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목자 잃은 북녘 양떼에게 달려가고팠지만...

문성식 2011. 2. 13. 22:56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그 후 3] 목자 잃은 북녘 양떼에게 달려가고팠지만...
 
여러번 방북 무산...양떼 위한 기도 영원히
 
 
<사진설명>
어딘가에서 목자를 기다리고 있을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 애틋한 그리움과 슬픔이 밀려온다. 1991년 7월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장애인들과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평화의 종을 울리고 있다.
 
 
내 삶을 돌아볼 때마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부분이다.
 
내 전부인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모습으로 오셔서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시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그분은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꺽지 않으시고, 심지의 불이 하늘거린다 하여 끄지 않으셨다.
 
심지어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며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예수님이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나신다면 달동네건 피폐한 농가건 '낮은 자리'의 '작은 이들' 가운데서 태어나시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직할 때 해마다 성탄 전야에는 '낮은 자리'에 찾아가 '작은 이들'과 미사를 봉헌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더 바싹 귀를 기울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에 대한 사랑을 호소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의무감에서 나온 '땜질식 사랑'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 감탄하는데, 분명한 것은 그 삶은 우리에게 감탄하라고 보여주신 게 아니라 그대로 따르라고 제시해준 것이라는 점이다.
 
시몬느 베이유(1909~1943)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 질투를 느꼈다고 한다. '예수는 우리 인간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렸는데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하는 자책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유다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함께 사는 세상,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꿈꿨다. 그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나눠 지기 위해 장밋빛 미래를 포기하고 여공으로 취직해 노동운동가로 살았다. 런던에 머물 때, 의사가 폐결핵에 걸린 그에게 충분한 영양섭취를 권유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치 치하의 프랑스 동포들에게 배급되는 식량 이상으로 먹는 것은 진실에 대한 거짓말이라며 음식물을 제대로 삼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영양실조까지 겹쳐 34살 나이에 숨을 거뒀다. 폐결핵으로 죽었다기보다 굶어죽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난 세상의 고통과 비극을 온몸으로 껴안고 불꽃처럼 살다 간 시몬느 베이유에게 질투를 느낀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가 주최한 '굶주리는 북녘 동포를 생각하는 옥수수죽 만찬(1999년 6월 29일)'에 참석해 옥수수죽을 떠먹은 뒤 북녘 동포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호소한 적이 있다. 그때도 동포의 굶주림에 진정으로 동참하지 못한 채 신문 방송사 카메라 앞에서 '시늉'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한계를 느꼈다.
 
예나 지금이나 조건 없이 북녘 동포를 도와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이념의 장벽이 가로막혀 있다 하더라도 자동차로 한 두시간이면 닿는 지척에서 한핏줄이 굶주림과 질병에 쓰러져가는 상황을 방치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식량지원 문제는 정치, 군사적 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북한에 쌀을 보내주는 것을 '퍼주기'라고 비난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그들의 굶주림을 외면해 대량 아사(餓死)사태가 또 발생하고, 그로 인해 지금의 불안한 평화마저 깨진다면 후손들은 우리에게도 책임을 물을 것이다. 평화(平和)라는 글자는 벼[禾], 즉 밥이 모든 입[口]에 골고루[平] 들어간다는 뜻을 담고 있지 않은가.
 
북녘 형제들에게 보내주는 쌀은 아까워하면서 한 해 8조원에 달하는 음식물 낭비로 인한 손실액과 그에 따른 처리비용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다. 아울러 이웃 형제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은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에 병들어가는 우리를 치유해주는 약이 된다.
 
요즘도 북녘 동포를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아프다. 애틋한 그리움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평양교구장 서리(1975~1998년)로 있으면서도 양떼를 찾아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방북 기회는 있었다. 1987년에 북측과 사전 대화가 원활하게 잘 이뤄져 장익 신부(현 춘천교구장)와 정의철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장)가 구체적 일정을 협의하러 북한에 간 적이 있다. 두 신부의 보고에 의하면, 장 신부와 정 신부가 평양에 도착하자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생각해 볼 일이 있으니 잠시 여유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얘기가 없더니 마지막 날 비행기 출발 시간이 거의 다 돼 "존경하는 추기경님이 판문점에 버티고 있는 미군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오시는 것을 볼 수 없다"며 '보류'를 통보했다. 판문점을 통한 방북은 우리측 희망사항일 뿐이었는데 다른 본질적 이유는 감춰두고 그걸 트집 잡아 유야무야 덮어 버렸다.
 
언젠가 김일성 주석을 만난 뒤 한국을 방문한 미국 빌 그레이엄 목사를 수행한 사람이 "김일성 주석이 '그동안 김 추기경을 일곱 번이나 초청했는데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며 섭섭해 하더라"고 귀띔해줬다.
 
1970, 80년대에 북에서 큰 행사가 열릴 때면 보내오는 남측 초청인사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던 그 초청을 말하는 것 같았다. 횟수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정보기관 담당자가 그 초청장을 들고 몇 번 찾아온 적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외 선전용이지 진심으로 초청 의사가 있었던 게 아니라서 정부 차원에서도 응하지 않았다.
 
사목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초대였다면 조건을 달지 않고 지구를 한 반퀴 돌아서라도 북한에 갔을 것이다. 목자 잃은 신자를 단 몇 명이라도 만나고, 폐허가 된 성당터를 잠깐이라도 둘러볼 수 있는 기회였다면 머뭇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저간의 사정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다. 주교는 미사 마침예식에서 오른손으로 세 번 십자표시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한다. 그동안 마지막 세 번째 십자표시는 마음에 품고 있는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 내 마음 속 기도는 눈을 감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국교회, 특히 젊은 사제들에게 북방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한다. 한국교회 앞날에 거대한 선교적 과제가 놓여 있다. 형제간 친교를 통한 화해와 일치, 나아가 아시아 대륙 복음화가 그대들 어깨에 걸려 있음을 잊지 말아달라.
 
나는 2002년 북방선교 시대를 개척할 사제양성을 목적으로 옹기장학회가 출범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해 사재를 출연했다. 미력하나마 젊은 그대들에게 힘이 돼주고 싶다.
 
[평화신문, 제922호(2007년 5월 27일), 정리=김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