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신앙 고백.
▶ 제 2 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185 “저는 믿나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동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신앙의 일치는 모든 이에게 규범이 되는, 그리고 동일한 신앙 고백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주는 신앙의 공통 언어를 요구한다.
186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는 처음부터 자신의 신앙을, 모든 사람을 위한 간결하고 규범적인 신앙 조문들을 통하여 표현하고 전달해 왔다.1) 또한 아주 일찍부터 교회는 신앙의 핵심을 유기적인 조문 형태로 결집 요약하고자 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세례를 원하는 예비 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신앙의 종합은 인간의 기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에서 핵심이 되는 것들을 골라 구성한 것으로서, 신앙의 유일한 가르침을 이룹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 안에 많은 가지가 들어 있듯이, 이러한 신경도 몇 마디의 말 속에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 담겨 있는 참된 신앙심의 모든 지식이 들어 있습니다.2)
187 이러한 신앙의 종합을 ‘신앙 고백’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신앙을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를 “크레도”(Credo)라고도 부르는데, 이러한 종합적인 기도문이 보통 “저는 믿나이다.”(Credo)라는 말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를 ‘신경’(Symbola fidei)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88 그리스 말 ‘심볼론’(Symbolon)은 깨뜨린 물건의 반쪽을 의미하는데, 이는 신원의 증표로 제시되던 것이다. 제시된 물건을 나머지 반쪽과 맞추어 보아 그것을 가진 사람의 신원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경’은 신앙인들 사이의 확인과 일치의 표시였다. 그리고 ‘심볼론’은 요약, 전서(全書) 또는 종합을 의미한다. ‘신경’은 신앙의 중요한 진리들을 요약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신경’은 교리 교육의 첫째 기준이며 근본 기준이다.
189 첫 ‘신앙 고백’은 세례 때에 이루어진다. ‘신경’은 무엇보다도 세례 신앙의 고백이다.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베풀어지므로, 세례 때 고백하는 신앙의 진리들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位格)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190 그러므로 신경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제1위격’(성부)과 그분의 놀라운 창조 업적, 다음에는 ‘제2위격’(성자)과 인간 구원의 신비, 끝으로 우리 성화의 근본이며 원천이신 ‘제3위격’(성령)에 대한 부분이다.”3) 이것이 “우리 세례 인호(印號)의 세 가지 주제이다.”4)
191 “이 세 부분은 서로 결합되어 있지만 또 서로 구분된다. 교부들이 종종 사용하던 비유를 따라 우리는 이 구분을 절(節)이라고 부른다. 사실 우리 몸에 사지를 구별하고 구분해 주는 관절이 있듯이, 이 신앙 고백 안에서 우리가 특별히 구분해서 믿어야 할 진리들에 대해 ‘절’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은 타당하고 옳은 일이었다.”5) 암브로시오 성인이 이미 확인한 오랜 전통에 따르면,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신앙 전체를 사도들의 수로 상징하고자 신경을 열두 절로 구분하는 관습이 있었다.6)
192 시대가 흐르면서 다양한 시대적 필요에 따라 많은 신앙 고백 또는 신경들이 있었다. 곧 사도 교회와 옛 교회의 여러 신경들,7) 이를테면 아타나시오 신경이라고도 불리는 ‘퀴쿰퀘(Quicumque) 신경’8), 몇몇 공의회의 신앙 고백들(톨레도,9) 라테라노,10) 리옹,11) 트리엔트12)), 교황들의 신앙 고백들(5세기 ‘다마소의 신앙 고백’13), 1968년 바오로 6세 교황의 ‘하느님 백성의 신앙 고백’14))이다.
193 교회 역사상 다양한 시기에 생겨난 신경들 가운데 어느 것도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 신경들은 변함없는 신앙에 대한 요약을 통하여 우리가 오늘날에도 그 신앙에 다다르고 깊어지도록 돕고 있다.
이 모든 신경 가운데 두 가지가 교회의 삶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194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을 충실히 요약했다는 점에서 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 사도신경은 로마 교회의 세례를 위한 옛 신경이다. 이 신경의 막중한 권위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신경은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사도좌가 있고 그곳에서 공적인 결정을 내렸던 로마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신경이다.”15)
195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라고 불리는 신경은 초기의 두 세계 공의회(325년, 381년)에서 나온 신경이라는 의미에서 큰 권위를 가진다. 이 신경은 오늘날에도 동방과 서방의 양대 교회에 공히 간직되어 있다.
196 이 책에서 신앙 교리는 이른바 “가장 오래된 로마 교리서”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에 따라 제시할 것이며, 때때로 더 명확하고 세밀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참조하여 보완해 나갈 것이다.
197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우리 모든 삶을 “표준 가르침에”(로마 6,17) 맡겼던 것처럼, 우리는 생명을 주는 우리 신앙의 신경을 받아들여야 한다. 신앙을 가지고 신경을 외우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며, 우리에게 신앙을 전해 주고 그 품 안에서 우리가 믿는 온 교회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신경은 영적인 인장이고, 우리 마음의 묵상이며, 늘 현존하는 보호이고, 우리 영혼의 보물임이 확실합니다.16)
신경(信經)들.
제 1 장 천주 성부를 믿나이다.
198 우리의 신앙 고백은 하느님으로 시작한다. 하느님께서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사 44,6)이시고, 모든 것의 시작이시며 마침이시기 때문이다. 성부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제1위격이시기에, 사도신경은 천주 성부로 시작한다. 창조는 하느님의 모든 업적의 시작이며 기초이므로, 신경은 천지 창조로 시작한다.
제1절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제1단락 천주를 믿나이다.
199 “천주를 저는 믿나이다.”라고 하는 이 신앙의 첫 언명은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신경 전체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그것을 하느님과 관련시켜 말한다. 십계명이 모두 첫째 계명을 밝혀 주듯이 신경의 모든 구절은 이 첫 구절에 종속된다. 다른 구절들은 인간에게 점진적으로 당신을 계시해 주신 그대로의 하느님을 더 잘 깨닫도록 해 준다. “신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1)
I.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200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구약의 하느님 계시에 근거한 하느님의 유일성에 대한 고백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고백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이 둘은 모두 근본적인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유일하시다. 오직 한 분의 하느님만이 계신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께서 본성과 실체와 본질에서 오직 한 분이심을 고백한다.”2)
201 하느님께서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께서 ‘유일한 분’이심을 알려 주신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을 유일하신 분, 하느님 당신께 돌아오도록 부르신다. “땅 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정녕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입으로 맹세하며 말하리라. ‘주님께만 의로움과 권능이 있다’”(이사 45,22-24).3)
202 하느님께서는 ‘유일한 주님’이시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4)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확인하신다. 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그 ‘주님’이심을 암시하신다.5) 그리스도교 신앙만이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유일하신 분,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 또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에 대한 신앙도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영원하시며, 무한하고 불변하시며, 불가해하고 전능하시며, 말로 표현할 수 없으신 참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한 분이시며, 삼위이시나 순전히 하나의 본질, 하나의 실체, 하나의 본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우리는 확고하게 믿으며 명백하게 고백한다.6)
II.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신다.
203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심으로써 당신을 계시하신다. 이름은 본질과 인격의 신원과 그 생명의 의미를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름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이름 없는 어떤 힘이 아니시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은 타인에게 자신을 알리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타인이 자신에게 다가와 자신을 더 깊이 알고 인격적으로 부를 수 있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그들에게 내 주는 것이다.
204 하느님께서는 점진적으로 그리고 여러 가지 이름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당신을 알리셨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을 위한 근본적인 계시로서 확인된 것은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산의 계약 전에, 불타는 떨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신 그 계시이다.
살아 계시는 하느님.
205 하느님께서는 불타면서도 타 없어지지 않는 떨기 속에서 모세를 부르신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하느님께서는 성조들을 먼 여행으로 부르시고 이끌어 주신, 조상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들과 그들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시는, 성실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그들의 후손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려고 오신다. 그분은, 공간과 시간의 저 너머에서,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고,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며, 이 계획을 위하여 당신의 전능을 발휘하실 하느님이시다.
“나는 있는 나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탈출 3,13-15).
206 “나는 있는 나다.”, “나는 곧 나다.” 또는 “나는 있는 자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당신의 신비한 이름 야훼(YHWH)를 알려 주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누구이시며 어떤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야 할지를 말씀해 주신다. 하느님께서 신비이시듯이, 하느님의 이 이름도 신비롭다. 그것은 이름을 알려 주는 것이고 동시에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며, 우리가 깨닫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무한히 초월해 계시는 그대로의 하느님께서 이 이름을 통해서 가장 잘 표현되신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이사 45,15)이시며 그 이름은 말할 수 없고,7) 그분께서는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이시다.
207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심으로써, 과거에도 그랬고(“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탈출 3,6) 미래에도 그러할(“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탈출 3,12), 변함없고 영원한 당신의 성실함도 동시에 알려 주신다.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알려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 곁에 늘 계시는 하느님이심을 알려 주신다.
208 당신께로 이끄시는 신비로운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미소함을 깨닫는다. 불타는 떨기 앞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대면한 모세는 자신의 신발을 벗고 얼굴을 가린다.8)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영광 앞에서 이사야는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사 6,5)이라고 부르짖는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하느님의 표징을 보고 베드로는 부르짖는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분이시므로 당신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는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이다”(호세 11,9). 요한 사도도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3,19-20).
209 하느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성경을 읽을 때,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은 ‘주님’(Adonai, 그리스 말로는 Kyrios)이라는 명칭으로 바꿔 읽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천주성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말로 표현될 것이다.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
210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금송아지를 숭배한9) 죄를 저지른 뒤에도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전구를 들으시고, 불충한 백성과 동행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다.10)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실 것을 청하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나의 모든 선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네 앞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탈출 33,19).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하신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탈출 34,6). 이에 모세가 주님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한다.11)
211 ‘나다’ 또는 ‘있는 자’라는 ‘하느님 이름’은, 인간이 죄를 지어 하느님께 불충했고 그에 따라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데도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푸시는”(탈출 34,7) 하느님의 신의를 드러낸다. 당신의 아드님을 내어 주시기까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자비가 풍성하신”(에페 2,4) 분이심을 알려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자 당신의 목숨을 내주심으로써, 바로 당신께서 ‘하느님 이름’을 가지고 계심을 알려 주신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하느님만이 ‘있다’.
212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느님 이름’의 계시 안에 담긴 내용의 풍요로움을 더 펼치고 심화할 수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유일한 분이시며, 그분 외에 다른 신은 없다.12) 그분은 세상과 역사를 초월하신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은 바로 그분이시다. “그것들은 사라져 가도 당신께서는 그대로 계십니다. 그것들은 다 옷처럼 닳아 없어집니다.……그러나 당신은 언제나 같으신 분, 당신의 햇수는 끝이 없습니다”(시편 102[101],27-28). 하느님께서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는”(야고 1,17) 분이시다. 그분은 항상 영원히 ‘있는 자’이시며, 그렇게 당신 자신과 당신의 약속에 항상 성실하신 분이시다.
213 “나는 있는 나다.”라는,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이름’의 계시에는 “하느님만이 ‘있다.’”는 진리가 담겨 있다. 칠십인역 성경과 그에 뒤이은 교회의 성전(聖傳)은 이미 ‘하느님 이름’을 이러한 의미로 이해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충만한 ‘존재’요 ‘완전’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그분께 존재와 소유를 받았으나, 오로지 그분께서만 자신의 존재 자체이시며, 그분의 모든 것은 그분 자신에게서 나온다.
III. ‘있는 자’ 하느님께서는 진리와 사랑이시다.
214 ‘있는 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을 “자애와 진실이 충만한”(탈출 34,6) 존재로 드러내신다. 이 두 단어는 ‘하느님 이름’의 풍요로움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업적을 통하여 당신의 자비로움과 선함, 은총과 사랑을 보여 주시며, 또한 당신의 신뢰성과 항구함, 신의와 진실도 보여 주신다. “당신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당신의 자애와 당신의 진실 때문입니다”(시편 138[137],2).13) 하느님께서는 ‘진리’이시다.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으시다”(1요한 1,5). 또 요한 사도가 가르치듯 하느님께서는 “사랑”(1요한 4,8)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진리이시다.
215 “당신 말씀은 한마디로 진실이며, 당신의 의로운 법규는 영원합니다”(시편 119[118],160). “주 하느님, 당신은 하느님이시며 당신의 말씀은 참되십니다”(2사무 7,28). 그러므로 하느님의 약속은 언제나 실현된다.14) 하느님께서는 진리 자체이시며, 그 말씀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인 신뢰로 모든 일에서 당신 말씀의 진실과 성실에 우리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타락은 하느님의 말씀과 자비와 성실을 의심하게 만드는 유혹자의 거짓말에서 시작되었다.
216 하느님의 진리는 창조하신 세계를 질서 있게 다스리시는 당신의 지혜이다.15) 홀로 “하늘과 땅을 만드신”16) 하느님께서만 당신과 피조물의 관계에 비추어 모든 것에 대한 참된 깨달음을 주실 수 있다.17)
217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계시하실 때에도 진실하시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가르침은 “진리의 법”(말라 2,6)이다. “진리를 증언하도록”(요한 18,37)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1요한 5,20).18)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
218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모든 민족 가운데서 그들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신 이유가 오로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을, 자신의 역사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었다.19)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신들을 구원하시기를 멈추지 않으시고,20) 그들의 불성실과 죄를 용서하신 것도21) 모두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219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비유된다.22) 이 사랑은 자녀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보다 강하다.23)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사랑하신다.24) 이 사랑은 가장 큰 배신도 이겨 낸다.25) 이 사랑은 가장 귀중한 선물까지도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요한 3,16).
220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다”(이사 54,8).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사랑은 결코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이사 54,10).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예레 31,3).
221 요한 사도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 하느님의 존재 자체가 사랑인 것이다. 때가 찼을 때 당신의 외아들과 사랑의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깊은 비밀을 알려 주신다.26) 그분은 영원한 사랑의 교환이신 성부, 성자, 성령이시며, 우리를 그 사랑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IV.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결과.
222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에 대단한 결과를 가져온다.
223 하느님의 위대함과 위엄을 깨달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깨달을 수 없이 위대하십니다”(욥 36,26).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을 “제일 먼저 섬겨야”27) 한다.
224 감사하며 살아감. 하느님께서는 유일한 분이시며, 우리의 본질 전체와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온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1코린 4,7).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시편 116[114-115],12).
225 모든 인간의 단일성과 참된 존엄성을 깨달음.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의 모습으로”(창세 1,26) 창조되었다.
226 창조된 만물을 선용함.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하여, 그것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면 선용하고, 하느님께 등을 돌리게 하는 것이면 멀리하도록 해 준다.28)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를 당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거두어 가소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를 당신께 가까이 가게 하는 모든 것을 주소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를 당신께 온전히 바치도록 저 자신을 버리게 하소서.29)
227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함. 신앙은 역경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신뢰하게 한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이를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무엇에도 너 흔들리지 말며
그 무엇에도 너 두려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하느님께서만 변치 않으신다.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가진 자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30)
간추림.
228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 마르 12,29). “최상의 존재는 단 한 분이어야 합니다. 곧 다른 동등한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만일 하느님께서 유일하지 않으시다면 그는 하느님이 아닙니다.”31)
229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를 오직 우리의 최초의 근원이요 최종 목적이신 하느님께만 향하게 하고, 하느님보다 먼저 다른 무엇을 선택하거나 하느님을 다른 무엇으로도 바꾸지 않도록 한다.
230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계시하시면서도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 머무르신다.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32)
231 우리 신앙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있는 자’라고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다. 그분은 당신을 “자애와 진실이 충만한”(탈출 34,6) 분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분의 ‘존재’ 자체가 ‘진리’이며 ‘사랑’이다.
'가토릭 교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1 편 신앙 고백, 제 2 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제 1 장 천주 성부를 믿나이다 (0) | 2021.10.03 |
---|---|
제 1 편 신앙 고백, 제 2 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제 1 장 천주 성부를 믿나이다. (0) | 2021.10.03 |
제 1 편 신앙 고백, 제 1 부 “저는 믿나이다” - “저희는 믿나이다”, 제 3 장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 (0) | 2021.10.02 |
제 1 편 신앙 고백, 제 1 부 “저는 믿나이다” - “저희는 믿나이다”, 제 2 장 인간을 만나러 오시는 하느님, 제3절 성경 (0) | 2021.10.02 |
제 1 편 신앙 고백, 제 1 부 “저는 믿나이다” - “저희는 믿나이다”, 제 2 장 인간을 만나러 오시는 하느님, 제2절 하느님 계시의 전달 (0) | 2021.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