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신앙 고백.
▶제 1 부 “저는 믿나이다” - “저희는 믿나이다”.
▶제 3 장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
142 계시로써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1) 이러한 초대에 합당한 응답이 바로 신앙이다.
143 신앙으로써 인간은 온전히 자신의 지성과 의지를 하느님께 복종시킨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전체로,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동의를 드리는 것이다.2) 성경은 계시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인간의 응답을 “믿음의 순종”이라고 부른다.3)
제1절 저는 믿나이다.
I. 믿음의 순종.
144 믿음의 순종이란(‘순종하다’라는 라틴 말 oboedire는 ob[에게]와 audire[듣다]의 합성어이다.) 자신이 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자유로이 순종하는 것이며, 이는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그 말씀이 진리임을 보증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이러한 순종의 모범으로 제시하며, 동정 마리아께서는 이를 가장 완전하게 실현하셨다.
아브라함 - “모든 믿는 이의 조상”.
145 히브리서는 조상들의 믿음을 찬양하면서 특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한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히브 11,8).4)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약속된 땅에서 이방인으로 또 순례자로 살았다.5) 믿음으로, 사라도 약속된 아들을 잉태하게 되었다. 믿음으로, 마침내 아브라함은 자신의 외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친다.6)
146 이처럼 아브라함은 히브리서가 제시하는 믿음의 정의(定義)를 그대로 실현한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로마 4,3).7)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진”(로마 4,20) 아브라함은 “믿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로마 4,11.18)가8) 되었다.
147 구약 성경에는 이러한 신앙에 대한 증언이 풍부하다.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인정을 받을”(히브 11,2.39) 만한 조상들의 모범적인 신앙을 찬양한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는데”(히브 11,40), 그것은 바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히브 12,2)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은총이다.
마리아 - “행복하십니다, 믿으신 분”.
II.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2티모 1,12).
148 동정 마리아께서는 가장 완전하게 믿음의 순종을 실천하신 분이시다. 마리아께서는 믿음 안에서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9)는 말씀을 믿으시고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주님의 탄생 예고와 약속을 받아들이시며,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동의하신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하고 인사하였다.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에 모든 세대가 마리아를 행복하다고 일컫는 것이다.10)
149 일생 동안, 그리고 극도의 시련,11) 곧 그 아드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끝까지 믿으셨다. 그래서 교회는 마리아를 가장 순수한 믿음을 실현하신 분으로 공경한다.
하느님만을 믿음.
150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격적으로 하느님께 귀의(歸依)하는 것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전체에 대하여 자유로이 동의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께 인격적으로 귀의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에 동의하는 것이므로, 인간을 믿는 것과는 다르다. 자신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맡기며 그분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그러한 믿음을 피조물에 두는 것은 헛되고 어리석은 일이다.12)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151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보내 주신 아들, “그분의 마음에 드는 아들”을13) 믿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14)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느님이시며 강생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믿을 수 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그분께서는 “아버지를 본”(요한 6,46) 분이시기 때문에,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보여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15)
성령을 믿음.
152 그분 성령의 도움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기”(1코린 12,3) 때문이다. 인간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려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1코린 2,10-11). 하느님 홀로 하느님을 온전히 아신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이시므로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교회는 한 분이신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신앙을 끊임없이 고백한다.
III. 신앙의 특성.
신앙은 은총이다.
153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태 16,17)라고 밝히신다.16)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덕이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으려면 하느님의 도움의 은총이 선행되어야 하며, 성령의 내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성령께서는 마음을 움직이시고, 하느님께로 회개시키시며,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고 ‘진리에 동의하고 믿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을 모든 이에게 베푸신다.’”17)
신앙은 인간 행위이다.
154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은총과 내적인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믿는 것이 참으로 인간적 행위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따르는 것이 인간의 자유나 지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관계에서조차 우리가 상호 일치를 위해 타인이나 그 의향을 믿고,(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혼인할 때처럼) 그 약속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인간적 품위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신앙을 통하여 드러내고”,18) 하느님과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일은 결코 우리의 품위를 해치는 것이 아니다.
155 신앙 안에서, 인간의 지성과 의지는 하느님의 은총과 협력한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움직여진 의지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이다.”19)
신앙과 지성.
156 계시된 진리들이 우리의 자연적 이성에 비추어 참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이 신앙의 동기는 아니다. “스스로 그르칠 수 없고 우리를 그르치게 하지도 않으시는, 계시하시는 하느님 바로 그분의 권위 때문에”20) 우리는 믿는다.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적 동의가 이성에도 부합하도록, 하느님께서는 성령의 내적 도움이 당신 계시의 외적 증거들과 함께 주어지도록 하셨다.”21) 예를 들어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기적,22) 예언, 교회의 확산과 그 거룩함, 그 풍요함과 확고함은, “모든 이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계시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이며”,23) 신앙의 동의가 “결코 정신의 맹목적인 작용이 아니라는 것”24)을 보여 주는 믿음의 동기들이다.
157 신앙은 확실한 것이며, 그것이 거짓 없으신 하느님의 말씀 자체에 근거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인식보다 더 확실하다. 물론 계시된 진리들이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에 비추어 모호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자연적 이성의 빛이 주는 확실성보다 하느님의 빛이 주는 확실성이 더 크다.”25) “만 가지 어려움도 하나의 의심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26)
158 “신앙은 이해를 요구한다.”27) 믿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믿는 분을 더 잘 알고자 하며 그분의 계시를 더 잘 이해하고자 한다. 한편 더 깊은 이해는 다시금 더 강하고 점점 더 사랑에 불타는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신앙의 은총은 “마음의 눈”(에페 1,18)을 열어 줌으로써 계시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한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계획 전체, 신앙의 신비, 신비들의 상호 관계, 계시된 신비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와 이루는 관계에 대한 이해가 포함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계시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도록 당신의 은총으로 항구히 신앙을 완성시켜 주신다.”28)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금언대로 “믿기 위하여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29)
159 신앙과 과학. “신앙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기는 하지만, 신앙과 이성 사이에 진정한 불일치는 있을 수 없다. 신비를 계시하고 신앙을 주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인간의 정신에 이성의 빛을 비춰 주시기 때문이며,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시거나 진리가 진리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30) “그러므로 모든 분야의 방법론적 탐구가 참으로 과학적 방법으로 도덕규범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결코 신앙과 참으로 대립할 수 없을 것이다.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실재는 다 똑같은 하느님에게서 그 기원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오히려 겸허하고 항구한 마음으로 사물의 비밀을 탐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만물을 보존하시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31)
신앙의 자유.
160 신앙이 인간적인 응답이 되려면, “인간이 하느님을 자유로이 믿고 응답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억지로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 사실 신앙 행위는 그 본질상 자유로운 것이다.”32)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당신을 섬기도록 부르시므로 인간은 이에 양심으로 매이지만 강제당하지는 않는다.……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33)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앙과 회개로 초대하시지만 결코 이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진리를 증언해 주셨지만, 반대자들에게 그 진리를 힘으로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의 나라는……진리를 증언하고 들음으로써 굳건해지며 사랑으로 넓혀진다.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으로 인간을 당신께 이끌어 들이신다.”34)
신앙의 필요성.
161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 구원을 위하여 그분을 보내신 분을 믿는 신앙이 필요하다.35)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고’(히브 11,6), 하느님 자녀의 신분을 얻지 못하며, ‘끝까지 견디지’(마태 10,22; 24,13)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36)
신앙의 항구함.
162 신앙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상으로 베푸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이 선물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훌륭한 전투를 수행하십시오. 믿음과 바른 양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양심을 저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파선당하였습니다”(1티모 1,18-19). 신앙 안에서 살고, 성장하고 마지막까지 항구하려면 하느님의 말씀으로 신앙을 키워야 하며, 주님께 신앙을 키워 주시도록 간구해야 한다.37) 이 신앙은 “사랑으로 행동”(갈라 5,6)하고,38) 희망으로 지탱되며,39) 교회의 신앙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신앙 - 영원한 생명의 시작.
163 신앙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 순례해 가는 목표인 ‘지복 직관’(visio beatifica)의 기쁨과 빛을 미리 맛보게 해 준다. 그때에 우리는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 보고”(1코린 13,12), “그분을 있는 그대로”(1요한 3,2)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미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신앙의 축복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바라보지만, 그것은 장차 누리도록 신앙이 우리에게 보증해 주는 놀라운 것들을 이미 소유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40)
164 한편 지금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며”(2코린 5,7),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1코린 13,12) 하느님을 알 뿐이다. 우리가 믿는 그분께서 신앙을 비춰 주신다 해도 우리의 신앙은 종종 어둠 속을 지나기도 한다. 신앙은 시련에 처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흔히, 신앙이 우리에게 보장해 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한다. 악과 고통, 불의와 죽음의 경험은 ‘기쁜 소식’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며, 때로 신앙을 흔들기도 하고, 유혹이 될 수도 있다.
165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증인들, 곧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믿은 아브라함, “신앙의 나그넷길에서”41) 당신 아드님의 수난과 그 무덤의 어둠을 함께함으로써42) “신앙의 어두운 밤”43)에까지 도달하였던 동정 마리아와 그 외의 많은 신앙의 증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의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브 12,1-2).
제2절 저희는 믿나이다.
166 신앙은 인격적인 행위이다. 곧, 먼저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다. 그러나 신앙은 고립된 행위가 아니다. 누구도 홀로 믿거나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누구도 스스로에게 생명을 줄 수 없듯이 스스로에게 신앙을 줄 수 없다. 신앙인은 다른 이에게서 신앙을 받으며, 그 받은 신앙을 또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예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신앙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우리를 재촉한다. 각 신앙인은 마치 신앙인들이 이루는 커다란 사슬의 고리 하나하나와 같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으며, 또한 나의 신앙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지탱하는 데 이바지한다.
167 “저는 믿나이다.”44) 이는 주로 세례 때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고백하는 교회의 신앙이다. “저희는 믿나이다.”45) 이는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이, 더 일반적으로는 신자들의 전례 모임이 고백하는 교회의 신앙이다. “저는 믿나이다.” 이는 교회가 자신의 신앙으로 하느님께 응답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저는 믿나이다.”, “저희는 믿나이다.” 하고 말하도록 가르치는 것 또한 우리 어머니인 교회이다.
I. “주님, 당신 교회의 믿음을 보십시오.”.
168 교회가 먼저 믿고, 이로써 나에게 그 신앙을 전해 주고, 키워 주고, 지탱해 준다. 어디에서나 먼저 주님을 고백하는 것은 교회이며(“땅에서는 어디서나 거룩한 교회가 당신을 찬미-고백-하나이다.” 하고 우리는 사은 찬미가(謝恩讚美歌)에서 노래한다.),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우리는 “저는 믿나이다.”, “저희는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도록 인도된다. 우리가 세례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과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교회를 통해서이다. ‘로마 예식서’에서 세례 집전 사제가 예비 신자에게 “당신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하고 물으면 그는 “신앙을 청합니다.” 하고 응답한다. “신앙이 당신에게 무엇을 줍니까-” 하고 물으면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46) 하고 응답한다.
169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온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의 생명을 교회를 통하여 받게 되므로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다. “우리는 교회를 새로운 생명의 어머니로 믿는 것이지, 교회를 우리 구원의 창시자로 믿지는 않는다.”47)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므로 또한 우리 신앙의 스승이기도 하다.
II. 신앙의 언어.
170 우리는 신앙 조문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조문이 표현하고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 “접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실재를 믿는다. “신자의 (신앙) 행위는 진술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진술된) 실재에 머무른다.”48) 우리는 이러한 신앙 조문(신경)의 도움으로 실재에 다가갈 수 있다. 이로써 신앙의 표현과 전달, 공동체의 신앙 거행(전례), 신앙의 생활화가 점점 더 가능하게 된다.
171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인”(1티모 3,15) 교회는 “성도들에게 단 한 번 전해진 믿음”을49) 충실히 지킨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기억을 지키는 것도 교회이고, 사도들의 신앙 고백을 대대로 전하는 것도 교회이다. 마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말을 가르치고 그 말을 통하여 깨닫고 그것을 나누도록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 어머니인 교회 역시 우리를 신앙의 이해와 삶으로 이끌고자 신앙의 언어를 가르친다.
III. 하나인 믿음.
172 교회는 오래전부터 수많은 언어와 문화와 민족과 나라들을 거치면서 줄곧 한 분이신 주님께 받은 자신의 유일한 신앙을 고백해 왔다. 이 신앙은 하나의 세례를 통하여 전달되며, 모든 사람이 오로지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확신에 뿌리박은 신앙이다.50) 이러한 신앙의 증인인 이레네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73 “땅 극변에까지 온 세상에 전파된 교회가 사도들과 그 제자들에게서 이어받은 가르침과 신앙을……교회는 충실히 간직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온 세상 곳곳에 퍼져 있지만 같은 한집안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온 교회는 마치 한 영혼과 한마음만을 지니고 있듯 이것을 믿고, 또한 흡사 하나의 입만을 가진 듯 일치된 목소리로 그것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또 전수합니다.”51)
174 “세상의 언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신앙 전승의 내용은 하나이며 같습니다. 게르마니아 지방에 세워진 교회들이 믿고 또 전수하는 것과 켈트 지방이나 동방의 교회들, 이집트나 리비아의 교회들, 그리고 세계 중심에 있는 교회들이 믿고 전수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52) “그러므로 전 세계에 걸쳐 나타나는 구원의 유일한 길이 교회 안에 있으므로 교회의 선포는 참되며 확고합니다.”53)
175 “우리는 교회로부터 받은 이 신앙을 정성스럽게 보호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성령의 작용으로, 훌륭한 그릇에 담긴 값진 유산과 같은 이 신앙은 끊임없이 스스로 젊어질뿐더러, 그것을 담은 그릇 자체도 젊게 하기 때문입니다.”54)
간추림.
176 신앙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인간이 인격적으로 온전히 귀의하는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행위와 말씀을 통하여 당신 자신에 대해 밝혀 주신 계시를 지성과 의지로 따르는 것이다.
177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인격과 진리, 이 두 가지와 관련되어 있다. 진리를 증언하는 인격에 대한 믿음을 통해 진리를 믿게 되는 것이다.
178 우리는 오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만을 믿는다.
179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초자연적인 선물이다. 믿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180 ‘믿는다는 것’은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인간 행위로서,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한다.
181 ‘믿는다는 것’은 교회의 행위이다. 교회의 신앙은 우리보다 앞서 가며, 우리의 신앙을 낳고, 지탱하고, 기른다. 교회는 모든 신자의 어머니이다. “교회를 어머니로 삼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을 수 없다.”55)
182 “우리는 문서와 구전으로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에 포함된 모든 것과, 교회가 거룩한 계시로 제시하는 모든 것을 믿는다.”56)
183 신앙은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주님께서 몸소 이렇게 확언하신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
184 “신앙은 미래에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앎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57)
신앙 고백.
1. 사도신경.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2.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