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자립
자립이란 존재의 참된 양식입니다. 이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또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얻고, 제발로 땅을 디디고 서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에 의한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며, 곧 하느님의 본질을 닮은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 발로 땅을 딛고 서 있고자 한다면, 곧 자주적 인격을 갖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모든 억압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모든 죄와 사리사욕에서 벗어나야 하며, 우리 인간이 지녀야 할 참모습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믿고 사랑하고 따라야 합니다. 철두철미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진실된 의미로 자립적 존재, 자주 자족의 존재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자립이란, 역설적인 말 같으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의존입니다. 온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여 고난과 십자가를 흔쾌히 지는 순명, 이를 위하여 자신을 남김없이 비우신 가난, 자신을 깨끗이 바치신 정결, 그리고 당신 자신을 우리의 생명으로 주시고 또 주시는 사랑,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자립이면서 동시에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계획의 완성, 곧 모든 인간의 구원과 해방, 곧 인간 자립입니다.
바로 이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순교 선열들의 그 순교 속에 그분들이 세상의 모든 죄와 구속에서 벗어난, 오로지 진리와 정의 및 사랑에 몸 바침으로, 참 인간으로서 그리스도를 닮은 자립적 인간으로 하느님 앞에 서 계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순교가 하느님 안에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참된 자기 성취 곧 자립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그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이겼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를 얻고, 자립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의존하고 그분과 일치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자유와 자립을 얻고, 그분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는 자유를 잃고, 자기 욕심과 죄악의 노예로 타락하게 됩니다.
완전한 자립, 곧 철저하게 하느님만 믿고 의존하는 행복한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하며, 온유하고 자비를 베푸신 사람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르며, 평화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일하다가 박해를 받고 슬퍼하고 모욕을 당하고 비난을 받는 사람들… . 이들이야말로 하느님 안에 가장 완전한 자유와 자립을 누리는 이들입니다.
진정한 자립이란 자기 성장을 충분히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 이웃과 남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자신을 비우고 바치며 이바지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 안에 하느님의 평화를 누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될 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에 믿음을 전하고 증거하며 하느님 나라가 임할 수 있도록 복음의 사도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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