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32호 명 칭 곡성의돌실나이 (谷城의돌실나이)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70.07.22 소재지 전남전역
※ 본문설명
‘돌실’은 전남 곡성군 석곡면을 가르키는 것으로, ‘나이’는 삼베를 짜는 일(길쌈) 또는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삼베는 ‘베’라고도 불리며, 한자어로는 마·마포·포 라고도 한다. 곡성의 돌실나이는 예로부터 품질이 우수하고 섬세하여 삼베의 대명사로 불리웠다.
삼베는 전기 신석기시대의 유적인 궁산조개더미에서 뼈로 만든 바늘에 실이 감겨 있는 것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기술이 발달하여 중국으로 수출하였고, 문물교환의 수단으로 모시와 함께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면의 재배로 삼베의 생산이 약간 줄어들었다.
삼베의 제작과정을 보면 우선 재배를 해서 수확을 한 후, 잎을 훑은 삼단을 삼굿에 넣고 쪄서 껍질을 벗기고 햇볕에 말린다. 삼을 쪼개는 과정을 거친후, 실을 한올 한올 길게 잇는다. 그 후 베 한 필의 길이와 삼베에 따라 몇 올이 들어갈지 결정한다. 마지막으로 풀 먹이는 과정을 거친 다음 베틀을 이용해 베를 짠다.
오늘날 삼베의 폭은 30∼35㎝ 정도로 돌실나이가 9승, 안동포가 12승이 짜지고 있으며, 숫자가 높을수록 섬세한 포가 된다. 예전에는 북포(함경도 육진), 강포(강원도), 영포(경상도), 안동포(경북 안동)가 유명하였으나 서양문물의 유입에 따라 가내수공업으로 전락하면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곡성의 돌실나이는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는 김점순이 인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보충설명
곡성의 돌실나이는 전라남도 곡성군의 삼베짜기를 말한다. 석곡의 원래 이름이 ‘돌실’이며, ‘나이’는 길쌈을 뜻하는 말이다. 삼베는 전국적으로 생산되었으며, 길주(吉州), 명천(明川), 안동(安東) 등이 유명했다.
삼은 음력 삼월 하순에 파종하여 소서가 지나서 찐다. 냇가에서 삼솥에 넣어 삼을 찌고 냉수를 끼얹어 식혀서 삼껍질을 벗기고 상·하품(上·下品)을 골라서 따로 묶어둔다. 햇볕에 말린 삼껍질은 다시 물에 적셔 삼을 짼다. 짼 삼은 삼톱으로 훑어서 외피를 제거한다. 그런 다음 손톱으로 모시보다 굵게 다시 쪼개어 삼뿌리와 가지 끝을 서로 무릎에 대고 손으로 비벼서 잇는다. 이은 실은 채 또는 소쿠리에 둘레둘레 담았다가 이것을 다시 물에 적셔 물레에 걸어 자은 다음 돌곳에 올려 실컷(타래)을 만들어서 햇볕에 말린다. 실컷은 다시 물에 적셔 짚재에 버무려서 따뜻한 방에서 일주일 동안 띄운다. 띄운 실은 솥에 넣고 삶아낸 다음 깨끗이 빨아 2, 3일동안 담구어 놓는다. 이것을 잿물에 다시 삶아 햇볕에 말리면 희게 바래진다. 희게 바래진 실컷은 쌀뜨물에 치자물을 넣고 5∼6시간 담갔다가 건져내어 말린 다음 손으로 비벼 다시 말린다. 완전히 말린 실컷을 돌곳에 내려 실떡을 만든다. 실떡 1,800g(3근)이면 한 필을 짤 수 있다.
새와 날실의 길이를 결정하여 실을 마름질하는 과정을 베날기라 하며, 베날기가 끝난 실을 바디에 끼우고 베틀을 사용하여 베를 짠다. 베를 짜는 동안은 적당한 습도를 유지해야 한다.
삼베는 삼올의 굵기에 따라서 새가 정해진다. 가장 거친 상복용(喪服用)으로는 4새 두 번 걸이를 쓰고, 일을 할 때 입는 옷에는 5새 두 번 걸이, 5새 세 번 걸이 또는 6새를 사용한다. 7새만 되어도 고운편에 속한다. 최고 30새까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9새가 제일 촘촘한 편이다.
1918. 8. 2~2004. 12. 19 | 보유자 인정: 1970년 7월 22일
“(…) 손톱이 길게 쩍 갈라졌다/ 그 사이로 살이 허옇게 드러났다/ 누런 삼베옷을 입고 있었다/ 치마를 펼쳐 들고 물끄러미 그걸 내려다보고 있었다/내가 입은 두꺼운 삼베로 된 긴 치마/ 위로 코피가 쏟아졌다/ 입술이 부풀어 올랐다/ 피로는 죽음을 불러들이는 독약인 것을/ 꿈속에서조차 넘 늦게 알 된 것일까 (…)”
- 조용미 詩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중에서
우리의 삼베 역사
‘돌실나이’의 ‘돌실’은 전남 곡성군 석곡(石谷)면의 옛 이름이고, ‘나이’는 ‘베를 짜다’의 옛 표현인 ‘베를 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석곡에서는 예부터 전통적으로 세포(細布)의 삼베를 생산하였는데, 삼베하면 돌실나이라고 말 할 정도로 유명했기 때문에 그것이 명사화되어 생긴 이름이다.
삼베는 마포(麻布)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의 삼베 역사는 매우 깊다. 우리나라 인피섬유(靭皮纖維: 줄기 형성층의 바깥쪽 조직에 함유되어 있는 섬유. 체관부 섬유, 피층 섬유 따위로 이루어졌으며, 대부분 실용적으로 쓴다. 이것이 잘 발달된 대마, 아마로는 실과 베를 만들고 닥나무, 삼지닥나무로는 종이를 만든다)직물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이미 사용되어 왔고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예맥전(濊貊傳)]에도 마포의 생산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한시대에도 종마(種痲)가 있었다고 전한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의 험한 산중에서 마포가 산출된다고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보편적으로 삼국이 다 마포를 생산하였으며, 특히 고구려의 산간지방에서 많이 산출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세마포의 직조기술이 더 발달되어 중국으로 수출되었으며, 이때 마포 역시 문물교환의 수단으로 모시와 함께 사용되고 있었다.
스무 살 때 시집 온 뒤 삼베 짜는 일에 평생을 바쳐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현존하는 재래식 베짜기는 곡성에서 전해오고 있다. 곡성 삼베는 공이 많이 드는 세포이며, 곱기가 또한 모시같이 청결하여 다른 길쌈보다 더 공이 많이 든다. 이곳 아낙네들은 그들의 정성을 바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 왔다. 그 뛰어난 솜씨를 인정받아 일찍이 나라님의 진상품이 되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이 곳은 섬진강과 보성강이 삼면으로 흐르는 물 맑은 지방으로서 외부와는 번잡한 접촉이 없어 예로부터 가내공업으로 전해오는 베짜기를 지속하고 있다. 이 곡성 돌실나이의 특성은 지금도 예와 같은 세포로 질이 변함이 없다. 포의 폭 역시 옛날 그대로 35cm이며 한 필의 길이도 40자의 옛 규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이 곳에서 돌실나이 전통을 재래적으로, 기술적으로 가장 잘 고수하고 있는 사람이 故 김점순 선생이었다. 김 선생은 스무 살 때 시집 온 뒤 초막 같은 집에서 오직 삼베 짜는 일로 평생을 사셨다. 그 일로 한량 남편과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두 아들과 딸을 교육시키며 지내 온 억척스런 ‘한국의 어머니’였다. 친정어머니가 “아야, 돈 되는 굵은 베여야 돼”라고 하며 열심히 농포를 만들라고 했지만, “엄니 난 한 필을 팔아도 목돈 되는 것을 만들라요”라고 하며 고급삼베만 고집스럽게 짰다. 그 고집스러움이 돌실나이의 명맥을 이어가는 마지막 솜씨가 되어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1970년 지정)로 지정되었다. 김점순 선생은 농포(4~5새로 농부들이 입는 옷감이나 장례식 때 사용하는 상포용), 중포(6~7새로 보토 선비들이 입던 모시적삼이나 두루마기용), 세포(9~12새로 제일 고급 베로 임금이나 고위관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의 옷감) 짜기에 두루 능했다. 그 중에서도 한 올 한 올 정성을 다하여 짜야하는 세포 짜기에는 그 솜씨를 따를 자가 없었다. 물론 김 선생은 삼베 외에도 목화에서 베를 짜는 무명이나 누에고치 실을 뽑아내는 명주 베 등 안 짜본 것이 없었다.
주요 작품
삼베, 김점순, 37cm
삼베(Hemp Cloth)
한해살이 풀인 대마의 껍질을 벗겨서 짠 옷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국가 시대부터 사용하여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삼베를 만드는 핵심기술은 대마 껍질을 벗기고 갈라 쪼갠 다음 일정한 굵기로 잇는데, 물레를 돌리거나 실을 날고 베틀에 얹어 짜는 것은 일반적인 베짜기와 마찬가지이다. 삼베는 다른 옷감보다 올이 굵어 숭숭 뚫리기 때문에 바람이 잘 통한다. 김점순 선생이 짠 삼베 또한 그러하다. 길고 무더워 땀이 차는 여름철 옷감으로 삼베만한 것이 없다. 삼베의 색은 누렇고 거친 느낌이 나기 때문인지 요즘에는 수의를 비롯하여 상복을 짓는데 널리 애용되고 있다. 하지만 장례마저 검은 양복을 입고 치러 삼베로 짠 옷을 보기가 쉽지 않다.
작업과정 및 도구
삼베의 원료는 1년생 삼풀(대마: 大魔)이다. 3월 하순에 파종하여 소서가 지나 2~2.5m로 자라면 벤다. 베어온 삼풀은 ‘삼칼’로 가지에서 잎을 훑어 낸 다음, 삼단을 큰 솥에 어긋나게 넣고 한 시간쯤 쪄 삼굿을 만든다. 솥에서 꺼낸 삼굿은 즉시 껍질을 벗기는데, 벗긴 삼을 흐르는 물에 담가 대를 뺀 다음 한 묶음씩 만들어 말린다. 한 묶음씩 열 묶음을 ‘한 곰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한 곰뱅이’는 100묶음인 것이다.
하루 동안 쪼갤 수 있는 양만큼의 삼을 물에 적셔 짜서 마루나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 삼을 째는데, 왼손 엄지에 삼을 쥐고 손톱 끝으로 쭉 밀어 쪼개는데 단단한 것은 무릎 위에 걸치며 홅는다. 한 묶음의 삼을 다 째면 외손으로 삼머리를 쥐고 도마 위에 올려 삼톱으로 홅는다. 쪼개진 삼은 쩐지다리에 걸어놓고 손바닥에 침칠을 해서 하며 삼대가리와 끝을 허벅지에 대고 비벼서 소쿠리에 담으면 삼실이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삼실은 물에 적셔 물레로 짓는다. 이제 다시 돌굿에 올린 실것을 물에 적셔 짚재에 버무려 따뜻한 방에서 일주일 동안 재운다. 일주일이 지나 김이 무럭무럭 나는 실것의 재를 털고 큰 솥에서 푹 삶은 후 냇물에서 방망이로 두들긴 다음 2~3일간 햇볕에 말리면 하얗게 표백된다.
완전히 말랐으면 돌굿에 올려서 다시 내린다. 내린 실것은 고르게 만든 다음 소쿠리나 체에서 하나의 삼올 덩어리가 되어 꾸리에 열십자로 매어 감아둔다. 이것을 ‘실떡’이라고 한다. 실떡 한 뭉치는 꾸리 세 개쯤 만들며, 실떡 3근이며 40자 삼베 한 필을 짤 수 있다. 삼베를 짜는 과정은 날실을 날고(整經), 풀을 발라 베 메기를 하며(加湖), 베틀에 올려 짜며 명주베 모시베 무명베와 마찬가지다.
약력
1920년 8월
출생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2호 곡성의 돌실나이 기능보유자 인정
1988년
서울올림픽 기념축제 시연
1988년
한국민속 공예전
1970~2003년
보유자 작품전 출품
2004년 12월
노환으로 별세
글 한국문화재보호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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