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사도 베드로처럼 통회의 눈물 쏟고 싶건만..."

문성식 2011. 2. 13. 22:54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그 후 1] "사도 베드로처럼 통회의 눈물 쏟고 싶건만..."
 
 

<사진설명>
김수환 추기경은 아침식사를 마치면 숙소 마당을 두어 바퀴 산책한다. 지난해 가을, 건강을 기원하는 편지를 써갖고 부모와 함께 방문한 박지원(9)양과 낙엽 쌓인 마당을 걷는 김 추기경. [사진=전대식 기자]
 
 
추기경 김수환(85).
 
서울대교구장직에서 은퇴한 지 만 9년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정겨운 벗이자 착한 목자로서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혜화동 할아버지'의 넉넉한 웃음과 힘있는 강론은 예나 지금이나 세파에 지친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가 된다.
 
2003년 5월부터 63회에 걸쳐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를 연재해 좋은 반응을 얻은 평화신문은 창간 19주년 특별기획으로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그 후'를 시작한다. 김 추기경이 은퇴 이후 삶과 신앙생활을 중심으로 들려주는 이 시리즈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큰 목자의 사상과 인간적 면모를 진솔하게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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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인가 율리안나 비서수녀님이 "어떤 분이 기도와 미사를 요청했다"며 이름과 세례명을 적은 쪽지를 건네줬다.
 
임신 중인 유치원 교사인데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최악의 경우 뱃속 아기와 임산부 생명 중 택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는 수녀님을 통해 기도 부탁이 들어왔다고 하는데 얼마나 다급했으면 내게 기도를 요청했을까 싶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두 생명을 모두 구해 달라고 한참 기도했다. 그리고 기도 말미에 "하느님, 사실 그 자매님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제 체면을 봐서라도 꼭 들어주십시오. 사람들은 추기경이 기도해주면 뭔가 다를 거라고 믿습니다"며 떼를 썼다.
 
내 나이 어느새 85살이다. 기력이 쇠하고 여기저기 아프다보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밖에 없는 것 같다. 아니, 기도를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요즘도 본당이나 단체에서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 간간이 들어온다. 나를 잊지 않고 찾아주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행사 당일의 건강 상태를 장담할 수가 없어 참석하겠다고 선뜻 약속을 하지 못한다.
 
날이 갈수록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다. 잠이 안 와 뒤척이다 새벽녘에 잠깐 깊은 잠에 빠지곤 하는데 미사시각에 맞춰놓은 자명종 소리에 몸을 일으키면 손발이 아프고, 정신이 몽롱하다. 류머티즘 관절염 탓에 손발 통증이 심하다. 정신이 들면 "오늘 하루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부터 바치게 된다('그런데 이 통증만 덜어주시면 더 감사하겠는데…' 라고 하느님께 꾀를 내보기도 하지만). 밤새 잠을 설치면 목소리마저 시원치 않아 공식 석상에 나가는 것을 머뭇거리게 된다.
 
지난해 연말에도 몇 군데 본당에서 견진성사와 설립 30주년 기념미사 등의 주례를 부탁했다. 그때마다 "그날 아침에 일어나봐야 참석 여부를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추기경이 온다고 소문내지 말고 행사를 준비하라"고 말했다. 미사가 오전 11시에 시작되는데 두 시간 전인 9시나 돼서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화하고 찾아가는 형편이다.
 
어느 성당인가 초대를 받아 갔는데 마당에 나와 박수를 치며 환영하던 교우들이 깜짝 놀라면서 박수를 멈추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이유를 얼추 짐작한다. 사람들 뇌리 속에 있는 내 모습과 옷이 헐렁해 보일 정도로 야윈 지금의 모습에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자매에게 "왜 박수를 치다 마세요?"라고 넌지시 물었더니 "너무 마르셔서 딴 사람인 줄 알았어요"라며 야윈 노구(老軀)의 내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 선후배 사제나 아는 분들 병문안을 가면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분께 맡기세요"라고 위로한다.
 
나 역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산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와 '내 것'은 적어지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려는 마음이 강해진다. 내 기도는 하느님 안에서 남은 시간을 잘 살다가 하느님 품에서 잠들게 해달라는 것이다. 시간이 그다지 많이 남지는 않았을 게다.
 
1998년 5월,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나니까 사람들이 "섭섭하지 않냐?"고 많이 물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시원섭섭하다"는 것 외에 달리 할 말이 없는데, 문제는 홀가분해서 덩실덩실 춤을 출 만큼 시원한 것도 아니고 눈물이 날 만큼 섭섭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무뚝뚝한 남자도 오랫동안 몸담은 직장을 떠날 때는 눈물을 흘리건만 난 30년 동안 살았던 명동에서 혜화동으로 거처를 옮기는 날에도 무덤덤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면 어머님 말씀이 맞다. 어릴 때 어머니와 어디를 가더라도 난 나대로 앞서 걷고 어머니는 뒤에서 따라 오셨는데 언젠가 "네 형(김동한 신부)하고 가면 심심찮게 말도 붙이고, 재미난 얘기도 들려주건만 너는 어찌 그리 돌부처 같냐"고 불평하셨다.
 
나처럼 감정이 둔한 사람이 세상 천지에 또 있을까 싶다. 가슴 벅차게 기쁜 일이 생겨도, 억장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픈 일이 닥쳐도 도통 눈물이 나질 않는다. 오죽했으면 성령기도회에 참석해 작심하고 눈물의 은사를 청했겠는가.
 
난 오래 전부터 사도 베드로처럼 통한의 눈물을 쏟고 싶다는 원의(願意)를 갖고 있었는데 여태껏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던 날, 두려움에 떨며 그분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세 번째 부인할 때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면서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라고 말했다. 곧이어 닭이 두 번째 울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예수님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했다.(마르 15, 66-72)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눈이 짓무를 정도로 평생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울었다고 한다. 또 체포됐을 때는 자신 같은 배신자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바로 매달릴 수 있겠느냐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길 원했다고 한다.
 
나 역시 베드로와 다를 것이 없다. 인간적 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지 못한 적이 있다. 그로 인해 그분 뜻이 아니라 내 뜻을 앞세우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내 얄팍한 생각을 하느님의 뜻인양 떠벌린 적은 왜 없었겠는가.
 
그동안 주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을 생각하면, 그럼에도 내게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을 헤아리면 베드로보다 더 서럽게 통곡해야 마땅하다.
 
어떨 때는 내 마음이 사막같다는 생각이 든다. 은수자들이 절대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은혜로운 사막이 아니라 그저 모래바람만 불어대는 황량한 사막 같기만 하다.
 
내 뉘우침과 성찰이 부족함을 탓할 수 밖에 없다.
 
[평화신문, 제920호(2007년 5월 13일), 정리=김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