. 금사, 은사는 순금과 순은을 사용하며 오동은 은을 바탕재료로 사용할 때 색상의 차이를 위한 것으로, 동에 10% 정도의 금을 합금하여 전통적인 방법으로 착색을 하면 까마귀처럼 검은 색을 낸다 하여 오동(烏銅)이라 한다. 또한, 조각이나 상감할 재료를 점력에 의해 고정시켜 주면서 망치로 정을 두드려 조각이나 상감할 때 그 충격을 부드럽게 흡수하여 금속판의 변형을 방지해 주는 감탕이 사용된다. 감탕은 식으면 고체 상태로 단단하게 굳게 되고, 열을 가하면 걸쭉한 겔 상태로 녹아 흐르게 되므로 판재를 고정시키는 역할 뿐 아니라 기물 형태에 조이질 작업을 할 때에도 기물 속에 채워 넣을 수 있으므로 매우 용이하다. 그밖에 걸음쇠, 갈기, 광쇠, 조이틀, 땜 가위, 풀무불통, 광약과 기름 등이 사용된다.

약력
1933년
출생
1967년
백하금속조각연구소에 종사
1971년
서라벌예대 공예과 조각 전수조교
1978~1986년
전승공예대전 입선, 장려상
1989년
중요무형문화재 조각장 기능보유자 인정
1989년 ~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 작품전 출품 및 전수교육 활동
2007년
2007 무형문화재초대전 “김철주 조각전” 개최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