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강의 별 달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3.30 Zundert ~1890.7.29일 Auvers-sur-Oise)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젊어서는 신학 공부에 열중하다가 28세(1880년)때에서야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초기에는 렘브란트와 밀레의 화풍을 익혀 그 영향을
받아서 사실주의적인 어두운 느낌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1886년에 파리로 가서 베르나르 등 인상파 화가들과 사귀면서부터 타는 듯한 열광적인
화풍으로 바뀌었다. 1888년에 남프랑스의 아를로 가서 한때는 고갱과 생활을 같이하면서, 그의 예술의 개화기를 맞아 후기 인상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활약하였다. 그는 강렬한 주관에 의한 타는 듯한 열정적인 화풍으로 태양과 해바라기를 즐겨 그렸다. 그러나 정신병에 걸려 요양 중 권총으로
자살하려다 실패하고, 치료를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주요 작품으로 [감자 먹는 사람들],[해바라기],[자화상]등이 있다. 고흐는 일반적으로
렘브란트 이후로 가장 뛰어난 네덜란드 화가로 손꼽힌다. 그는 근대 예술에서 인상주의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 모두는 오직
10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다. 색의 개념을 파괴하고, 거친 화풍과 결국은 그를 자살에 이르게 한 정신적인 고통이 표현된 그런 작품이 전부이다.
그의 걸작 중에 많은 자화상과 잘 알려진 [The Starry Night](1889)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말에 소련이 독일로부터 철수할 때
그들은 많은 독일의 예술 작품을 함께 가지고 갔다. 이 명작들은 레닌그라드의 Hermitage의 지하에 숨겨졌다. 이것은 거의 반세기 동안 소련
비밀이었다. 그들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전시해 놓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세느, 고갱과 더불어 네덜란드의 화가이자 드로잉맨으로 가장 뛰어난
후기 인상파 화가이다. 그의 삼촌은 세계적인 화상 Goupil and Co.의 상인이었다. 1869년 The Hague에 있는 지사에 일하기
위해 갔다. 1873년 그는 런던 지사에 보내졌고, 여관 여주인의 딸과 불행히도 사랑에 빠졌다. 이것은 여자와 함께 행복을 찾으려는 몇 가지
비참한 시도의 첫 번째였고, 그의 보상받지 못한 열정으로 그는 너무 상심했고, 곧 그의 일을 떠났다. 그는 1876년 무보수의 조교수로 영국에
있는 학교로 돌아갔고, 그의 도시에서의 비정함에 대한 경험은 종교적으로 열중하고 그의 제자가 따르도록 일깨워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신교도의
목사였고, 고흐는 성직자로서 교육받았으나, 그는 1878년 그의 학업을 버리고 예비 목사로서 일하기 위해 벨기에 있는 the grim
Borinage 주의 가난한 갱부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의 열정으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그는 자신의 세계를 포기했고, 그의 학업을 포기했다.
그는 Borinage에 남았고, 가난과 정신적 병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예술이 그의 일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인간에게
위안을 주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부터 그는 그의 새로운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혼자만의 열정과 함께. 그는 종종 극도의 가난, 영양 실조로
고통받았으며, 그의 삶에서 나머지 10년의 결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약 800개의 그림과 데생 작품을 그렸다. 1881부터 1885년까지
고흐는 네덜란드에 살았다. 때때로 하숙을 하기도 했고, 그의 헌신적인 동생 테오로부터 그의 작은 월급으로 고흐는 자금 지원을 받았다. 그의
휴머니즘을 유지하면서 그는 농부와 노동자들을 그렸다. 그 대표적인 것이 'The Potato Eaters'이다. 그는 테오에게 썼다. "나는 이
사람들을 존중하려 노력했다. 그들의 작은 램프 아래 감자를 먹으면서, 그리고 그들의 육체적 노동과 그들이 정직하게 그의 돈을 버는 방법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들을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1885년 고흐는 Antoine Mauve의 충고로 Antwerp로 이사갔고, 대학에서 몇 달 동안
공부를 했다. 대학의 교육은 그런 개인주의자에게 영향을 거의 주지 못했다. 그러나 1886년 2월 그는 파리로 이사갔다. 그곳에서 그는 피사로,
드가, 고갱, 슈레, and Toulouse-Lautrec등을 만났다. 이때 그의 그림은 인상주의와 사실주의 도덕성을 잃고 있는 일본의 목판의
영향을 받아 격렬하게 변하고 있었다. 고흐는 심볼과 색의 표현할 수 있는 가치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그는 이것을 인상주의 화가가 그랬듯이 공기와
빛의 가시적 모습을 재구성 할 목적으로 사용했다. "내가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을 시도하는 대신 나는 더욱 강렬한 나 자신의
표현을 위해 내 방식대로의 색을 사용한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인간본성의 무서운 열정을 빨간색과 녹색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그가 Seurat의 점묘법에 의해 영향받았던 때 그는 더 광범위하고, 정열적이고, 힘찬 필법을 찾아서 떠났다. 1888년 2월 고흐는
Arles(아를)에 정착했고 그 곳에서 그는 15개월 동안 200개가 넘는 유화를 그렸다. 이 시기에 그는 그림을 전혀 팔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했고, 환각증세와 함께 정기적으로 재발하는 신경성의 질환으로 고생했다. Arles에서 그는 동업자를 찾는데 혈안이 되다시피 했고 결국 그해
말엽에 고갱을 만났다. 그러나 그 둘의 싸움의 결과로 그 유명한 사건인 고흐가 자신의 왼쪽 귀를 자름으로 인해 그는 더욱 고통받게 된다. 이
사건은 그의 작품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으로 유명해진다. 1889년 5월 그는 자신의 요구에 따라 Arles
가까이의 St Ray의 정신요양소로 갔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Starry Night와 같은 놀란 만한 작품을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 그는 그해동안 150개의 데생과 그림을 만들었다. 1889년 테오는 결혼했고, 1890년 5월에 전문가 Dr.Paul Gachet와
후원자와 같이 살고 있는 그와 가까운 Auvers - sur - Oise로 이사했다. 거기에서 그는 그의 모든 정열을 폭발적으로 쏟아 부었고,
그의 삶의 마지막 70일 동안 70개의 유화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의 정신적 고뇌와 압박은 점점 더 심해졌고, 1890년 7월 29일 권총
자살로 그는 죽었다. 그는 그의 일생동안 오직 한 개의 작품을 팔았다. (Red Vineyard at Arles; Pushkin Museum,
Moscow),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의 예술 세계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그 후에 빠르게 높아졌다. His
influence on 인상주의, 야수파와 추상주의에 대한 그의 영향은 거대한 것이었고, 그것은 20세기 예술의 많은 다른 국면에서 나타났다.
그의 질풍 같고, 드라마 같은 삶과 그의 생각에 대한 굽힐 줄 모르는 의지가 그를 근대 최고의 문화적 영웅 중에 하나로
만들었다.
뜨거운 감성의 부활 빈센트 반 고흐
태양처럼 뜨거운 정열을 가진 화가! 우리는 고흐(Gogh, Vincent
van 1853~90)를 이렇게 기억한다. 자살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그 순간까지, 그는 인간의 뜨거운 내면세계를 화폭에 담아 냈다. 현실에
대한 절망의 내면은 그에게 작렬하는 태양의 색채로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1853년, 네덜란드 남쪽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미술상의 점원에서부터 출발한 화가이다. 하지만 점원이라는 직업은 그의 격정적인 성격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목사가 되기를 결심한 그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전도사의 길을 걸으며 미래의 자신을 준비하지만 그 역시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후 고흐가 화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운명적이었다. 남프랑스의 아를르에 정착하면서부터 고흐는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선다. 이미 그의 나이가 서른을 넘어선 시기였다. 북프랑스의
오베르에 있는 가셰 박사의 병원 생활과 자살에 이르기까지, 그는 4~5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진정으로 찾아 헤맸던 내면 세계로의 여행을
떠난다. 1879~1880년경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에서 고흐는 데생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밀레의 작품들을 모사하며 수많은 습작으로 데생에서
가능한 모든 테크닉을 익히고 실험했다. 1884년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그의 색조는 은은한 서정성과 함께 어둡고 두터운 색조를 보이며 변화를
꾀한다. 그리고 급속하게 변화된 그의 회화 기법은 1886년 파리에 정착하면서 활짝 피기 시작했다. 색조를 분할하고, 빛을 표현해 내기 위해
어지럽게 진동하는 붓의 터치는 바로 이 시기에 나타난 결과물이었다. 1888년 2월부터 1년여의 기간 동안 머물렀던 아를르에서 고흐는 천재성을
발휘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강렬한 색채를 통해 그는 터질 듯한 감정을 표현해 냈다. 하지만 고흐의 작품 세계는 점점 위태로워지는
신경과민과 광기로 점차 이성의 울타리를 허물고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고갱과의 언쟁 끝에 발작을 일으키고,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신의
귀를 잘라 버리는 일대 사건을 저지르고 만다. 이 사건으로 극도의 정신적인 불안감에 고통받았던 고흐는 스스로 쌩 레미 요양원에 입원할 것을
요청했다. 요양원에서도 발작은 계속되었지만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이 시기에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는, 극도의 절망과 긴장감을 다시
경험한 것이다. 실편백나무와 올리브나무는 커다란 불꽃으로 꼬여서 그려졌다. 구름은 거대한 파도처럼 흐르고, 태양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광폭하게
타올랐다. 1890년 5월, 쌩 레미를 떠나 오베르 쉬르 와즈로 간 고흐는 의사 가셰 박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준비한다.
그는 일시적인 진정의 상태를 맞이했지만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고 이성을 잃었다. 그리곤 끝내 자신의 가슴에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며 마지막 숨을
거둔다. 귀를 자른 미친 화가. 고흐를 이야기할 때 항상 거론되는 말이다. 하지만 정신나간 미치광이라거나 저주받은 화가라는 정의는 그에 대한
대중들의 편견에 불과하다. 고흐가 살다간 세기말은 우울한 시대였다. 자본주의와 과학 문명의 급속한 발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었다. 리얼리즘과 인상주의가 시대적인 방황을 틈타 등장했으나, 이들은 금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본질적인 정신세계를 직시했던 고흐에게는
외부 세계의 물질적인 변화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회화 세계는 인간의 내면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절망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또한 동시대의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고흐는 그들의 빛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빛에 의해 반사되는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태양 그 자체를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태양은 그의 내적 세계를 신과 연결시켜 주는 절대적인 길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많은
태양의 그림이 등장한다. 회오리 치는 듯한 그의 태양들은 정신적인 혼돈의 세계를 대변하는 동시에 그 갈등의 폭만큼이나 거대한 희망을
상징한다.해바라기를 닮은 화가 고흐. 미치광이 같은 그의 열정은 태양빛의 강렬함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 해바라기와 너무도 흡사하게 닮아 있다.
그리고 고흐가 해바라기였다면, 강렬한 태양빛의 구원은 바로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산업화된 문명과 인간성이 상실된 시대로부터 고흐는
좌절감을 많이 느꼈다. 하지만 그의 탈출구는 외부에 있지 않았다. 자신의 몸 속 깊은 곳, 치열한 내면 세계를 어떻게 예술로 풀어 나갈 것인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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